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는 오늘도 야근이었다. 오후 아홉 시, 퇴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의 어깨엔 낡은 서류 가방이 축 늘어져 있었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팍팍한 월급으로 버티는 중소기업 직장인의 삶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버스 창밖으로 번화가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 빛 속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꿈을 꾸겠지. 자신은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톱니바퀴일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밀린 웹소설이나 몇 편 보다가 잠들겠지. 내일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터였다. 지루하고, 고단하고,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불을 기다렸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유난히 밝았다. 순간, 쾅!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온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찔한 통증이 전신을 휩쓸었다. 세상은 빠르게 회전하다 이내 암전으로 변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현수는 마지막으로 희미한 통증과 함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일어나세요. 이현수 씨.”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현수는 간신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회색빛 콘크리트와 낡은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모습. 여기가 어디지? 그는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전신을 덮친 무력감에 다시 주저앉았다.
“여기는… 병원인가요?”
현수의 입에서 겨우 말이 새어 나왔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몸은 솜처럼 가벼웠다. 고개를 돌리자, 짙은 남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피로가 역력한 얼굴. 마치 몇 날 며칠 밤샘 근무를 한 사람 같았다.
“아니요. 병원은 아닙니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한 번 흘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현수 씨는 현재 사후세계 관리국 본부에 계십니다.”
사후세계 관리국? 현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병실이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목재 책상과 서류 더미, 오래된 철제 캐비닛이 빼곡히 들어찬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낡은 지구본과 함께, 복잡한 회로가 드러난 채 깜빡이는 알 수 없는 기계들이 놓여 있었다. 흡사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공간 같았다.
“사후세계 관리국이라니… 제가 죽었단 말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불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불완전한 죽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현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트럭, 사고, 그리고 이 낯선 곳.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저는 이 관리국의 중간 관리자, 이 대리입니다.” 남자는 명함을 건넸다. ‘사후세계 관리국 – 영혼 인솔팀 이 대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현수 씨는 원래대로라면 저승으로 향했어야 할 영혼입니다. 하지만 저희 관리국의 시스템 오류로 인해, 당신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이곳으로 강제 소환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 제 죽음이 실수였다고요?” 현수는 황당함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저를 다시 살려내세요! 원래대로 돌려놓으란 말입니다!”
이 대리는 현수의 반응에 미동도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합니다. 한번 끊어진 생명의 끈은 다시 잇기 어렵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시스템이 붕괴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붕괴 직전? 현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대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깊은 피로와 사무실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저희 관리국은 수천 년간 인간의 죽음과 영혼의 흐름을 관리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원인 모를 영혼들의 폭주와 미해결 사건들이 속출하며 죽음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불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저희는 이들을 처리할 인력이 절실합니다.”
이 대리는 책상 위에서 스마트폰처럼 생긴 검은 기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현수 씨. 당신은 시스템 오류로 인해 이곳으로 소환되면서,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마지막 소원을 듣고, 영혼의 잔재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우리는 이것을 ‘망자 안내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기를 통해 당신은 일반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현수의 손에 망자 안내기를 쥐여줬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생경했다.
“이현수 씨는 이제부터 저희 관리국의 임시직원입니다. 당신의 불완전한 죽음은 어쩌면 이 혼란을 바로잡을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미해결 영혼 사건들을 처리하고, 붕괴 직전의 사후세계를 바로잡는 것.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현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임시직원이 되었다니. 이 대리의 말은 너무나 황당했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이 임무는 어딘가 모르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제가… 이 임무를 수행하면 어떻게 되죠?” 현수가 겨우 물었다.
이 대리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시스템이 정상화되고, 당신의 존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면… 그때는 당신이 원하는 삶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 그것은 현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그는 이 대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며칠 후, 현수는 첫 번째 임무를 부여받았다. 망자 안내기를 들고 도시의 한 골목길로 향했다. 안내기는 희미하게 진동하며, 길바닥에 흐릿한 푸른빛의 잔상을 비추고 있었다. 얼마 전, 이곳에서 원인 모를 추락 사고로 사망한 여고생의 영혼이 아직 떠돌고 있다는 정보였다.
“사망자의 잔류 사념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세요.” 이 대리의 목소리가 망자 안내기에서 흘러나왔다.
현수는 잔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상점들이 늘어선 골목길은 낮인데도 어둡고 스산했다. 망자 안내기의 푸른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현수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골목길 한가운데, 희미하게 빛나는 소녀의 형상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 그 옆에는 한 여성이 쪼그리고 앉아 소녀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염색한 밝은 갈색 머리칼에 생기 넘치는 눈을 가진 젊은 여성. 겉보기엔 평범한 대학생 같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 여성은, 자신처럼 영혼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소녀의 영혼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불안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 현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곳은 위험해요. 어서 편안히 가야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게요.”
그때였다. 소녀의 영혼이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주변의 어둠을 흡수하듯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분노와 절망이 폭주하는 것처럼.
“아니, 안 돼…!”
여성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기운은 순식간에 골목길 전체를 휘감았다. 현수는 망자 안내기를 든 손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 대리가 말했던 ‘영혼의 폭주’가 바로 이것인가.
폭주하는 영혼의 잔재 속에서, 현수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미지의 여성, 한유진과 마주 서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