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성 서재는 어젯밤의 격렬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쓰러진 촛대에서 흘러나온 굳은 촛농 자국이 바닥에 검게 얼룩져 있었고, 선반에서 굴러 떨어진 두꺼운 서적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희미한 새벽빛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 어둠을 가르고, 그 속에서 레오니스는 홀로 서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비늘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으로 기묘하게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각이 발산하는 불길한 에너지였다. 차가운 금속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맥동하는 듯한 기운. 그것은 단순한 생물의 것이 아니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 아래, 알 수 없는 힘이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어젯밤 침입자가 남긴 유일한 흔적. 왜 하필 대공성 깊숙한 서재에 침입한 자가 이런 것을 남겼을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퍼즐 조각들을 맞추려는 듯 쉴 새 없이 사고했다.
‘이 비늘 조각. 그리고 어젯밤 침입자의 움직임에서 느껴졌던 기계적인 느낌. 단순한 암살자나 도적이 아니다. 어떤 강력한 조직,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대공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인가.’
레오니스는 비늘 조각을 잠시 응시하다가, 옆에 놓인 흑요석 단검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칼날의 감촉이 그의 손아귀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이 단검은 직전 에피소드에서 그에게 알 수 없는 공명을 일으켰던 물건이었다. 비늘 조각과는 또 다른, 고대의 신비로운 기운이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이 단검이 대공가의 비밀, 그리고 이 몸에 깃든 저주와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단검을 든 채 양피지 지도를 다시 펼쳤다. 지도는 대공가 영지의 외진 지역을 표시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주술적인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이 비문은 재정 보고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 비문이 고대의 어떤 주술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몸에 깃든 저주 또한 단순한 불운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 대공가에 얽힌 고대 주술, 혹은 저주와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육체적인 피로가 엄습했지만, 그의 정신은 그보다 더 날카롭게 정보를 처리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그는 탁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자신이 빙의된 이 몸의 원래 주인, 카이젠 대공에게 걸린 저주가 단순히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대공가 전체를 덮친 거대한 그림자의 일부일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젯밤 침입자의 존재는 이 가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대공가의 재건… 단순히 부채를 갚고 영지를 복구하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미 시녀장 미르나와 재정 관리인 알브레히트 남작의 보고를 통해 파악한 파산 직전의 현실은, 단순한 방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숨겨진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강력한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생존 게임의 일부일 것이다.’
그는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에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강렬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빙의자로서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보는 그의 냉철함은, 공포나 절망 대신 이성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 닥쳐온 이 거대한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오히려 이 위기 상황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희망을 품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탁자에 놓인 비늘 조각을 조심스럽게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흑요석 단검을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했다. 차가운 칼날이 옆구리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검의 존재가 주는 무게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미스터리가 그의 결의를 더욱 굳건히 할 뿐이었다.
대공가의 재건은 이제 그의 존재 이유이자, 이 미스터리를 풀어낼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는 밤이 새도록 잠들지 않고, 이미 파악된 재정 상황과 어젯밤 침입자의 흔적을 어떻게 연결하고 추가 재정 장부를 통해 무엇을 더 파헤쳐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가설과 전략이 그려지고 있었다.
‘우선, 추가로 제출될 재정 장부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특히 의심스러운 지출 내역이나 사라진 자금의 흐름을 추적해야 한다. 하렘 여인들의 배후 세력. 그들의 영향력. 그리고 어젯밤 침입자…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조각난 퍼즐들을 하나씩 맞춰나가야 한다.’
레오니스는 서재의 어둠 속에서, 차가운 이성과 강렬한 의지만으로 자신에게 닥쳐온 거대한 운명과 마주했다. 그의 길은 가시밭길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대공성 집무실에는 밤샘 분석으로 인해 더욱 깊어진 레오니스의 붉은 눈동자가 피로 대신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처리하고 퍼즐 조각을 맞춰나간 정신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 듯했다. 그는 등받이가 높은 대공의 의자에 앉아, 정면의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미르나 시녀장과 알브레히트 남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알브레히트 남작은 어젯밤 대공의 명령에 따라 지난 5년간의 모든 재정 장부와 자산 목록을 수레에 가득 싣고 나타났다. 삐걱거리는 수레 바퀴 소리는 그의 초췌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욱 창백하고 주눅 들어 있었으며, 얇은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는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대공의 시선을 피하며 수레를 탁자 옆에 겨우 세웠다.
미르나 시녀장은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대공 옆에 서서,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녀의 회색빛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빗어 올려져 있었고, 차분한 눈빛은 어떤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을 듯 견고해 보였다. 그녀의 존재는 이 긴장된 공간에 유일한 평온을 불어넣는 듯했다.
