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피드의 카페 · 총 2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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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간판이 힘없이 흔들렸다. ‘큐피드 브루’.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군 카페였다. 이제는 낡은 목재 문만큼이나 삐걱거리는 경리 장부를 들여다보며 강아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 망해가는 카페를 살리겠다고 고집을 부린 지 어언 1년. 그녀의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손님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대로라면 할아버지의 유산은 고철덩이가 될 게 뻔했다.

"오늘은 또 몇 잔이나 팔았으려나."

작은 체구에 앞치마를 질끈 동여맨 아리가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섰다. 커피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지만, 그 열정만으로 카페를 살릴 수는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랑? 연애? 그런 허황된 감정은 돈벌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을 보며 깨달은 진리였다. 사랑은 언젠가 변하고,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오직 이 카페, 큐피드 브루에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때였다. 낡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쨍한 햇살을 등지고 선 그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실루엣을 자랑했다. 백옥 같은 피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눈매, 완벽한 비율의 키 큰 외모. 흰 셔츠 소매를 무심하게 걷어 올린 팔목에서는 은은한 커피 향이 풍겨 나오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바리스타 구인 광고 보고 왔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장을 간질였다. 아리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외모만 보면 당장이라도 스카우트해 가고 싶지만,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이 망해가는 카페에서 저런 완벽한 바리스타를 고용할 여유 따윈 없었다.

“저기요, 저희 카페 지금… 상황이 좀 안 좋아서요. 월급도 제대로 못 드릴 수도 있어요.”

아리가 현실을 직시하는 말을 내뱉었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리의 뒤편에 놓인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에 꽂혀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커피를 만들고 싶어서요.”

그렇게 류은찬은 큐피드 브루의 새 바리스타가 되었다. 그의 등장은 카페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첫 출근 날, 카페는 평소보다 활기가 넘쳤다. 은찬이 내린 커피를 마신 손님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 팀장님! 저… 저 오늘 팀장님께 고백할 거예요!”

옆 테이블의 여직원이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건너편 남자에게 소리쳤다. 남자는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묘한 설렘이 깃든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그래요? 나도 사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평소 투닥거리던 커플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손을 잡았다. 큐피드 브루에서 10년간 일하며 온갖 사연을 보아온 아리였지만, 이렇게 한날한시에 여러 커플이 동시에 ‘사랑에 빠지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뭐야, 저 사람들? 오늘 무슨 날인가?”

아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은찬은 그런 아리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마치 잘 볶아진 커피콩처럼 고소하고 달콤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은찬의 커피를 마신 단골손님 박 과장은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옆집 고양이에게 “야옹아, 사랑해!”를 외치며 쓰다듬었고, 매일 아침 신문만 보던 김 할아버지는 옆자리 할머니에게 뜬금없이 시집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저기요, 류은찬 씨. 혹시… 커피에 뭘 넣어요?”

참다못한 아리가 은찬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은찬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이죠. 사랑과 정성을 듬뿍 넣습니다.”

싱글거리는 그의 얼굴에 아리는 할 말을 잃었다. 사랑과 정성이라니.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말이 전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커피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아리의 코끝을 자극하며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아리는 은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어딘가 수상한 커피. 그리고 그 커피를 마신 사람들이 보이는 과도한 설렘 반응. 혹시 그가 사기꾼은 아닐까? 아니면… 사이비 종교 교주?

하지만 은찬은 아리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출근해 카페 곳곳을 청소하고, 묵묵히 커피를 내렸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커피는 단순히 맛있는 것을 넘어,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손님들의 발길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카페 분위기는 전에 없이 생기로 가득 찼다.

아리는 은찬을 감시하기 위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무심하게 내민 따뜻한 라떼 한 잔에, 그녀의 닫혔던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가 손님들과 눈을 맞추며 웃을 때마다, 그녀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류은찬은 분명 수상했다.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지만, 때로는 장난기 어린 빛을 담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섬세하고 능숙했지만, 가끔은 아리를 향해 의도치 않은 다정함을 드러냈다.

어느 날, 아리는 은찬이 남기고 간 메모를 발견했다. ‘카페 인수 문의’라는 글씨와 함께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비너스 커피’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류은찬 씨도 저들과 한패인 건가?”

아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류은찬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는 왜 망해가는 이 카페에 나타난 걸까? 그의 커피는 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걸까?

그날 저녁, 큐피드 브루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이번에 들어선 남자는 은찬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정갈하게 넘긴 머리, 명품 슈트, 지적이고 차가운 분위기. 그는 다름 아닌 ‘비너스 커피’의 본부장, 서하준이었다.

“강아리 씨 되시죠? 저는 서하준입니다. 이 카페, 큐피드 브루를 인수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서하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어떤 냉철한 계산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제는 류은찬의 수상한 능력과 서하준의 노골적인 인수 제안까지, 그녀의 카페는 사면초가에 놓인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이 카페는… 제 할아버지의 유산입니다. 절대 팔 수 없어요.”

아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서하준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그때였다. 은찬이 주방에서 나오며 그들의 대화를 들은 듯했다. 그의 시선이 서하준에게로 향했고, 미묘한 긴장감이 카페를 감쌌다.

“강아리 씨, 다시 생각해보시죠. 이 카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특별한 곳이니까요.”

서하준의 말은 단순한 인수 제안이 아니었다. 마치 큐피드 브루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아리는 혼란스러웠다. 이 낡은 카페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은찬이 아리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아리 씨.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의 말은 왠지 모르게 아리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아리를 향해 있었고, 그 속에서 아리는 알 수 없는 확신과 함께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류은찬. 그의 커피,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가 아리의 평범한 일상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과연 이 카페를,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