지하철 문이 열리는 섬뜩한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인파에 적운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퀴퀴한 땀 냄새, 짙은 화장품 향, 그리고 낯선 금속성 냄새가 뒤섞여 그의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무림에서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그였지만, 이런 종류의 ‘압박’은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어깨를 스치는 타인의 팔, 등에 닿는 낯선 이의 가방,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휴대용 기계음과 알 수 없는 언어의 나열. 이 모든 것이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어찌 이리도 스스로를 옥죄는가.”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주변 소음에 묻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며칠째 이 ‘신무결’이라는 자의 몸에 갇혀 현대 문명이라는 기이한 감옥 속을 헤매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라는 것은 허리를 지탱해주지 못했고, 손안의 작은 거울(스마트폰)은 시도 때도 없이 번쩍이며 정신을 산란케 했다.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러웠다. 무림에서는 단 한 번의 기합으로 수십 명의 무사를 날려 버릴 수 있었거늘, 이곳에서는 그저 타인의 시선을 피하며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왼쪽 눈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마안의 각성은 아직 불완전하여, 시야는 종종 일그러지고 현실은 왜곡되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의 기운이 흐릿하게 보였다. 옅은 푸른색, 탁한 회색, 그리고 간혹 섬뜩한 검은색 기운들이 뒤섞여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저 검은 기운들은 필시 무림의 마도들과 다를 바 없는 욕망과 악의의 표출이리라. 그는 낡은 정장 재킷의 단추를 다시 한번 여몄다. 뻣뻣하고 갑갑한 옷차림은 그의 움직임을 제약했고, 무림에서의 가벼운 도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주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뚫린 좁은 길을 따라 수많은 인간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였다.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매연과 경적 소리, 공중에 울려 퍼지는 확성기 소리가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이 세계는 거대한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적운비는 이 혼돈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혼돈이 있다면, 질서를 세울 자가 필요하다. 이 세계가 새로운 마교가 될지언정, 나의 질서 아래 복종케 하리라.’
그는 태산 그룹이라는 거대한 건물의 회전문으로 들어섰다. 웅장한 로비는 대리석과 유리로 장식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조명은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이곳의 인간들은 빛과 화려함에 집착하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철제 상자에 몸을 싣자, 또다시 밀폐된 공간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함께 탄 직원들의 희미한 기운들이 그의 마안에 감지됐다. 대부분은 옅은 회색, 무기력과 피로의 색이었다.
마케팅팀 사무실에 도착했다. 수십 개의 책상이 빼곡하게 들어찬 공간은 어수선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전화벨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낮은 대화 소리들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소음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적운비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한 여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서아, 이른바 ‘윤비서’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적운비의 기이한 행동과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상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관찰 대상처럼 여기는 듯한 미묘한 눈빛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의 마안은 그녀에게서 희미한 푸른색 기운을 감지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푸른색.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묘하게, 적운비 자신을 향한 짜증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를 다루는 사육사의 그것과 같았다.
“신무결 대리님, 출근 잘하셨습니까?”
윤비서의 목소리는 깔끔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운비는 그 목소리 저변에 깔린 미세한 피로와 짜증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 전무님께서 대리님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바로 전무실로 가시죠.”
적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전무.’ 무림의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윤비서가 언급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직속 상사이며, 이 태산 그룹 내부에서 적운비를 경계하는 인물 중 하나.
전무실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짙은 담배 냄새와 함께 싸늘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책상 뒤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중년의 사내, 오 전무였다. 그의 얼굴은 붉은 기가 돌았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적운비의 마안은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검은색 기운을 감지했다.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강렬하고 농밀한 검은색. 욕망, 권력욕, 그리고 비열함이 뒤섞인 탁한 기운이었다. 무림의 탐욕스러운 세도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오 전무는 적운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왔나, 신 대리. 아니, 신무결 씨라고 불러야 하나? 하긴, ‘대리’라는 직책도 과분하겠지. 자네 같은 ‘낙하산’에게는 말이야.”
