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빛대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봄 햇살만큼이나 눈부신 새내기의 꿈이 그녀의 발걸음마다 설렘으로 반짝였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상경한 그녀에게, 캠퍼스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로맨스 소설 속 배경과 같았다. 고풍스러운 시계탑, 푸른 잔디밭 위를 거니는 선남선녀들, 왁자지껄한 동아리 홍보 부스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특히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한 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연히 마주칠 운명적인 첫사랑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학생회관을 나서는 길, 한별의 시선은 저절로 멈췄다. 햇살이 쏟아지는 잔디밭 벤치에 앉아 두꺼운 전공 서적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 훤칠한 키, 지적인 안경, 그리고 무심한 듯 보이는 옆모습마저 완벽하게 그녀의 ‘로맨스 소설 속 첫사랑’ 이미지와 겹쳐졌다. 그의 이름은 이도현. 컴퓨터공학과 3학년 선배이자, 한빛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괴짜 동아리, ‘빅데이터 로맨스 연구회’의 회장이었다. 한별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한참 바라봤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바로 저 사람이야. 내 캠퍼스 로맨스의 시작은 저 선배일 거야.
꿈같은 상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도현 선배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정확히 한별이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고드는 듯한 그의 깊은 눈빛에 한별은 순간 얼어붙었다. 설마,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맙소사, 이건 너무 빠르잖아!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그가 말을 걸어올 참이었다. 어떤 로맨틱한 대사가 이어질까? 혹시 길을 묻는 척하며 번호를 물어보는 건 아닐까? 한별의 머릿속은 이미 수십 가지의 로맨스 시나리오로 가득 찼다.
"저기, 혹시 신입생이신가요?"
그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낮고 차분했다. 한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아요."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적임자겠군요."
적임자? 한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도현 선배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책 대신, 복잡한 수식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별 씨, 당신을 저의 '첫사랑 알고리즘' 연구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모든 연애 감정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할 예정입니다."
그의 말은 한별의 로맨스 소설 속 상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첫눈에 반한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랑해’도, ‘같이 밥 먹을까요?’도 아닌, ‘데이터 수집’이라니. 한별은 눈을 깜빡이며 손에 들린 종이와 이도현 선배를 번갈아 봤다. 맑은 하늘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꿈꾸던 캠퍼스 로맨스는 시작부터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이도현 선배는 한별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학식당에서, 심지어 동아리 홍보 부스 앞에서까지. 그는 늘 손에 작은 수첩을 들고 한별의 행동을 기록했다.
"한별 씨, 방금 저에게 미소를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호감도 상승의 지표로 해석해도 될까요?"
"오늘 점심 메뉴로 돈가스를 선택한 이유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도파민 분비 촉진 욕구로 분석됩니다."
"SNS에 올린 '벚꽃이 예쁘다'는 게시물은 특정 인물에게 어필하기 위한 잠재적 메시지인가요?"
이도현의 질문은 언제나 논리적이고 정확했으며, 한별의 모든 것을 데이터로 환원하려 들었다. 한별은 처음에는 황당함에 실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현 선배는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데이터를 기록했다. 마치 그녀의 감정이란 그저 흥미로운 통계 자료일 뿐이라는 듯이.
"선배! 제 감정은 숫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아니요, 한별 씨. 모든 감정은 결국 뇌의 화학 반응이며,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면 예측 가능한 패턴을 보입니다."
그의 확신에 찬 눈빛은 한별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그런 무미건조한 태도 속에서 가끔 예상치 못한 다정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무거운 전공 서적을 들고 허둥대는 한별을 보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책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여성 신입생의 평균 근력 데이터와 한별 씨의 신체 지수를 고려했을 때, 해당 무게의 서적 운반은 비효율적이며 부상 위험을 높입니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엉뚱했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한 배려였다.
"첫 만남은 데이터 기반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어느 날 이도현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한별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데이터 기반 데이트’는 한별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는 사전에 수집한 한별의 취향 데이터(좋아하는 음식, 영화 장르, 선호하는 장소 등)를 분석하여 최적의 데이트 코스를 제안했다.
"오늘 코스는 한별 씨의 '행복 호르몬 분비량 최대화'를 목표로 설정되었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당신이 선호하는 북유럽풍 카페입니다. 평균 카페인 섭취량과 당분 선호도를 고려하여 아메리카노와 마카롱을 주문하는 것이 최적의 만족도를 보장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카페는 아늑했고 커피와 마카롱은 맛있었다. 한별은 어딘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의 철저한 준비는 왠지 모르게 설렘을 주었다. 마치 자신만을 위해 완벽하게 설계된 맞춤형 이벤트 같았다.
카페를 나와 캠퍼스 호수 주변을 걷던 중이었다. 이도현 선배는 또다시 수첩을 꺼내들었다.
"현재 한별 씨의 심박수는 분당 75회, 피부 전도도는 2.3μS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한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감정을 숫자로 말하는 남자라니. 정말이지 독특했다. 그때였다.
"어? 한별아!"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한별의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시원한 눈매와 보조개가 매력적인 남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늘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강민준 선배. 경영학과 3학년, 사진 동아리 회장으로 캠퍼스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인이었다.
"여기서 만나네! 아침에 동아리방 앞에서 봤을 때부터 뭔가 예감이 좋더라니. 혹시 이도현 선배랑 데이트 중이야?"
강민준 선배는 이도현 선배와 한별을 번갈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도현 선배는 강민준 선배의 등장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강민준 선배! 안녕하세요. 데이트는… 아니고, 그냥 같이 걷고 있었어요."
한별은 얼버무렸다. 이도현 선배와의 ‘데이터 기반 데이트’를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상황이었다.
"어허, 이도현 선배가 웬일로 이런 감성적인 곳에 다 오고. 혹시 한별이한테 무슨 수상한 실험이라도 하는 건 아니지?"
강민준 선배는 능청스럽게 이도현 선배를 놀렸다. 이도현 선배는 아무 말 없이 강민준 선배를 빤히 바라봤다. 그들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별아, 나 다음 주에 사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하는데, 혹시 시간 되면 올래? 너 예쁘게 사진 찍어줄게."
강민준 선배는 이도현 선배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별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그의 웃음은 햇살처럼 따뜻했고, 그의 제안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한별은 순간 이도현 선배의 차가운 데이터와 강민준 선배의 따뜻한 감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내 마음은 대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 걸까. 이성적인 분석과 예측 불가능한 끌림 사이에서, 한별의 첫사랑 알고리즘은 이제 막 복잡한 계산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