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연은 낡은 나무 책상에 엎드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코끝을 맴도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창밖으로는 해 질 녘 서울의 빌딩 숲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저 많은 건물 중, 온기로 가득 찬 ‘집’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녀의 작은 인테리어 사무실, ‘소담 디자인’은 폐업 직전이었다. 한 달 뒤면 월세조차 내기 힘들다는 통보를 받은 참이었다.
“소연아, 괜찮아?”
문틈으로 유은찬 선배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에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의 다정한 눈빛은 언제나 소연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곤 했다.
“선배. 제가 괜찮을 리가요.”
소연은 애써 웃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은찬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 너의 디자인은 분명 빛을 볼 거야. 내가 아는 건축사무소에 혹시 프로젝트가 있나 알아볼게.”
“고마워요, 선배. 하지만 이제 정말 끝인 것 같아요.”
그녀의 눈빛은 흔들렸다. 유명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나, 거대한 건축물 대신 사람의 온기가 담긴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 하나로 시작한 길이었다.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가정’이라는 정서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그것이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열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었다.
그때, 낡은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낯선 번호였다.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자,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소연 디자이너님 맞으십니까? 저는 아키케이(ARCHI-K) 강태준 대표님의 비서입니다. 대표님께서 디자이너님과의 미팅을 원하십니다.”
아키케이. 강태준. 대한민국 건축계를 뒤흔들고 있는 천재 건축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건축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그의 완벽한 건축물들이 떠올랐다. 그와 자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미팅 요청이라니. 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강태준 대표님이요? 저를요?”
“네. 자세한 내용은 미팅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아키케이 본사로 와주십시오.”
기계적인 말투는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소연은 낡은 정장 차림으로 아키케이 본사 로비에 들어섰다. 웅장하고 차가운 대리석 건물은 마치 거대한 얼음 조각 같았다. 이곳의 모든 것이 그녀의 작은 사무실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최상층 대표실이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소연의 숨을 멎게 했다.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압도적인 경관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창가에 서 있는 한 남자였다. 187cm의 훤칠한 키, 완벽하게 재단된 최고급 슈트. 날카로운 턱선과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 강태준. 그는 사진보다 훨씬 더 냉철하고 완벽한 인상이었다.
“한소연 디자이너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었다. 소연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네, 한소연입니다.”
“앉으십시오.”
그는 소연에게 의자를 권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태준은 테이블 위에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제 펜트하우스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맡아주십시오.”
소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꿈에 그리던 기회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서 뭔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영광입니다, 대표님. 하지만 제가 아직….”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였지만, ‘온기’를 불어넣는 당신의 감각은 인상 깊었습니다.”
그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어딘가 불편했다. 그의 칭찬은 마치 잘 만들어진 기계 부품을 평가하는 듯했다.
“제 펜트하우스는 건축 잡지에 실릴 만큼 완벽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 온기를 채워줄 수 있을 겁니다.”
태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소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얼음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한 가지 더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지만,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차가운 비웃음에 가까웠다.
“제 ‘가짜 약혼녀’가 되어주십시오.”
소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짜 약혼녀? 난데없는 말에 그녀는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건축 프로젝트와 가짜 약혼녀라니.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을 뭘로 보고 있는 걸까.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 회사 이미지 쇄신과 경쟁 입찰을 위한 대외적인 활동입니다. 당신에게는 폐업 위기에 놓인 사무실을 살릴 기회와 함께, 업계 최고의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물론, 파격적인 보수는 약속합니다.”
그는 마치 비즈니스 계약을 설명하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저는 대표님의 디자이너이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닙니다!”
소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태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여전히 소연을 꿰뚫고 있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한소연 디자이너.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겁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당신의 ‘소담 디자인’은 한 달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죠.”
그의 말은 비수처럼 소연의 심장을 찔렀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폐업 직전의 사무실. 빚더미. 그리고 눈앞의 파격적인 제안.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현실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계약 기간은 1년입니다. 그동안 당신은 제 펜트하우스를 ‘집’으로 만들고, 대외적으로는 제 완벽한 약혼녀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물론, 사적인 접촉이나 감정 교류는 일절 없음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는 다시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분명 그녀의 삶을 뒤바꿀 계약서가 들어있을 터였다. 소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태준과, 텅 빈 예약표가 떠오르는 자신의 사무실을 번갈아 생각했다.
과연, 그녀는 이 파격적인 ‘계약 연애’를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연은 서류 봉투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서류의 차가운 질감에 닿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계약은 과연 그녀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게 될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운명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꺾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