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짐을 진 듯 어깨가 짓눌렸다. 윤서는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칼릭스의 팔을 간신히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제법 덩치 있는 성인 남자를 혼자 부축하며 걷는다는 것은, 평생 사무실에서 컴퓨터만 두드리던 그녀에게는 고행이나 다름없었다. 폐허가 된 정원의 흙길은 울퉁불퉁했고, 시든 덩굴과 뿌리들이 발목을 자꾸만 휘감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아, 하아… 이봐요, 좀… 움직여봐요….”
아무런 반응도 없는 남자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는 그저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이 더운 여름밤에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 남자, 정말 사람인가? 아니, 사람이 아니면 더 큰일인데. 윤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남자의 손끝에서 피어났던 푸른 마력, 그리고 그 마력에 반응해 아주 잠깐 생기를 되찾았던 시든 꽃잎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희망이었다. 이 남자가, 어쩌면 이 정원을 살릴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녀의 지친 몸을 움직이게 했다.
정원 입구에서 멀리 보이는 저택의 불빛은 희미했다. 한때 화려했을 저택은 이제 낡고 초라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대문을 지나 겨우 안뜰에 들어서자, 윤서는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남자를 잠깐 바닥에 내려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고통을 호소했다.
“공녀님! 대체 이게 무슨…!”
그때, 저택의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노파, 엘라가 뛰쳐나왔다.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주름진 얼굴에는 경악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노파는 윤서가 끌고 온 남자를 보고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뻐끔거렸다.
“엘라, 괜찮아요. 일단 이분 좀… 안으로 옮겨야겠어요.”
윤서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엘라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윤서의 지친 얼굴과 단호한 눈빛을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달려와 윤서를 부축했고, 함께 칼릭스를 들어 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노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이렇게 건장한 분을… 공녀님, 제가 사람을 불러올까요? 아, 아니, 사람이 없지요….”
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하인이라고는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일단… 빈방으로 옮겨야 하는데….”
저택 안은 정원만큼이나 황량했다. 복도에는 곰팡이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고, 벽지는 곳곳이 찢겨 너덜거렸다. 화려했을 문양의 융단은 먼지에 뒤덮여 본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윤서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피해 1층의 가장 안쪽에 있는,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창고를 개조한 듯한 방으로 칼릭스를 안내했다.
“여기가 그나마… 쓸 만한 곳이겠네요.”
엘라의 도움을 받아 칼릭스를 낡은 침대에 겨우 눕혔다. 흙먼지로 뒤덮였던 그의 얼굴이 침대 시트에 닿자 희미하게 흙자국이 남았다. 윤서는 잠시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감겨있는 푸른 눈, 흑단 같은 머리카락, 완벽하게 조각된 듯한 이목구비. 다시 봐도 비현실적인 미모였다.
‘정말 마탑주가 맞을까? 아니, 그전에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지?’
윤서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혔다. 빙의 전의 삶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과로로 죽어가는 대신, 이세계에서 망해가는 귀족 가문의 공녀가 되어 기억상실의 미남을 주워왔다니.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꿈이라면 제발 깨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눅눅한 공기, 곰팡이 냄새, 그리고 온몸을 쑤시는 근육통까지. 이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현대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치열하게 싸워왔던 그녀의 생존 본능이 깨어났다.
‘좋아, 윤서. 침착해.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해.’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우선, 이 가문의 상황부터 제대로 알아야 했다. 엘라에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 남자의 정체. 마탑주 칼릭스 드 라크리마. 제국 최고의 마법사. 그런 사람이 왜 이런 폐허 같은 정원에 쓰러져 있었을까? 의문의 마법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엘라, 저 분은 좀 쉬게 하고, 저와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윤서는 침대 곁에 서 있던 엘라에게 조용히 물었다.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윤서는 다시 한번 가문의 상황을 곱씹었다. 몰락, 파산 직전, 정원 폐허, 하인 도망, 마법의 쇠퇴.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응접실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 역시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지만, 낡은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윤서는 소파에 앉아 엘라를 마주 보았다.
“엘라, 제가… 잠시 몸이 좋지 않아 기억이 희미한 부분이 있어요. 가문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요?”
