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침실에 홀로 남겨지자, 나는 어둠 속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한동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소동, 두 하렘 여인의 끈적한 유혹,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쳐낸 후의 고독한 결심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은 꿈이 아니었다. 이 몸에 깃든 저주, 망해가는 대공가의 막대한 부채, 그리고 곧 나를 옥죄어올 거미줄 같은 하렘 여인들의 존재. 이 모든 것이 나의 새로운 삶을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였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섰다. 낡고 색이 바랜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이 거대한 방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황량했다. 한때는 푸른 초목과 다채로운 꽃으로 가득했을 정원은 잡초가 무성했고, 멀리 보이는 영지의 건물들은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마치 병들어 죽어가는 거인의 시체 같았다. 이곳은 과거의 카이젠 대공이 방탕하게 즐기던 유흥의 장소가 아니라, 내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폐허 그 자체였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이 가문을 재건해야 한다.’
어제 했던 결심을 다시금 되뇌었다. 그 결심은 이제 단순한 생존을 넘어, 나에게 부여된 거대한 임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무능하고 방탕한 카이젠이 아니었다. 이 몸에 빙의된 나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으로 이 모든 난관을 돌파해야만 했다. 이 몸의 주인이었던 카이젠의 상징, 붉은 눈동자에 어두운 심연이 비쳤지만, 그 심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결의가 타올랐다.
정확히 아침 7시, 문밖에서 조용하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미르나 시녀장이옵니다. 기상하실 시간이옵니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미르나 시녀장의 목소리였다. 나는 짧게 "들어오라"고 답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미르나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시녀복 차림이었다. 회색빛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빗어 올려져 있었고, 표정은 정중했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탐색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젯밤의 소동이 그녀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으리라.
"밤새 안녕하셨사옵니까, 전하."
"그래, 괜찮다." 나는 일부러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몸은 온전히 회복된 듯싶다."
미르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침대 옆으로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의복을 들었다.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푸른색 벨벳 로브와 깨끗하게 다려진 흰 셔츠, 그리고 검은색 바지였다. 그녀의 손길은 능숙하고 빨랐다. 그녀가 내 팔을 들어 셔츠 소매에 끼워 넣을 때, 나는 다시금 저주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피부에 닿았지만, 나는 아무런 온기도, 부드러움도, 심지어 간지러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치 나무 인형의 팔에 옷을 입히는 것과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감각이 없는 육체. 절망적인 현실이었지만,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무감각은 때로는 냉철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이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이성과 논리로만 상황을 분석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하렘 여인들의 유혹도, 절망적인 현실도, 나에게는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일 뿐이었다. 감정적인 동요 없이, 마치 한 편의 복잡한 퍼즐을 풀듯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들었다.
의복을 다 갖춰 입자, 나는 미르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미르나 시녀장.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하도록. 그리고 식사 후에 즉시 대공가의 현재 재정 상태와 주요 현안에 대한 보고를 준비해라. 지체 없이."
나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평소의 카이젠 대공이라면 아침부터 공무를 운운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르나의 눈빛에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분부대로 준비하겠사옵니다."
미르나가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은 낡았지만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은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마른 나무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공기 중에 맴돌았다. 잠시 후, 미르나 시녀장과 함께 백발의 늙은 재정 관리인, 알브레히트 남작이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남작의 손에는 두꺼운 장부 몇 권이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은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창백했다.
"알브레히트 남작." 나는 책상에 앉아 그를 차분히 응시했다. "대공가의 재정 보고를 시작하도록."
남작은 내 말에 움찔하더니, 들고 있던 장부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고쳐 잡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예, 예, 전하… 송구하옵니다. 소신, 알브레히트, 보고드리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파리 날개처럼 가늘고 떨렸다. 남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공가의 재정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현재 대공가의 부채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옵니다. 왕실에 진 빚만 해도 지난 5년간 이자가 불어나 원금을 상회하며, 각지의 상단과 귀족들에게 진 빚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옵니다."
그는 두꺼운 장부의 페이지를 넘기며 땀을 흘렸다. "금고는… 전하, 이미 텅 비어버린 지 오래이옵니다. 지난 광산 개발 실패와 북부 영지 투자 실패로 인해 남은 것이 없사옵고… 매달 들어오는 세금으로는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옵니다."
남작의 목소리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영지 곳곳은 황폐화되었사옵니다. 농지는 제대로 경작되지 못하고 있으며, 수확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사옵니다. 주요 교역로 또한 주변 귀족들의 방해로 인해 마비되다시피 했고, 백성들의 불만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사옵니다. 외부 세력의 압박 또한 심화되어, 변경의 소규모 영지들은 이미 대공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사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공가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려는 외부 세력의 끊임없는 이권 다툼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사옵니다."