레오니스는 탁자에 쌓인 방대한 장부들을 차갑게 응시했다. 가죽으로 엮인 장부들은 두께와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어떤 것은 낡고 해져 있었으며, 어떤 것은 비교적 최근에 기록된 듯 깨끗했다. 먼지가 희미하게 내려앉은 장부들의 산은 대공가의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물 같았다. 그는 어젯밤의 침입 사건과 비늘 조각, 그리고 비문에 대한 의문을 잠시 뒤로하고, 당면한 대공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한편에서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알브레히트 남작."
레오니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남작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지난 5년간의 모든 재정 장부와 자산 목록을 가져왔다고 들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특히, 하렘 여인들과 관련된 모든 지출 내역을 자세히 보고하라."
남작은 대공의 직접적인 질문에 순간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얘졌고,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르나 시녀장의 표정 역시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을 뿐이었지만, 레오니스는 그들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예, 예, 대공님…."
알브레히트 남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문학적인 부채와 황폐해진 영지의 상황을 다시 한번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고, 설명은 두서없이 이어졌다. 레오니스는 그의 보고를 묵묵히 들으며, 중요한 부분에서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대공가의 재정 파탄에 하렘 여인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들었다. 특히 카밀라 상단의 후계자 카밀라가 대공가의 재정을 쥐고 흔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녀와 그녀의 상단이 대공가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부채는 얼마나 되는가?"
레오니스의 질문은 직접적이고 날카로웠다. 남작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절망적이었다.
"카밀라 상단은… 대공가의 주요 채권자 중 하나입니다. 과거 카이젠 대공님의… 방탕한 생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 주면서, 대공가의 재정을 장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이자를 붙이거나, 대공가의 자산을 담보로 잡는 등… 불공정한 계약들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남작은 말을 잇기 힘든지 잠시 침묵했다. 레오니스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의 장부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 장부의 34페이지를 보게. '카밀라 상단과의 가구 구매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기재된 5만 골드의 지출 내역이 있다. 하지만 이 금액은 당시 대공성 가구 전체를 새로 들일 수 있는 금액을 훨씬 상회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대공성 내부의 어떠한 가구 교체도 없었다. 이 지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오니스의 예리한 통찰력은 늙은 재정 관리인마저 놀라게 할 정도였다. 남작은 눈을 크게 뜨고 해당 페이지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의 손은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이미 레오니스는 밤새 모든 장부를 훑어본 상태였다.
"그것은… 대공님께 바쳐진… 일종의 헌납금이었습니다. 카밀라 양이… 대공님께 특별한 선물이라며…."
남작은 말을 더듬었다. ‘헌납금’이라는 표현은 실상 이전 대공의 방탕한 유흥을 위한 비자금이나 다름없었다. 레오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붉은 눈동자는 더욱 차갑게 빛났다. 이렇듯 불투명하고 부당한 거래들이 쌓여 대공가를 갉아먹었음을 그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집무실 문이 예고 없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가에 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카밀라였다. 그녀는 가슴골이 깊게 파인 붉은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그녀의 새하얀 피부 위에서 반짝였다. 도발적인 의상은 그녀의 풍만한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녀는 대공을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님, 벌써부터 저를 그리워하시는 건가요? 제가 없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대공의 탁자 앞에까지 다가와, 그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듯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탁자 모서리를 스쳤다. 하지만 레오니스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유혹적인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도발적인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레오니스의 내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카밀라. 지금은 중요한 대공가의 재정 회의 중이다. 무단으로 침입한 것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
레오니스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사적인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카밀라는 대공의 싸늘한 반응에 순간 당황했다. 그녀의 요염한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레오니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대공님의 재정 문제라면, 제가 더 잘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요? 카밀라 상단은 대공님께 언제든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에 합당한 대가만 지불해 주신다면 말이죠."
그녀의 눈빛은 대공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탐욕스러운 빛을 띠었다. 대가가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이전 카이젠 대공처럼 자신에게 매달려 육체적 쾌락과 재정적 의존을 동시에 충족시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스는 그녀의 유혹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알브레히트 남작을 응시했다.
"남작, 계속해서 보고하라. 카밀라 상단과의 다른 불공정한 계약들은 없는가?"
레오니스의 단호한 태도에 카밀라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대공의 예상치 못한 냉철함과 단호함에 당황하며, 마지못해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붉은 드레스 자락이 문밖으로 사라질 때, 레오니스는 그녀의 눈빛에서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흥미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카밀라의 존재를 통해 레오니스는 대공가의 재정 문제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렘 여인들과 그들의 배후 세력이 얽힌 복잡한 권력 다툼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대공의 쾌락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대공가의 자산을 노리고 침투한 거대한 거미줄의 일부였다.
