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묵직한 피로감에 눈을 뜨기 싫었지만, 낯선 감각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분명 어제는 지독한 야근 끝에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는데. 이 부드러운 흙냄새는 뭐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은 또 어떻고.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김미소는 숨을 헙 들이켰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아니, 피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키를 훌쩍 넘는 잡초와 이끼 낀 돌담, 그리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엉킨 덩굴 식물들이 전부였다. 마치 오랜 세월 방치된 유적지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매끈한 사무실 책상 대신 축축하고 거친 흙이 만져졌다. 손을 내려다보니, 뽀얗던 손은 온데간데없고 흙먼지가 잔뜩 묻은 투박한 손이 보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낡고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작업복이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꿈인가? 악몽?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풀내음과 피부에 와닿는 햇살의 따스함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과도한 업무, 상사의 잔소리, 끝없이 밀려드는 보고서…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과 함께 찾아온 의식의 단절. 설마… 죽은 건가? 그리고 다시 살아난 건가?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가 누워있던 곳은 돌로 만들어진 벤치 같았는데, 이제는 잡초와 덩굴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건축물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아치형 문이었으나, 역시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황폐함 속에서도 왠지 모를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소망 정원 관리인, 한미소 님. 이 정원을 다시 생명으로 가득 채워주십시오.]
[당신에게는 이 정원을 돌보고, 이곳을 찾는 이들의 잠재력을 꽃피울 힘이 있습니다.]
한미소? 김미소였는데? 게다가 소망 정원 관리인이라니. 이 엉망진창인 곳을? 머릿속에 쑤셔 박힌 듯한 정보들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원 관리인이라니. 그녀는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화분 하나 제대로 키워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말도 안 돼….”
탄식처럼 흘러나온 말에 답하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질긴 잡초들이 발목을 휘감았다. 한때는 아름다운 길이었을 곳도 이제는 돌과 흙이 뒤섞여 걷기조차 힘들었다. 정원 한가운데로 보이는 곳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크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그 나무 아래에는 고풍스러운 조각이 새겨진 우물 같은 것이 있었다.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이 저절로 떠올랐다. 머릿속의 정보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곳의 물은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금은 이끼와 흙으로 뒤덮여 그 신비로운 기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미소는 본능적으로 그곳이 이 정원의 심장 같은 곳임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길, 알록달록한 꽃밭,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냈을 분수대. 이 모든 것이 지금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절망적인 현실뿐이었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도 미소는 무언가를 보았다. 거대한 덩굴에 뒤덮여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대리석 조각상, 흙먼지 속에 파묻혀 있지만 은은한 광채를 잃지 않은 듯한 보랏빛 꽃잎. 이곳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잠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걸… 나보고 다 살리라고?”
미소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늘 남의 기대에 맞춰 살았다. 상사의 지시, 회사의 목표, 부모님의 바람. 모두를 만족시키려 애쓰다 결국 몸이 망가졌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삶, 완전히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이 낯선 세계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 황폐한 정원을 홀로 되살려야 한다.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더 이상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킬 필요가 없었다. 오직 자신과 이 정원만을 위해 노력하면 되는 삶.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흙냄새와 풀잎 냄새가 섞인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전생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상쾌함이었다. 그래, 어차피 죽었다 살아난 목숨. 뭐가 더 나빠지겠어?
미소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잡초 더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맨손으로 흙을 헤치고 뿌리 깊이 박힌 잡초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들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손톱 밑에 흙이 박히고, 손바닥은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뽑아낼 때마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숨어있던 작은 꽃봉오리를 발견했다.
“어? 너는….”
흙먼지를 털어내자 작고 여린 줄기에 매달린 파스텔톤의 꽃봉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세상에 나온 것을 두려워하는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미소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꽃봉오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어쩐지 이 작은 꽃봉오리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폐한 세상 속에서 홀로 피어나려 애쓰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정원 전체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끝없이 펼쳐진 잡초밭, 부서진 조각상, 메마른 연못. 하지만 이제는 절망 대신 묘한 설렘이 피어났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이곳을 다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쩌면 자신도 이 정원과 함께 다시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저 멀리 정원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엉망이 된 자신과는 달리, 말끔한 옷차림의 남자가 정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발견하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차가운 시선으로 정원과 그녀를 번갈아 응시했다.
“이런 흉물스러운 곳에 사람이 있었군. 당신이 소망 정원 관리인이라는 사람인가?”
남자의 목소리에는 경멸과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미소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꼈다. 남자는 한 손에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의 깔끔한 정장과 오만한 표정은 전생의 상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 땅은 곧 상업 길드 소유가 될 겁니다. 쓸모없는 폐허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이만 포기하고 떠나는 게 현명할 겁니다.”
그의 말에 미소의 눈이 커졌다. 상업 길드? 이 정원이 폐허라고? 떠나라고? 그녀가 막 이 정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는데, 누군가 이곳을 빼앗으려 한다니.
“싫어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남자는 미소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썹을 치켜떴다.
“뭐라고요? 당신,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곳은 소망 정원이에요! 폐허가 아니라,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요!”
미소는 흙 묻은 손으로 정원을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까지의 막막함 대신,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두 번째 삶의 무대였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잠들어 있다고? 당신 눈엔 이게 아름다운 정원으로 보이나 보군.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이 정원은 곧 사라질 겁니다. 당신이 뭘 하든 간에.”
남자는 더 이상 미소와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정원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은 차갑고 단호했다. 미소는 그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정원으로 돌렸다.
사라질 거라고? 폐허라고?
그녀는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까 뽑아낸 잡초들 사이에서 간신히 숨 쉬고 있던 작은 꽃봉오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아니야. 넌 사라지지 않아. 내가 꼭 지켜줄게. 그리고 널 다시 피어나게 할 거야.”
미소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빛났다. 그녀의 손끝에서, 여린 꽃봉오리에 닿은 순간, 아주 미세한 푸른빛이 깜빡이는 듯했다.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이 정원이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일까?
미소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막 시작된 그녀의 두 번째 삶, 그리고 소망 정원 재건의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서, 이 황폐한 땅 위에서 펼쳐질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