그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이… 과거 카이젠 대공 전하의 방탕한 생활과… 공무에 대한 무관심이 불러온 결과이옵니다. 소신이 여러 차례 간언 드렸으나…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그의 보고는 마치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내 앞에 토해내는 것 같았다. 천문학적인 부채, 텅 빈 금고, 황폐해진 영지,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분열.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닥쳐올 현실이었다. 그러나 저주 덕분이었을까? 나는 절망감에 휩싸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머릿속은 차가운 계산기와 같았다.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집중했다.
그때, 미르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전하. 하렘 여인들의 존재 또한 대공가의 재정에 큰 영향을 미쳤사옵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과거 대공가의 재력을 등에 업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대공가로부터 끊임없이 막대한 지원을 요구했사옵니다. 현재 그들은… 대공가의 몰락에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대공 전하에게 기대를 걸고 있을 것이옵니다."
미르나의 말은 하렘 여인들이 단순한 유혹의 존재를 넘어, 대공가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깊이 얽혀 있음을 암시했다. 그들은 나의 앞을 가로막을 또 다른 장애물이 될 것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 모든 비극적인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모습은, 미르나와 알브레히트 남작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알브레히트 남작." 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강철 같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지난 5년간의 모든 재정 장부와 대공가의 자산 목록을 빠짐없이 정리하여 나에게 제출하도록. 단 하나의 사소한 물품이라 할지라도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남작은 깜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예, 예, 전하… 허나 지난 5년간의 장부는… 너무나 방대하여…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영지의 주요 수입원과 지출 내역을 세밀하게 분석한 보고서를 요구한다. 어떤 곳에서 돈이 새고 있는지, 어떤 곳에서 수입을 늘릴 수 있는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해 오도록."
나의 말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에는 어떠한 타협도 없었다. 미르나와 알브레히트 남작은 대공의 뜻밖의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대공의 '진정한' 모습에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되는 듯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기대감이 교차했다. 그들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이행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집무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책상 위에 쌓인 두꺼운 장부들과 영지 지도를 바라보았다. 먼지가 앉은 장부 위에 손을 얹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손끝의 감각은 이 모든 혼돈 속에서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방패이자 동시에 가장 큰 족쇄임을 암시했다.
나는 이 망해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첫걸음이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도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후퇴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나의 붉은 눈동자에는 어두운 심연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강렬한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 저주받은 몸으로, 이 폐허가 된 가문을 반드시 재건하고 말리라. 그것이 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이 세계에서 내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였다.
밤은 깊었으나, 대공 카이젠에게는 잠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허락되지 않았다기보다는, 잠시라도 눈을 감을 여유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알브레히트 남작이 가져온 방대한 재정 장부들은 집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특유의 퀴퀴한 향이 코끝을 찔렀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촛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붉은 눈동자는 활자 하나하나를 집어삼킬 듯이 날카롭게 빛났다.
과거의 카이젠이라면 이 엄청난 양의 서류 앞에서 하품을 하며 시녀에게 와인을 가져오라 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숫자들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공가의 피와 살, 생존과 몰락을 결정하는 차가운 진실이었다. 수백 년간 쌓여온 가문의 영광과 부가 어떻게 한순간에 허물어졌는지, 그 잔혹한 과정을 낱낱이 파헤쳐야 했다.
그는 밤새도록 장부를 파고들었다. 그는 닳아 해진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훑었지만, 그 거친 감촉 대신 시각적인 정보만이 뇌리로 흘러들었다. 과거의 대공이 남긴 방탕한 흔적들이 숫자의 형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터무니없는 사치품 구매 내역, 무의미한 연회 비용, 그리고 무엇보다 대공가의 재산을 갉아먹는 거대한 이자율의 대출금들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펜으로 표시된 붉은색 글씨, 채무 상환 기일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경고들이 그의 이성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저주받은 몸은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이성과 계산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대출금 상환 내역을 살펴보던 중, 그는 특히 '실버문 상단 길드'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대공가의 가장 큰 채권자 중 하나이자, 왕국 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거대 상단 길드였다. 그들의 대출금은 다른 어떤 채무보다도 거대했으며, 상환 기한은 놀랍게도 '오늘'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는 혀끝으로 입술을 쓸었다. 메마른 입안에서 흙먼지 같은 맛이 났다.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그의 의식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단순히 숫자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숫자들 사이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으려 애썼다. 불필요한 지출 속에 감춰진 횡령의 흔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자산 목록, 그리고 오래된 계약서 구석에 박혀 있는 미미한 조항들. 마치 거대한 퍼즐 조각들을 맞추는 것처럼, 그는 밤새도록 과거의 문서 속에서 미래의 실마리를 찾았다. 새벽녘,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대공가의 재정 현황과 당면한 위기,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나마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는 '숨겨진 카드'가 명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장부들 속에서 찾아낸, 작지만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정보였다.
