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이서연은 ‘아키텍트 K’ 빌딩의 최상층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응시했다. 해 질 녘의 도시는 늘 그녀에게 경외감과 함께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오늘, 그 영감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벅찬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탁, 탁. 그녀의 손에 들린 디자인 스케치북이 바람에 살랑였다. 표지에는 ‘새벽빛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낡은 도심의 재개발, 새로운 랜드마크의 탄생,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들 지역의 역사와 문화. 건축가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아니, 평생에 단 한 번 주어질까 말까 한 기회였다. 서연은 이 프로젝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오직 실력 하나로 이 거대한 도시에서 버텨온 지난 세월의 보상과도 같았다.
“이서연 씨, 아직 퇴근 안 했어?”
익숙한 목소리에 서연은 뒤를 돌아봤다. 한지훈 선배였다. 늘 유쾌하고 다정한 그는 서연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고민 상담사였다. 그의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캐주얼 오피스룩은 언제나처럼 깔끔했다.
“선배. 아직요. ‘새벽빛 프로젝트’ 최종 PT 자료 점검 중이었어요.”
서연은 손에 든 스케치북을 들어 보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집중할 때마다 버릇처럼 나오는 표정이었다.
“밤샐 기세네. 너무 무리하지 마. 몸 상해.”
지훈은 서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서연을 향한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게 어떤 프로젝트인데요. 제 꿈이 걸린 일이에요. 게다가… 이번에 총괄 책임자 자리를 노리고 있잖아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뜨거운 열정이 묻어났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한지훈은 그런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알지. 그래서 더 걱정이야.”
“왜요?”
“클라이언트 측에서… 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어.”
지훈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서연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까다로운 조건이라뇨? 저희 설계안에 문제가 있나요?”
“아니, 설계안은 완벽해.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문제랄까.”
지훈은 말을 고르는 듯 망설였다.
“그게 무슨…?”
서연은 불안한 시선으로 지훈을 재촉했다.
“비공식적인 조건인데… ‘새벽빛 프로젝트’가 워낙 대규모이고, 장기 프로젝트다 보니… 클라이언트 측에서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책임감 있는 리더’를 원하고 있대.”
“그래서요? 제가 책임감이 없다는 건가요?” 서연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찡그려졌다.
“그게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의 기준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사람’이거나, 최소한 ‘오래 지속된 연애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란 거야.”
서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안정적인 가정? 오래 지속된 연애 관계? 지금 시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그녀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선배, 지금 농담하는 거죠? 제가 지금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봤다고 이런 꿈같은 기회를 놓쳐야 한다는 말이에요?”
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농담이면 좋겠지만… 클라이언트 회장이 워낙 보수적인 분이라서. 개인사까지 들여다보려고 하는 모양이야. 특히 총괄 책임자는 더더욱.”
지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연의 눈치를 살폈다.
서연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오직 일에만 매달려왔다. 남자친구는커녕, 제대로 된 썸 한 번 타본 적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그녀를 비혼주의자로 오해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안정적인 연인’이 필요하다니. 그것도 ‘새벽빛 프로젝트’를 위해서?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도시 풍경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꿈에 그리던 프로젝트가, 그녀의 지난 모든 노력이, 고작 ‘연애 경험’ 따위 때문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당장 다음 주까지 클라이언트 측에 총괄 책임자 인선 관련 개인 프로필을 제출해야 해. 거기에… ‘연인 유무’ 항목이 추가될 예정이고.”
지훈의 말은 서연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다음 주? 일주일 안에?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주일 안에 ‘안정적인 연인’을 만들어내라고? 그것도 거짓으로? 그녀는 연애를 해본 적도 없는 자신에게, 그런 연기를 해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프로젝트는 그녀의 전부였다. 그녀의 건축 철학을 세상에 선보일 유일한 기회였다.
서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빌어먹을 ‘안정적인 연인’을 만들어내야 했다.
누구를? 과연 누가 그녀의 이 황당한 제안을 받아줄까?
아니, 그보다… 연애조차 해본 적 없는 이서연이, 가짜 연인 행세를 감쪽같이 해낼 수 있을까?
그녀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새벽빛 프로젝트’의 웅장한 비전뿐이었다. 그 비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황당한 계약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연은 깊은 숨을 내쉬며 결심했다. 지금부터,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새벽빛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그녀는 기꺼이 ‘가짜 연인’을 찾아 나설 터였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금 타올랐다. 이서연,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고, 얼마나 위험한 계약으로 이어질지라도.
그녀는 과연 이 일주일 안에, 이 도시 서울에서, 자신의 황당한 ‘가짜 연인’이 되어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계약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것이라고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