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빌딩 옥상 난간을 붙잡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안정적인 연인? 고작 그 이유로 꿈에 그리던 프로젝트를 놓칠 위기에 처하다니, 세상에 이런 불합리한 일이 또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가짜 연인’이라는 세 글자로 가득 찼다. 일주일. 단 일주일 안에 그럴듯한 ‘누군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말도 안 돼….”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서연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했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기, 회사 선후배… 죄다 일로 얽힌 관계거나, 아니면 정말 친한 친구들뿐이었다. 그 흔한 썸남 하나 없는 그녀의 현실이 이토록 잔인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이… 이 상황에서 누구한테 부탁을 해?’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뜸 ‘나랑 한 주 동안만 연인인 척 해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고 해도, 그녀가 그 앞에서 연인 행세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을까? 연애 경험 전무한 이서연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강단 있는 편이었지만, 연애 감정만큼은 예외였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앞설 것이 뻔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도시의 야경으로 향했다.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마치 그녀의 복잡한 심경처럼 어지럽게 반짝였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그녀를 구원해 줄 사람이 있을까?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안 갔어? 지훈 선배는 먼저 퇴근하던데.”
서연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재무팀 김 대리였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휴대폰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아, 김 대리님. 저는… 잠시 바람 좀 쐴 겸….”
“새벽빛 프로젝트 때문에 고민이 많나 봐. 얼굴이 아주 헬쓱해졌네.”
“조금… 그래요.”
김 대리는 서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힘내. 이서연 건축가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다 응원하고 있어.”
그 말에 서연은 애써 미소 지었다. ‘응원… 고맙지만, 지금 필요한 건 응원이 아니라 가짜 남자친구인데.’ 속으로만 삼킨 말이었다. 김 대리는 몇 마디 더 덕담을 건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서연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와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새벽빛 프로젝트’ 관련 자료들이 펼쳐져 있었다. 낡은 도심 지역의 역사적 흔적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킬 랜드마크.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서연의 건축 철학, 즉 ‘사람과 공간이 소통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그녀의 신념이 고스란히 담길 기회였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 몇 달간 밤낮없이 매달렸다.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몰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수적인 클라이언트 회장의 고리타분한 ‘개인사’ 조건 때문에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 포기할 수는 없어. 절대.’
서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찾아야 했다. 친구, 선배, 심지어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검색창에 ‘가짜 애인 구함’ 따위의 황당한 키워드를 입력할 뻔했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멈췄다. 이건 너무 비참했다.
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에는 ‘가장 무난하고,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이름은 다름 아닌 한지훈 선배였다.
‘선배라면…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지훈은 늘 그녀의 편이었고, 그녀의 꿈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황당한 부탁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가던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까 봐 망설여졌다. 그는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직장 선배이자 멘토였다.
“하아….”
서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녀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밤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퇴근하는 사람들, 술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 연인과 손잡고 걷는 사람들. 그 모든 풍경이 그녀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 연인들의 모습은 그녀의 상황과 대비되어 더욱 쓰라렸다.
‘나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손잡고 걸을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 없었다. 서연은 터덜터덜 걷다가, 한적한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와인바 앞에 멈춰 섰다. 평소에는 잘 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혼자 술 한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기, 로제 와인 한 잔 주세요.”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고, 서연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와인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달콤쌉쌀한 맛이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년 전 소개팅에서 만났던 남자의 연락처를 찾아봤다. ‘김민준’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딱 한 번 만나고 서로 바빠서 연락이 끊겼던 남자였다. 그는 꽤 친절하고 유머러스했지만, 서연은 그때도 일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설마… 김민준 씨가 이런 황당한 부탁을 들어줄 리 없잖아.’
그녀는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걸지 못했다. 대체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연은 와인잔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새벽빛 프로젝트’의 비전과 ‘가짜 연인’이라는 난감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때,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 알림이 울렸다. 한지훈 선배였다.
[선배] : 서연아, 괜찮아? 너무 자책하지 마.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야.
[선배] : 혹시… 누구든 생각나는 사람 없어? 어정쩡한 사람 말고, 좀 믿을 만한 사람으로.