‘낙하산.’ 적운비는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오 전무의 비웃음 섞인 어조와 짙은 검은색 기운에서 그것이 자신을 모욕하는 표현임을 직감했다. 무림이었다면 이미 그의 목은 저 멀리 날아가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무림이 아니었다. 주먹과 검이 아닌, 겉치레와 언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싸우는 곳이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적운비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내면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요동쳤지만, 표정은 평온을 유지했다.
오 전무는 그의 태연한 모습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용무? 물론 있지. 자네가 태산 그룹에 들어온 이상, 놀고먹을 수는 없지 않나. 첫 임무를 주도록 하지.”
그는 책상 위 서류 뭉치를 뒤적거리더니, 한 장의 종이를 적운비에게 던지듯 내밀었다. 종이는 책상 위를 미끄러져 적운비의 손끝에 닿았다.
“내년도 마케팅팀 예산안이다. 자네가 할 일은 이 예산에서 정확히 10%를 삭감하는 거야. 납득할 만한 이유와 함께 말이지. 일주일 안에 가져와.”
오 전무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조롱과 함께, ‘너는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10% 삭감.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이는 적운비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험이자, 그를 좌절시키기 위한 명백한 함정이었다. 마케팅팀의 예산은 이미 최소한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10% 삭감은 곧 팀원들의 반발과 업무 마비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적운비는 서류를 들고 오 전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에서는 마안의 붉은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오 전무의 짙은 검은색 기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오 전무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마치 맹수의 눈빛을 마주한 듯한 미약한 공포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적운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의 내면은 이미 거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곳의 싸움 방식이라면, 나는 이들의 방식에 맞춰 싸워주마. 그리고 결국, 나의 방식을 관철시킬 것이다. 네놈이 던진 작은 돌멩이가 결국 태산을 무너뜨리는 시작이 될 줄이야….’
그의 마안은 더욱 격렬하게 붉은빛을 토해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천마 적운비의 강렬한 의지이자, 첫 번째 도전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는 오 전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전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오 전무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적운비는 서류 뭉치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뻣뻣한 정장 안에서 그의 심장이 맹렬하게 뛰었다. 무림에서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 하지만 본질은 같았다. 상대의 의지를 꺾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
윤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그녀의 푸른 기운 속에 섞여 있던 미묘한 짜증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적운비의 표정에서 읽어낸 미약한 긴장감과 호기심이 더해져 있었다.
“오 전무님과는 잘 말씀 나누셨습니까?”
적운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마안은 그녀의 푸른 기운 속에 숨겨진 미세한 파동을 읽어냈다. 그녀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오 전무의 첫 임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예산 삭감. 그것이 내 첫 임무더군.”
적운비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윤비서는 그의 예상치 못한 평온함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10% 삭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쉽지 않은 임무일 겁니다. 이미 저희 팀 예산은 거의 바닥 수준이라서요.”
그녀의 말에는 은근한 경고와 함께, 적운비가 이 임무를 실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적운비는 개의치 않았다.
“쉬운 일이었다면 내게 맡기지도 않았겠지.”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푹신한 의자는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의 의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서류 뭉치를 펼치자, 복잡한 숫자와 항목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림의 병법서나 마교의 비밀 문서보다도 더 난해해 보이는 글자들이었다.
‘이것이 이 세계의 병법이로구나. 숫자를 가지고 싸우고, 종이 위에 권력을 새기는 방식. 좋다. 천마 적운비가 이깟 종이 쪼가리 하나 정복하지 못할 줄 아느냐.’
그의 마안은 여전히 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사무실의 혼잡한 소음과 알 수 없는 기운들이 뒤섞여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정신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첫 번째 전투. 예산 삭감이라는 이름의 전쟁. 적운비는 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한 장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태산 그룹, 그리고 오 전무. 너희가 천마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내 질서에 복종하는 날이 올 때까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적운비는 자신만의 마교를 건설하기 위한 첫 삽을 뜨고 있었다.
