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혔다. 폐에 들이찬 공기는 눅눅하고 축축했으며, 곰팡이 냄새마저 풍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화려한 무늬의 천장이었지만, 그 위로 거미줄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얼룩덜룩한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분명 과로로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중이었는데.
“공녀님, 이제 괜찮으신가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낡은 하녀복을 입은 노파가 주름진 얼굴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녀님? 나는 윤서였다. 평범한 직장인, 윤서. 하지만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낯설었다. 가늘고 떨리는, 마치 제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
거울을 찾아 헤매다 겨우 발견한 낡은 전신 거울 속에는, 은빛처럼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과 별빛을 담은 듯한 신비로운 연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서 있었다. 가녀린 몸매와 섬세한 이목구비는 연약해 보였으나, 그 눈동자에는 혼란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것은 나였다. 아니, 내가 아니었다.
아리엘라 드 벨라트릭스.
이름이 저절로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낯선 기억의 파편들. 제국, 마법, 성좌, 귀족, 그리고 몰락. 나는, 현대 한국의 평범한 회사원 윤서가 아니라, 이세계의 몰락 위기에 처한 벨라트릭스 가문의 공녀 아리엘라가 되어 있었다.
“공녀님, 이제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오늘 아침에도 정원사가 또 도망쳤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저와 공녀님뿐이에요.”
노파의 말에 아리엘라, 아니 윤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분명 과로사로 죽을 뻔했는데, 눈 떠보니 이세계의 망해가는 귀족 가문 공녀라니.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겨우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낡고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한때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았다는 ‘별똥별 정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한때 밤하늘의 별똥별이 떨어져 마법의 꽃을 피웠다는 정원은, 이제 시들어버린 꽃들과 무릎까지 자란 잡초만이 무성한 폐허였다. 마법의 힘이 약해지면서 별의 빛이 흐려지고, 그 여파로 정원도 함께 시들어버린 것이다. 정원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별똥별의 눈물’이라는 고대 유물은 보이지 않고, 그저 흙먼지 쌓인 낡은 받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윤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방금 전까지 빚더미에 허덕이며 야근을 밥 먹듯 하던 회사원이었는데, 이제는 이세계에서 파산 직전의 가문과 폐허가 된 정원을 떠안게 된 것이다. 이건 생존이 아니라 생지옥이었다.
“공녀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다시 별똥별이 떨어져 정원이 살아날 거예요.”
노파가 애써 위로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윤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안 돼.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온갖 불합리함과 경쟁을 뚫고 살아남았던 윤서였다. 이깟 이세계의 몰락 위기 따위에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뻔한 인생, 여기서 한 번 뒤집어보자.’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윤서의 가장 큰 무기였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잡초를 헤치고 정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이 정원, 그리고 이 가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정원의 깊숙한 곳, 무성한 잡초와 덩굴에 뒤덮인 오래된 석상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던 윤서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쿵, 하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흑단처럼 짙은 머리카락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늘 단정하고 절제된 옷차림을 선호한다는 배경 설정과는 달리, 그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 있고 흙투성이였다. 깊은 밤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는 감겨 있었지만, 오똑한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 완벽하게 조각된 듯한 이목구비는 그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윤서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남자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푸른빛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고, 주변의 시든 잡초들이 그 빛에 미미하게 반응하며 아주 잠깐 생기를 되찾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마력…?’
윤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이런 폐허 같은 정원에 어째서 쓰러져 있는 거지? 그리고 이 엄청난 마력은 뭐지?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현재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닌 자는 마탑주 칼릭스 드 라크리마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왜 여기에?
경계심과 함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남자가 어쩌면 이 몰락한 정원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윤서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윤서는 한숨을 쉬며 그를 부축하려 애썼다. 엄청난 마력을 지닌 존재라지만, 지금은 그저 거대한 짐짝일 뿐이었다.
“하아, 하아… 대체 무슨 일로 여기 쓰러져 있는 거야….”
간신히 남자를 끌어올려 부축한 윤서는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에 저절로 몸을 떨었다. 그는 분명 살아있었지만, 마치 얼음 조각을 안고 있는 듯 차가웠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 남자를, 이 폐허 같은 별똥별 정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밝혀내야 했다. 어쩌면 이 남자가, 이 모든 절망 속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될지도 몰랐다.
윤서는 남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감겨있는 푸른 눈동자 아래로 그의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완벽한 얼굴은 세상의 모든 고뇌를 잊은 듯 평온해 보였다.
그 순간, 남자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던 푸른 마력이 정원의 시들어가는 꽃 한 송이를 감쌌다. 기적처럼, 그 꽃잎의 가장자리에 아주 미미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윤서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그녀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이 정원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은, 이 몰락한 정원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불길한 예감 또한 엄습했다. 이렇게 강력한 존재가 기억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거대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윤서는 힘겹게 남자를 끌고 정원 중앙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정원을 응시했다. 시들었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은 꽃들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주운 것이 단순한 기억상실의 미남이 아니라, 제국 마탑의 최고 권위자이자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는 것을. 그리고 그의 등장으로 인해, 별똥별 정원의 운명뿐만 아니라 제국의 거대한 비밀과 자신의 미래까지 송두리째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별똥별 정원의 깊은 곳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고대의 힘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신호처럼 보였다.
[별똥별 정원, 프롤로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