[선배]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을까 해서…
지훈의 메시지에 서연은 잠시 흔들렸다.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아니, 안 돼. 이건 그녀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서연] : 선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서연] : 혹시라도 좋은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애써 밝은 척 답장을 보냈지만, 서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는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내가 직접 찾아야 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와인바를 나섰다. 밤공기가 아까보다 훨씬 차갑게 느껴졌다. 서연은 밤늦도록 불이 켜진 ‘아키텍트 K’ 빌딩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그녀의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그녀는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그녀의 눈은 다크서클로 살짝 그늘져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비장했다. 그녀는 출근하자마자 인터넷 카페 게시판, 동창회 커뮤니티, 심지어는 ‘연극 배우 모집’ 공고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가짜 연인’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이서연 씨, 아침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지훈 선배가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아, 선배. 그냥… 건축 관련 자료 좀 찾아보고 있었어요.”
서연은 황급히 화면을 닫았다. 지훈은 그녀의 어색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오늘 클라이언트 쪽에서 ‘새벽빛 프로젝트’ 관련해서 다시 한번 미팅하자고 연락 왔어. 인선 관련해서도 다시 한번 논의하고 싶다고.”
“네? 벌써요?”
서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다음 주’라고 생각했던 마감 시한이 훨씬 더 촉박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응. 아무래도 워낙 중요한 프로젝트라… 빨리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지훈은 서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설계안은 우리가 최고니까.”
지훈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서연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짜 연인’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점심시간도 거른 채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노트북을 펴고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단기 계약 연인’, ‘가짜 애인 대행’… 이제는 정말로 비현실적인 키워드까지 입력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걸로 해결해야 하는 건가?’
회의감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눈앞에는 오직 ‘새벽빛 프로젝트’의 웅장한 비전만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이었고,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에서는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났다. 서연은 무심코 그들을 쳐다봤다.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이 낯익었다.
‘어… 저 사람…?’
그는 훤칠한 키에 날카로우면서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은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카페 안쪽의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이름이 있었다.
‘강우진.’
그녀의 라이벌. 독립적인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며, 최근 몇 년간 ‘아키텍트 K’와 여러 프로젝트에서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 천재 건축가. 그의 이름은 건축 업계에서 늘 화제의 중심이었다. 특히 ‘새벽빛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도 강우진의 사무실이 유력한 경쟁사로 언급되었던 것을 기억했다.
‘강우진이 왜 여기에…?’
그녀는 그의 뒤를 쫓듯 시선을 고정했다. 강우진은 일행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의 손에는 익숙한 로고가 박힌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설마… 새벽빛 프로젝트?’
서연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강우진이 ‘새벽빛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이 카페에 온 것이라면, 그녀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강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가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는 것을.
그때, 강우진의 시선이 문득 서연이 앉아있는 쪽을 향했다. 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눈이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이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저런 사람이 내 가짜 연인이 되어준다면….’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강우진은 그녀의 라이벌이었다. 그녀의 꿈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처럼 차갑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가짜 연애 같은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녀의 마음에 알 수 없는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안정적인 연인’이라는 조건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비록 그녀의 적이지만.
서연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강우진은 이미 일행과 함께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서류철에 적힌 ‘새벽빛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그녀의 시야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그녀의 꿈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협의 중심에, 그녀의 라이벌 강우진이 있었다.
서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쟁취해야 했다.
그녀의 시선은 강우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절박함 속에서, 그녀의 가짜 연인 찾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녀가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가장 위험한 계약으로 이어질 참이었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강우진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새벽빛 프로젝트’는 그녀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설령 그녀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과의 ‘가짜 연애 계약’일지라도.
그녀의 손이 그의 테이블로 뻗어가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서연 씨?”
서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우진이었다.
그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서연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예상치 못한 만남에서 오는 당혹감과, 이제 막 시작될 위험한 관계에 대한 미묘한 예감이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고,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은, 이제 막 시작될 폭풍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이서연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강우진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될지, 아직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새벽빛 계약’은, 이제 막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막은, 이 도시의 스카이라인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강우진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그리고 강우진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위험한 만남이, 그녀의 꿈과 현실을 어떻게 뒤흔들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