적운비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익숙지 않은 감촉이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덜 거슬렸다. 오 전무의 전무실에서 돌아오는 짧은 복도 동안, 그의 마안은 끊임없이 욱신거렸다. 붉은 기운이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며, 시야를 뿌옇게 흐트러뜨렸다. 사무실의 평범한 풍경, 모니터 화면의 푸른빛, 동료들의 흐릿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각양각색의 기운들이 그의 감각을 뒤흔들었다. 푸른색, 회색, 옅은 노란색… 그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마치 거대한 탁류처럼 그의 정신을 휘감았다.
윤비서가 다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희미한 푸른색 기운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아까보다 훨씬 짙어진 호기심과 함께, 미묘한 걱정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오 전무의 첫 임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위태로운 감정선이 그녀의 푸른 기운 속에 가늘게 일렁였다.
“오 전무님과는 잘 말씀 나누셨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관찰자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적운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마안은 그녀의 푸른 기운 속에 숨겨진 미세한 파동을 읽어냈다. 그녀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오 전무의 첫 임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예산 삭감. 그것이 내 첫 임무더군.”
적운비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차갑고 건조한 울림이 사무실의 웅성거림 속에 스며들었다. 윤비서는 그의 예상치 못한 평온함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렸다. 그녀는 아마도 그가 분노하거나, 당황하거나, 혹은 체념하는 모습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운비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고요했다.
“10% 삭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쉽지 않은 임무일 겁니다. 이미 저희 팀 예산은 거의 바닥 수준이라서요.”
그녀의 말에는 은근한 경고와 함께, 적운비가 이 임무를 실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푸른 기운이 더욱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적운비는 그녀가 자신에게 일종의 연민 혹은 동정심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너무나도 미미해서,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쉬운 일이었다면 내게 맡기지도 않았겠지.”
적운비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얇은 종이들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 차가운 책상 표면에 부딪히며 '탁'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사무실의 소음 속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윤비서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등 뒤로 느껴지는 푸른 기운은 여전히 복잡한 감정의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적운비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푹신한 의자의 감촉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의 의지는 그 어떤 바위보다도 단단해졌다. 서류 뭉치를 펼치자, 복잡한 숫자와 항목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케팅 활동비', '인건비', '사무용품', '접대비'… 무림의 병법서나 마교의 비밀 문서보다도 더 난해해 보이는 글자들이었다.
‘이것이 이 세계의 병법이로구나. 숫자를 가지고 싸우고, 종이 위에 권력을 새기는 방식. 좋다. 천마 적운비가 이깟 종이 쪼가리 하나 정복하지 못할 줄 아느냐.’
그의 마안은 여전히 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눈꺼풀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와 함께, 시야가 때때로 일렁였다. 사무실의 혼잡한 소음과 알 수 없는 기운들이 뒤섞여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정신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첫 번째 전투. 예산 삭감이라는 이름의 전쟁.
그는 서류의 첫 페이지에 적힌 '20XX년 마케팅팀 예산안'이라는 글자를 응시했다. 무림에서는 병사들의 수, 식량 비축량, 무기 보급량, 그리고 각 문파의 세력도를 파악하는 것이 곧 전략의 시작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숫자가 곧 힘이고,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이 곧 지형도이자 병사들의 배치도인 셈이었다.
“허어….”