"미르나 시녀장."
레오니스는 미르나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카밀라 상단과의 모든 계약을 재검토하고, 불공정한 조항들을 찾아내라. 특히, 대공가의 자산이 담보로 잡힌 계약들에 주목해라. 그리고 즉시, 카밀라 상단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하고, 추가적인 대출을 금지하라."
미르나 시녀장은 고개를 숙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공님."
레오니스의 결의는 더욱 단단해졌다. 대공가의 재건은 이 모든 거미줄 같은 관계를 끊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터였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재정 장부들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뒤에 숨겨진 더 큰 그림, 어젯밤의 침입자와 비늘 조각, 그리고 저주의 미스터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음으로 찾아올 인물, 성녀 세레나와의 만남이 이 모든 퍼즐을 푸는 또 다른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재정 보고를 마친 오후, 레오니스는 대공성 응접실로 향했다. 묵직한 오크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응접실은 집무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짙은 녹색 벨벳 소파와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놓여 있었지만,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은 어딘가 모르게 차갑게 느껴졌다. 미르나 시녀장은 대공보다 먼저 도착해, 응접실 한쪽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대공에게 닿았으나,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다시 열리고 한 여인이 발걸음을 옮겼다. 순백의 성의를 입은 성녀 세레나였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응접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변했다. 청초한 외모는 햇살 아래 더욱 빛나는 듯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은근한 유혹의 기운이 대공의 존재를 향해 뻗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고, 짙은 금발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마치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가볍고 우아했다.
세레나는 대공에게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깊은 호수처럼 잔잔한 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대공의 얼굴을 탐색하듯 훑어내렸다.
"대공님,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대공님의 저주를 치료하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지만, 그 속에는 듣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듯한 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녀는 말을 마치며 자연스럽게 대공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대공의 손등을 스쳤다. 이는 분명 의도적인 스킨십이었다. 평범한 남자라면 순간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최소한 당황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오니스는 그녀의 유혹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피부에 닿는 그녀의 부드러운 온기와 섬세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레오니스는 그저 그녀의 의도를 분석하는 데이터로 삼을 뿐이었다. 그의 뇌는 오직 그녀의 행동과 표정, 그리고 목소리 톤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그녀의 스킨십은 그에게 있어 그저 ‘손가락이 손등에 닿았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레오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세레나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오히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었다. 세레나는 대공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내 능숙하게 미소를 되찾았다.
"성녀 세레나. 나의 저주를 치료하는 것이 그대의 임무라고 들었다. 저주에 대해 아는 바를 소상히 말해달라. 특히, 이 저주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대공가의 다른 비밀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
레오니스의 질문은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 친밀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던 세레나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더욱 깊은 미소를 지었다.
"대공님의 저주는 단순한 병이 아니에요. 깊은 어둠이 깃들어 있죠. 대공가의 오랜 역사와 함께 시작된 저주이며, 외부의 강력한 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저를 통해 그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을 거예요."
세레나는 모호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정보를 흘렸다. 그녀의 말은 신비로웠지만, 레오니스의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 그리고 숨겨진 의도를 가려내려 애썼다. ‘외부의 강력한 힘’, ‘대공가의 오랜 역사’라는 단어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젯밤 서재에서 발견한 비문과 지도, 그리고 흑요석 단검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레나는 다시 대공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대공의 뺨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대공님의 몸에 흐르는 어둠은 저를 통해 정화될 수 있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저의 성스러운 힘이 대공님을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드릴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속삭이듯 낮아졌고, 푸른 눈동자는 대공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유혹적인 빛을 발했다. 하지만 레오니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뺨을 향해 다가오는 성녀의 손길은 유혹이라기보다, 그의 반응을 떠보려는 계산된 행동으로 보였다. 그는 오히려 그녀의 반복적인 스킨십 시도에서 어떤 의도를 읽으려 애썼다. 단순히 유혹을 넘어선, 어떤 심리적인 압박이나 정보 탐색의 과정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레오니스는 세레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녀의 심연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 어둠이, 어젯밤 서재에 침입했던 자들과도 연관이 있나? 혹은, 대공가의 숨겨진 지도와 비문, 그리고 이 비늘 조각과도?"
그는 말을 마치며 주머니에서 어젯밤 발견한 비늘 조각을 꺼내 세레나에게 보여주었다. 은회색의 비늘 조각은 햇살 아래서도 기묘한 금속성 광택을 띠고 있었다. 레오니스의 예상치 못한 질문과, 특히 비늘 조각의 등장에 세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일순간 크게 확장되었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미묘한 공포가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비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