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늘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은빛 칼날이 도마 위를 스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예술이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별빛 주방’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은 그녀의 열정과 재능으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스타 셰프였다. 그녀의 요리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으며, 예약은 몇 달치나 밀려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주방을 떠나지 않았다. 완벽주의자적인 기질과 타고난 미식 감각은 그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몸을 갉아먹는 독이기도 했다.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던 그녀는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러나 손님들의 행복한 미소를 볼 때마다 그녀는 모든 피로를 잊었다.
"셰프님, 잠시 쉬시는 게..."
부주방장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코스 요리를 준비하며 접시에 소스를 뿌리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시야가 흐려졌다. 손에 들고 있던 소스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뜨거운 프라이팬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바닥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착각 속에서 몸이 허물어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의식은 암흑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뇌리를 스친 생각은 ‘아, 저 소스… 망쳤네.’ 하는 어처구니없는 후회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냉기 대신 느껴지는 것은 등 뒤를 감싸는 축축하고 쿰쿰한 흙냄새였다. 강하늘은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기억 속 주방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으스스한 회색빛 먼지가 공기 중에 부유하고, 천장은 덩굴 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희미한 별빛만이 새어 들어와 공간을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여... 여기는 어디지?"
메마른 목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어딘가 가벼웠고, 옷 또한 낯선 재질의 얇은 천으로 된 드레스였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끝에 닿았다. 분명 밤색이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윤기가 흐르고 길어진 듯했다. 거울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이곳에는 그녀의 모습을 비출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어딘가 모르게 젊어진 듯한 느낌,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충만한 생명력이 온몸에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맑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때 화려했을 법한, 그러나 지금은 녹슬고 낡은 조리대였다. 그 옆에는 금이 간 냄비와 이가 빠진 국자, 그리고 바스러질 듯한 나무 주걱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이 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황폐하여 마치 수백 년간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폐허 같았다.
"내가 죽은 게 아니었어? 그럼 대체... 여긴 어디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사고 직전의 기억은 선명했지만,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낯선 몸, 이 낯선 공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지만, 코끝을 스치는 곰팡이 냄새와 차가운 공기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방 안쪽을 더듬어 들어갔다. 발아래 밟히는 것은 마른 나뭇가지와 정체 모를 잔해들이었다. 한때 신들의 연회가 열리던 ‘별빛 주방’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곳은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낡은 선반 한구석에 놓인, 먼지로 뒤덮인 작은 칼에 닿았다. 녹이 슬어 있었지만, 그 형태만은 분명한 식칼이었다.
식칼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칼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칼날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보니, 얇은 녹 가루가 묻어 나왔다. 이 칼이 한때 얼마나 많은 재료를 다듬었을까. 얼마나 많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냈을까.
"그래, 주방이야. 망가졌지만, 분명 주방이야."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현대의 강하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요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소스를 걱정하던 그녀였다. 지금 이 낯선 세계, 낯선 몸으로 깨어났지만, 주방 도구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뜨거운 요리사의 혼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방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곰팡이 냄새, 귀를 때리는 정적, 눈에 보이는 황폐함.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었다. 요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신들의 미각이 사라져 신계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시놉시스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자신의 요리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식칼이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푸른빛이 칼날을 감싸고, 그 빛은 이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주방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마른 나뭇가지들이 아주 조금씩, 생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먼지가 쌓인 조리대 위에서도 희미한 풀잎이 돋아나는 환영이 스쳤다.
"이건... 설마?"
자신도 모르게 신력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아멜리아’의 권능이 깨어나고 있는 증거였다. 요리에 대한 그녀의 뜨거운 열정이, 이 망각된 여신의 힘을 일깨우고 있었다.
강하늘은 눈을 번쩍 떴다. 맑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는 혼란 대신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비록 폐허가 된 주방이었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아니, 반드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녀의 요리가, 이 죽어가는 신계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을 유일한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녀의 마음속에 강하게 울렸다. 그녀는 낡은 식칼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신력의 기운이 그녀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앵두 같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여기서… 다시 요리를 시작하자.’
그녀의 결심이 굳어지는 순간, 황량한 별빛 주방의 아주 먼 곳에서,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 여신의 미약한 신력 발현을 감지한 듯,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번뜩 빛을 냈다. 동시에 깊은 심해의 고독한 용왕은 알 수 없는, 지독히도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