낮은 탄식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가 이해하는 방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인건비' 항목에 적힌 천문학적인 숫자는 그에게 그저 무의미한 나열처럼 보였다. 무림에서는 검 한 자루, 비급 한 권이 더 중요했고, 사람의 목숨은 그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고 있었다. 사람의 가치마저도 숫자로 매겨지는 듯한 기이한 위화감이 그를 덮쳤다.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니. 마교의 회계 담당이라면 단번에 이 모든 허점을 꿰뚫었을 터인데.’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마안의 욱신거림이 잠시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는 한층 더 선명해져 있었다. 붉은 기운이 눈동자 주위를 감싸며, 서류 속의 숫자들을 마치 살아있는 기운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정 항목에서는 희미한 푸른색 기운이, 다른 항목에서는 탁한 회색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각 숫자들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마케팅 활동비' 항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안에는 다시 수십 개의 세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온라인 광고', '오프라인 프로모션', '협찬 및 제휴', '시장 조사'…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림의 복잡한 진법도 이 정도로 어지럽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군.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하나의 줄을 끊으면 다른 줄이 흔들리고, 결국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구조.’
그는 손가락으로 서류 위를 짚어 내려갔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숫자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붉은 마안이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하며, 그의 뇌리에 각 항목의 상호 관계와 숨겨진 의미들을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윤비서.”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의 소음을 뚫고 나갔다. 윤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 기운이 순간적으로 짙어졌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물을지, 혹은 어떤 지시를 내릴지 예측하려는 듯 보였다.
“이 항목들, 각각의 세부 집행 내역과 지난 3년간의 예산 집행 보고서를 가져와라. 그리고 각 항목별로 담당자가 누구인지도 명확히 표기해라.”
적운비의 지시는 간결하고 명확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윤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가 곧바로 예산 삭감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보통의 '낙하산' 상사라면 대강 훑어보고는 비현실적인 지시를 내리거나, 아예 손을 놓아버렸을 터였다.
“네? 지금 당장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그래. 지금 당장. 최대한 빨리.”
적운비는 그녀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거대한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종이 한 장이 바로 그 전장의 지도였다. 그는 이 지도를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했다. 오 전무의 검은 기운이 여전히 그의 뇌리 속에서 비웃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검은 기운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위협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투지를 더욱 불태우는 촉매가 될 뿐이었다.
윤비서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단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푸른 기운 속에 미묘한 짜증이 다시 피어올랐지만, 그 안에는 적운비의 예상치 못한 면모에 대한 일말의 경외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적운비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마안은 더욱 격렬하게 붉은빛을 토해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천마 적운비의 강렬한 의지이자, 첫 번째 도전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는 오 전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전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오 전무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적운비는 서류 뭉치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뻣뻣한 정장 안에서 그의 심장이 맹렬하게 뛰었다. 무림에서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 하지만 본질은 같았다. 상대의 의지를 꺾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
그는 서류의 항목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마안은 숫자의 배열 속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어떤 항목은 불필요하게 부풀려진 듯한 탁한 회색 기운을 뿜어냈고, 어떤 항목은 비효율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가는 듯한 흐릿한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이것이 이 세계의 약점이로구나. 허술한 관리, 불필요한 낭비,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개인의 욕망.’
그는 오 전무의 짙은 검은색 기운을 떠올렸다. 그 기운은 이 예산안 곳곳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단순히 10%를 삭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 전무는 적운비에게 이 혼란스러운 미로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들고, 결국 실패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천마 적운비는 미로에 갇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로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태산 그룹, 그리고 오 전무. 너희가 천마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내 질서에 복종하는 날이 올 때까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를 수많은 인간들이 개미떼처럼 오가고 있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적운비는 자신만의 마교를 건설하기 위한 첫 삽을 뜨고 있었다. 예산 삭감이라는 이름의 작은 전투는, 거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의 마안은 더욱 강렬하게 붉은빛을 토해내며, 이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암흑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그의 맹렬한 의지를 세상에 선포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는 더 이상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첫 번째 무기이자, 그의 새로운 마교를 건설하기 위한 설계도였다.