날이 밝아오자, 창밖으로는 희뿌연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가 마지막 장부를 덮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미르나이옵니다."
미르나 시녀장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침착함 대신 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전하, 큰일이옵니다! 실버문 상단 길드의 대표, 카엘렌 경께서 찾아오셨사옵니다. 밀린 대출금의 즉각적인 상환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상환 기한이… 바로 오늘까지였다고 하옵니다."
미르나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절망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녀는 이미 밤새도록 장부를 파고든 카이젠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카이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앉아있던 탓에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흐릿한 풍경을 향했다.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를 접견실로 안내하도록 해라. 그리고 차를 준비시키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접대를 마련해라. 대공가가 아무리 몰락했어도, 손님을 맞이하는 격식까지 잃을 수는 없지."
미르나는 그의 예상치 못한 침착한 반응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피로의 흔적을 보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밤새도록 이어진 사투의 흔적과 함께, 흔들림 없는 강철 같은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예, 예, 전하. 분부대로… 이행하겠사옵니다."
미르나가 허둥지둥 집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또 다른 그림자가 문간에 드리워졌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선 여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우아함, 그리고 매혹적인 향기가 집무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대공가의 제1 후궁, 레이디 세라피나였다. 그녀는 한때 왕국의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의 영애였다.
"어머나, 대공 전하께서 벌써 기상하셨사옵니까?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세라피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비단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광택을 뿜어냈고, 섬세하게 장식된 머리핀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은 대공의 안위를 염려하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에는 예리한 관찰과 계산적인 지성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진짜 목적은 대공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직접 확인하고, 무너져가는 대공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카이젠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카이젠은 그 어떤 감각적인 자극도 느끼지 못했다. 저주받은 몸은 그녀의 매혹적인 교태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있었다.
"레이디 세라피나, 이른 아침부터 염려해 주시니 고맙소." 카이젠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사심도, 흔들림도 없었다. "허나 대공가의 모든 일은 이제 나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에 있소. 실버문 상단 길드 건 역시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니, 레이디께서 신경 쓸 필요 없소."
그의 단호하면서도 예의 바른 거절에 세라피나의 매혹적인 미소는 순간 굳어졌다. 그녀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흥미로운 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팔을 잡았던 손을 거두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대공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어머,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신은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부디 무사히 해결하시기를 바라겠사옵니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나 카이젠을 응시했다. 이전에 그녀가 알던 방탕하고 무기력한 대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흔들림 없는 태도는 그녀의 오랜 경험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미르나가 접견실 준비를 마치고 돌아오자, 카이젠은 그녀에게 카엘렌 경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견실 문이 열리고, 실버문 상단 길드의 대표, 카엘렌 경이 들어섰다. 그는 중년의 남성으로, 잘 재단된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서늘하고 계산적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 같았고, 대공가의 몰락을 기회로 삼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이젠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카엘렌 경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존경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경멸과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카이젠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미리 준비해 온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놓았다. 종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접견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본 상단 길드와 대공가 간의 대출 계약서입니다. 명시된 상환 기일은 오늘 자정까지이며, 밀린 대출금은 총 50만 골드입니다."
50만 골드. 그 금액은 현재 대공가의 텅 빈 금고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미르나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세라피나의 눈빛에도 미미한 동요가 일었다. 그녀는 대공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오늘까지 상환되지 않을 시, 계약서에 명시된 바와 같이 대공가의 핵심 자산인 '북부 광산'에 대한 채굴권은 본 상단 길드로 귀속되며, 미상환 채무에 대한 추가 이자와 함께 대공가의 명예는 왕국 전역에 공개적으로 실추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카엘렌 경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대공가의 숨통을 끊으려는 맹수와도 같았다. 모두가 절망적인 상황이라 여겼을 때, 카이젠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없었다. 오히려 밤새도록 장부를 파고들며 얻은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카엘렌 경, 잠시 시간을 내어 나의 제안을 들어주겠소?"
카엘렌 경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 전하의 제안이라니, 흥미롭군요. 허나 저희 상단은 이미 수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