윤서는 빙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엘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우리 벨라트릭스 가문은 한때 제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가문이었지요. 별똥별 정원의 마법은 황실에서도 탐낼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몇 세기 전부터 별의 빛이 흐려지면서 마법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정원의 꽃들이 시들기 시작했어요. 마력이 추출되지 않으니 가문의 수입도 줄어들고… 영지민들도 떠나기 시작했죠. 결국, 작년에 마지막 정원사마저 떠나고, 이제는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도 저뿐이랍니다.”
엘라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윤서는 엘라의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마법의 쇠퇴는 단순히 벨라트릭스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전체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별똥별 정원이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곳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리고 수입원인 마법의 꽃이 시들었으니 재정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문의 빚은… 어느 정도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라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확히는… 저도 모르지만, 이미 영지의 절반 이상이 담보로 잡혀있고, 곧 저택마저 빼앗길 위기라고 들었습니다. 공작가로서의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지요.”
파산 직전이 아니라, 거의 파산이었다. 윤서는 한숨을 쉬었다. 현대에서 빚더미에 시달리던 삶을 벗어나 이세계로 왔더니, 더 거대한 빚더미와 마주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절망은 잠시, 그녀의 눈빛은 점차 단단해졌다.
‘좋아, 어차피 밑바닥이야.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어.’
현대인 윤서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발동했다. 바닥을 쳤으니,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재정 확보와 정원 복구였다. 그리고 그 정원 복구의 실마리는, 어쩌면 저 기억상실의 미남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녀를 이끌었다.
“엘라, 내일부터 정원을 청소할 거예요. 시든 잡초들을 걷어내고, 흙을 좀 뒤집어봐야겠어요.”
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녀님? 하지만 혼자서는… 그리고 병약하신 몸으로 어찌….”
“혼자가 아니에요. 엘라도 도와줄 거고, 저도 괜찮아요. 그리고… 어쩌면 저분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윤서는 방금 전 칼릭스를 눕힌 방을 흘긋 바라보았다. 엘라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공녀의 단호한 모습에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문의 서고는 어디에 있나요? 제가 가문의 기록이나 마법에 관한 책을 좀 찾아봐야겠어요.”
이세계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마법의 원리, 성좌 마법, 마법 정원의 복구 방법 등,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가문을 살리는 것을 넘어, 이세계에서 안정적인 삶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해야 했다.
엘라는 주저하며 서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오래전에 폐쇄된 곳이라… 먼지가 많을 겁니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고 오래된 복도를 지나 도착한 서고는, 엘라의 말대로 발 디딜 틈 없이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다. 곰팡이 냄새는 더욱 심했고, 눅눅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이런 곳에서 뭘 찾을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녀는 이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낡고 헤져 있었지만, 제목은 희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별똥별 정원의 역사와 마력의 흐름.’
윤서의 심장이 다시 한번 두근거렸다. 어쩌면 여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녀의 눈빛을 밝혔다. 그녀는 책을 펼쳤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마법 세계의 비밀이 그녀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는 책을 들고 다시 칼릭스가 잠든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은 여전했다. 윤서는 잠시 책을 내려놓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에서는 더 이상 푸른 마력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이 남자가, 이 정원의 운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을 살려야 해. 그리고 이 정원도.’
그녀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현대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아리엘라, 아니 윤서는 이 몰락한 세계에서 새로운 생존기를 써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방 한구석에 있는 낡은 의자를 끌어와 칼릭스의 침대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책을 펼쳐 들었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정원 깊숙한 곳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땅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저택 전체를 휩쓸었다.
윤서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하며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별똥별 정원 한가운데에서, 푸른빛의 섬광이 하늘로 솟구쳤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섬광이 사라진 자리, 정원의 중앙에서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미미한 진동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고대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불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었다. 윤서는 본능적으로 칼릭스가 누워있는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 아주 짧게 떠졌다 감겼다.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별똥별의… 눈물….”
그것은 마치 꿈결 같은 속삭임이었다. 윤서는 숨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별똥별의 눈물? 그건 이 정원 한가운데에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고대 유물의 이름이었다.
이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방금 그 섬광은 대체 뭐였을까?
윤서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칼릭스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이 정원, 그리고 이 남자. 그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새로운 희망의 파동을 느꼈다. 이 남자의 존재가, 어쩌면 이 몰락한 정원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줄지도 몰랐지만, 동시에 거대한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윤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별빛 아래, 별똥별 정원의 깊은 곳에서 푸른빛의 잔영이 아스라이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하는 신호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