적운비는 사무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푹신한 등받이가 낯설었지만, 그의 등에는 이미 강철 같은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창밖의 도시 소음은 여전히 그의 귀를 거슬리게 했지만, 이제는 그 소음 속에서도 특정한 패턴과 흐름이 읽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혼돈처럼 보였던 처음과는 달랐다. 마안이 각성하면서 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고, 세상은 그에게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는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유기체의 혈관과도 같았다. 숫자로 가득 찬 표와 그래프들은 마치 혈액의 흐름을 나타내는 듯했다. 어떤 항목은 불필요하게 부풀려진 듯한 탁한 회색 기운을 뿜어냈고, 어떤 항목은 비효율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가는 듯한 흐릿한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그 기운들은 마치 마령들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처럼 적운비의 마안을 자극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의 왼쪽 눈을 다시 한번 강타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고통은 그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자,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의 증표였다.
‘이것이 이 세계의 약점이로구나. 허술한 관리, 불필요한 낭비,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개인의 욕망.’
그는 오 전무의 짙은 검은색 기운을 떠올렸다. 그 기운은 이 예산안 곳곳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단순한 10% 삭감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 전무는 적운비에게 이 혼란스러운 미로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들고, 결국 실패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오 전무의 시커먼 욕망은 예산안의 숫자 곳곳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마치 독버섯처럼, 조직의 생기를 빨아먹는 기생충처럼.
‘무림에서라면 이런 자는 단칼에 목을 베었을 터. 허나 이곳은 다르다. 이곳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목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핏비린내 나는 살육 대신, 지독한 계산과 냉철한 분석으로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방식. 그는 이미 고금제일의 마도(魔道)를 이룬 천마였다. 이제는 이 현대라는 새로운 무림에서, 숫자와 정보라는 새로운 무기를 들고 자신만의 마도를 펼쳐 보일 차례였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비서였다. 그녀는 양손 가득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세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푸른 기운은 아까보다 더욱 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짜증과 함께 경외감, 그리고 미약한 호기심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적운비가 고작 몇 분 만에 이토록 방대한 자료를 요청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지난 3년간의 예산 집행 보고서와 각 항목별 세부 내역, 그리고 담당자 표기까지 완료했습니다.”
윤비서는 서류 뭉치를 그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이 살짝 흔들렸다. 그만큼 자료의 양은 엄청났다. 그녀의 눈은 적운비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는 그가 이런 복잡하고 지루한 서류 더미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보통의 '낙하산'이라면 한숨을 쉬거나, 아예 던져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적운비의 눈은 이미 서류 뭉치를 꿰뚫고 있었다. 그의 마안은 붉은 빛을 더욱 강렬하게 뿜어내며,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숫자들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려 들었다.
“수고했다. 이제 이 자료들을 분석할 것이다. 윤비서는 잠시 대기하고 있어라. 추가 지시가 있을 것이다.”
적운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윤비서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푸른 기운은 여전히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적운비를 향했다. 마치 미지의 존재를 관찰하는 학자처럼.
적운비는 가장 위에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마케팅팀의 연간 예산 집행 보고서. 그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스치자, 종이의 질감과 인쇄된 잉크의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 세계의 종이는 무림의 비단이나 죽간과는 또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하지만 본질은 같았다. 정보.
그는 첫 페이지부터 꼼꼼하게 훑어 내려갔다. 그의 마안은 단순한 글자와 숫자를 넘어, 그 안에 담긴 기운들을 읽어냈다.
‘마케팅 활동비, 3억 원. 전년 대비 10% 증가. 세부 내역… 온라인 광고, 오프라인 프로모션, 협찬 비용…’
온라인 광고 항목에서 짙은 회색 기운이 감지되었다. 불필요하게 높은 단가, 모호한 집행 내역. 마안은 그 회색 기운의 근원에 검은색 기운이 희미하게 섞여 있음을 포착했다.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
‘이것은… 마치 마교의 자금 흐름과 비슷하군. 겉으로는 합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은밀한 착복과 낭비가 만연해 있다.’
