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화: 눈떠보니 망해가는 하렘대공가의 대공이 되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코를 찌르는 짙은 장미향이었다. 침대 캐노피를 장식한 금실 자수는 낡았지만 여전히 화려했고,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세월의 더께가 앉아 흐릿해져 있었다. 푹신한 침대 시트 아래로 느껴지는 감촉은 실크였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뻣뻣하고 습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여기가… 어디지?’
혼란스러운 시야가 정리되자,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침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었고, 궁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불안정하게 기울어진 듯한 공간이었다. 햇살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지만, 창틀을 장식한 무거운 벨벳 커튼은 먼지를 잔뜩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마치 한때는 찬란했으나 지금은 잊힌 영광만을 간직한 폐허 같았다.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책상에 앉아 끙끙대며 기획서를 쓰던 직장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거대한 하렘 대공가의 마지막 계승자이자 현 대공인 ‘카이젠 발로아르트’의 기억이 대체하고 있었다.
‘카이젠 발로아르트…’
기억 속의 그는 방탕하고 무능했으며, 가문이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부채와 기울어가는 영지를 나 몰라라 술과 여자에 파묻혀 지내다 결국 병으로 쓰러진 한심한 작자였다. 그리고 이제 그 몸은 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렘 대공가라니, 망해가는 판에… 맙소사."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음의 발로였다. 전생에서도 모태솔로로 살다 죽은 나에게 하필이면 하렘 대공가라니.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바로 이 몸에 걸린 저주였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지, 육체와 마음의 유혹은 너를 스쳐 지나갈 뿐.’*
자신을 향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매혹이 무용지물이 되는 저주.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고, 육체적인 관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젠장. 대공의 몸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그 망해가는 하렘 대공가에서 하필이면 이런 저주까지. 이건 신들의 잔인한 농담임이 틀림없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낮은 노크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 전하, 깨어나셨는지요? 새벽부터 미르나 시녀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르나 시녀장이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카이젠의 기억 속에서 미르나 시녀장은 엄격하고도 단호한 여인이었다. 아니, 문제는 미르나 시녀장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시녀들과 함께 두 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한 여인은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고 있었고, 얇은 잠옷 아래로 드러난 어깨와 가슴골은 아슬아슬하게 매혹적이었다. 깊은 올리브색 눈동자는 끈적한 유혹을 담고 나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카밀라. 대공 카이젠의 하렘 중에서도 가장 관능적이고 대담한 여인으로 꼽혔다.
다른 한 여인은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하늘거리는 연한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차분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청초한 아름다움은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할 듯했다.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는 언뜻 순수해 보였으나, 그 속에는 무언가 깊은 집착과 소유욕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세레나. 청초한 외모와 달리, 누구보다 대공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던 여인이었다.
"오랜만이세요, 대공 전하. 밤새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카밀라가 먼저 다가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고, 걸음걸이는 마치 물 흐르듯 유려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내 뺨을 스치려는 듯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짙은 꽃향기가 내 코끝을 스쳤다.
내 안의 모든 감각이 경보를 울리는 듯했으나, 이상하게도 육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도, 살갗을 스칠 듯한 손짓도, 심장은 요동치지 않았고 단지 당혹감과 불편함만 치솟을 뿐이었다.
‘젠장, 저주가 진짜였어.’
나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철벽처럼 굳게 닫힌 가면을 쓰고, 그들의 매혹이 아무런 효과도 없음을 감춰야 했다. 대공으로서의 권위, 그리고 망해가는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전하의 안위를 가장 염려했던 것은 저였어요. 혹여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세레나가 카밀라의 행동을 가로막듯 재빨리 다가서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카밀라보다 한 옥타브 높고 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집착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뻗었던 카밀라의 손을 가늘게 뜬 눈으로 쏘아봤고, 카밀라는 입술 한쪽을 비죽이며 세레나를 응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카이젠의 기억에 따르면, 이 두 여인은 서로를 견제하며 대공의 총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총애의 대상이 된 나는 지금 극도의 불편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괜찮다." 나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몸이 온전히 회복된 듯싶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아아, 전하…!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옵니다." 카밀라가 내 팔에 기대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락 말락 스치고, 달콤한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평범한 남자였다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끌어안았을 관능적인 유혹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멀찍이서 그녀를 밀쳐내지 못하는 답답함과,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에 콧속이 간지러운 불쾌함만 있을 뿐이었다.
내면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발 떨어져! 아니, 제발 저주가 풀려봐. 그럼 나도 남자답게 반응할 수 있을 거 아니냐고! 이 빌어먹을 저주!’
그때 세레나가 재빨리 내 다른 쪽 팔을 잡았다. "전하의 회복을 위해 제가 직접 새벽부터 꽃차를 준비했어요. 따뜻하게 데워 놓았으니, 일어나시면 가장 먼저 드셔야 해요." 그녀의 손길은 카밀라처럼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내 팔을 붙잡은 힘은 의외로 강했다. 그녀의 눈빛은 내가 다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못하게 붙잡으려는 듯 강렬했다.
두 여인의 은밀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카밀라는 내 어깨에 기댄 채 더욱 밀착하려 했고, 세레나는 내 팔을 붙잡고 시선을 고정하며 카밀라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와 열기가 나를 압박했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역겨웠다. 동시에,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대공 카이젠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분명 능글맞게 두 여인을 모두 품에 안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이 끈적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억지로 팔을 빼냈다. 그리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되었다. 회복된 몸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 지금은 시급히 처리할 공국의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미르나 시녀장에게 준비를 지시하도록."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두터운 얼음장 같았다. 카밀라와 세레나는 내 갑작스러운 냉대에 잠시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실망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의문이 스쳤다. 평소의 카이젠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전하, 방금 깨어나신 몸이시온데…" 세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다가서려 했다.
"공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때, 나약하게 몸져누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칼같이 말을 잘랐다. "당장 미르나 시녀장에게 공무를 준비하라 일러라. 그리고 너희 둘은… 잠시 물러나 있어도 좋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준비된 가운을 걸쳤다. 화려했지만 낡은 문양이 새겨진 가운은 나의 어깨에 무겁게 얹혔다. 두 여인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미르나 시녀장의 지시에 따라 방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에서는 아쉬움과 함께 새로운 결의 같은 것이 엿보였다.
텅 빈 침실에 홀로 남겨지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해가는 대공가, 짊어져야 할 부채,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유혹할 하렘 여인들… 그런데 나는 저주에 걸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거울에 비친 카이젠의 얼굴을 바라봤다. 섬세하게 빚어진 듯한 이목구비와 냉철한 푸른 눈동자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갇힌 내 영혼은 한없이 지쳐 있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니. 과연 그런 것이 이 지옥 같은 하렘 대공가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나는 이 망해가는 대공가와 함께 저주받은 채 영원히 고독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차가운 거울 속 내 자신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이 저주받은 몸으로, 망해가는 이 가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그게 내가 이 세계에 빙의된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