그는 즉시 해당 항목의 지난 3년간의 집행 내역을 펼쳤다. 년도별로 비슷하게 부풀려진 회색 기운. 그리고 그 기운의 중심에는 항상 같은 담당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현우. 박 팀장이라는 직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박현우… 오 전무의 검은 기운과 연결된 자인가.’
마안은 박현우의 이름에서 오 전무의 검은 기운과 미약하게 연결된 듯한 촉수를 감지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부패의 사슬. 적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목표가 정해졌다.
그는 페이지를 넘겨 다른 항목들을 살폈다. ‘직원 복리후생비’, ‘업무추진비’ 등. 곳곳에서 탁한 회색과 흐릿한 푸른 기운이 발견되었다. 비효율적인 지출, 명목뿐인 행사,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개인의 이득을 취하려는 작은 욕망들. 이 세계는 거대한 먹이사슬과도 같았다. 힘없는 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들.
적운비는 펜을 들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사각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특정 항목들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전장의 지도를 보며 적의 본진과 보급로를 표시하는 장군처럼.
몇 분이 흘렀을까. 적운비는 마침내 펜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붉은 동그라미와 밑줄로 가득 찬 서류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마안은 여전히 강렬하게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날카로운 통찰력과 냉철한 결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비서를 불렀다.
“윤비서.”
그녀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네, 부장님.”
“이 보고서에 표시된 항목들을 보아라.”
적운비는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 윤비서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눈이 붉은 동그라미와 밑줄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아는 한, 이 항목들은 모두 ‘관례적인’ 지출이었다. 어느 회사에나 있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부분들. 하지만 적운비가 표시한 부분들은 그 ‘관례’ 뒤에 숨겨진 비효율과 불투명성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특히 박현우 팀장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온라인 광고 항목은 그녀조차도 막연하게 의심했던 부분이었다.
“이… 이 항목들은…”
윤비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적운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마안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 항목들은 불필요한 낭비이자, 사적인 이득을 위한 착복의 흔적이다. 나는 이 항목들에서 최소 20%를 삭감할 것이다.”
적운비의 말에 윤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0%? 오 전무가 지시한 10%의 두 배였다. 그것도 특정 항목에서만. 이는 단순히 예산을 줄이는 것을 넘어, 특정 인물들의 권력 기반을 흔들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박현우 팀장과 그 배후에 있을 오 전무를 향한 정면 대결이었다.
“하지만… 부장님, 그렇게 되면 박 팀장님과… 오 전무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윤비서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적운비의 대담함에 대한 경외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단순히 '낙하산'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이 전쟁터에 뛰어든 진짜 전사였다.
적운비는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은 차갑고 비릿했다.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의 질서가 깨지고 있으니. 하지만 기억해라, 윤비서. 나는 그들의 질서에 복종할 생각이 없다. 나는 나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그의 마안은 사무실 너머, 태산 그룹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건물 너머, 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려는 듯한 맹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윤비서. 지금 당장 재무팀에 연락하여 내가 표시한 항목들의 예산 삭감 조치를 통보해라. 그리고 박현우 팀장에게는 오늘 오후 3시, 나를 찾아오라고 전해라.”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윤비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푸른 기운은 이제 짜증보다는 강렬한 긴장감과, 미약하지만 새로운 희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 거대한 폭풍의 한가운데 서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적운비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회색빛 도시. 수많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혼돈.
‘오 전무, 박현우. 너희는 그저 첫 번째 제물일 뿐이다. 이 현대라는 거대한 무림에서, 천마 적운비가 새로운 마교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희생양.’
그의 심장이 맹렬하게 뛰었다. 그의 마안은 더욱 강렬하게 붉은빛을 토해내며, 이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암흑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그의 맹렬한 의지를 세상에 선포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는 더 이상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첫 번째 무기이자, 그의 새로운 마교를 건설하기 위한 설계도였다.
그리고 그 설계도 위에, 그는 피 대신 잉크로 붉은 선을 그었다.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