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상업 길드원들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한미소의 등골에는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위압적인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더욱 격렬하게 울렸다. 쿵, 쿵, 쿵. 마치 망치로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불규칙한 박동이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따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림자는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들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비웃음과 함께 귀찮다는 듯한 짜증이 엿보였다.
전생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반박 한 번 못 하고 밤늦도록 야근했던 날들, 고객의 비합리적인 요구에도 억지로 미소 지어야 했던 순간들. 그때마다 그녀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듯한 무력감을 느꼈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였던 수많은 울분들이 지금 이 순간, 위협적인 길드원들 앞에서 그녀를 다시 짓누르는 듯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황폐한 정원 한구석에서 피어난 연보랏빛 ‘소망의 꽃’을 향했다. 그 작은 꽃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속삭였고, 그녀의 손으로 일궈낸 작은 기적이었다. 메마른 땅에서 기어코 피어난 그 여린 생명은 그녀 자신의 존재 증명과도 같았다. 이 꽃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새로운 시작 또한 의미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삽은 흙이 묻어 무겁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단순한 농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정원을, 그리고 그녀 자신을 지키는 방패이자 무기였다.
“흐음, 여기까지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었군. 그 관리인이라는 여자 말이야. 우리가 오기 전에 알아서 사라질 줄 알았는데.”
길드원 중 한 명이 미소가 애써 뽑아낸 잡초 더미를 발로 툭 차며 비웃었다. 흙과 함께 엉켜있던 잡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조롱 섞인 말은 미소의 마음속 깊이 박혀있던 무력감을 다시 일깨우는 듯했다. 전생의 그녀라면 아마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고개 숙일 수 없었다. 이 정원은 그녀의 것이었고, 그녀의 소망이 깃든 곳이었다.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녀의 두 번째 삶은 전생과 다를 바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미소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들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세 명의 길드원들을 차례로 훑었다. 그들의 험악한 표정, 근육질의 몸, 그리고 손에 들린 거친 도구들이 그녀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는… 소망 정원이에요! 당신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렸지만, 그 속에는 전생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마치 작은 들짐승이 맹수 앞에서 마지막 발버둥을 치듯, 그녀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 박동은 두려움뿐만이 아니었다. 분노와 저항의 불씨가 작게 타오르고 있었다.
“건방진 것. 감히 길드의 일에 끼어들려는 건가?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길드원 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험악한 표정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손에 들린 괭이가 햇빛에 번뜩였다. 날카로운 괭이날이 그녀의 눈을 찔러오는 듯했다. 미소는 삽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잡이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미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홀로 서 있었다. 이 정원의 유일한 관리인으로서, 이곳을 지켜낼 책임이 그녀에게 있었다. 정원의 흙냄새, 풀 내음, 그리고 희미한 꽃향기가 그녀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일부였다.
카이렌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지만, 미소의 격렬한 저항에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미묘한 동요가 일었다. 그의 시선은 미소의 떨리는 어깨와 삽을 쥔 굳건한 손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는 미소의 ‘순수한 소망’이 과연 이 거대한 위협 앞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지, 마치 흥미로운 식물을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를 만지고 있었지만,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듯 멈춰 있었다. 그의 존재는 미소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방패와도 같았다.
미소는 길드원들의 노골적인 적대감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의 폐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찼지만, 이내 뜨거운 분노와 결의로 채워졌다. 이 정원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새로운 삶의 의미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는 삽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잡이에 박힌 나뭇결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심장 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려움을 태워버리고, 오직 정원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만을 남겼다.
길드원들의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리고, 그들의 삽과 괭이가 햇빛에 번뜩였다. 미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는 듯했다. 그녀는 싸워야 했다. 비록 맨몸이나 다름없지만, 그녀는 이 정원의 관리인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지켜내야만 했다. 그녀의 전생의 삶은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싸울 차례였다. 그녀는 길드원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쳤다. 그녀의 표정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강렬한 결의만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 박동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투지의 박동이었다.
그녀는 삽을 앞으로 내밀었다. 삽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한 발자국도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정원 전체를 울리는 듯한 강렬한 외침이었다. 길드원들은 미소의 예상치 못한 격렬한 저항에 잠시 멈칫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짜증이 스쳐 지나갔지만, 작은 여자가 삽 하나 들고 자신들을 막아선다는 사실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차 미소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섰고, 손에 들린 도구들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삽과 괭이의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심장을 겨냥하는 듯 번뜩였다. 미소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마치 정원의 뿌리처럼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하지만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삽 하나로 막아서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거친 손길이 미소의 어깨를 밀쳤고, 그녀의 손에 들린 삽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미소는 휘청이며 뒤로 밀려났다. 그들은 미소를 지나쳐 그녀가 애써 가꾼 작은 구역으로 향했다. 그들의 발길에 이제 막 뽑아낸 잡초 더미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어놓은 작은 모종들이 짓밟혔다.
“이런 쓸모없는 짓은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길드원 중 한 명이 비웃으며 미소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또 다른 길드원은 괭이로 그녀가 정성껏 다져놓은 흙을 엉망으로 파헤쳤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한 파괴를 넘어, 미소의 소망 자체를 조롱하는 듯했다. 미소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심장은 분노와 무력감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길드원들은 그 소리에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 입구에서 베르트람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철했지만, 그의 눈빛은 길드원들을 향해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돌아와라. 쓸모없는 것에 힘을 뺄 필요는 없다.”
베르트람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담겨 있었다. 길드원들은 베르트람의 지시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미소를 향해 마지막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며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정원은 다시 고요해졌다.
길드원들이 완전히 물러난 후, 미소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듯 쑤셨고,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전의 긴박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들의 거친 손길, 비웃음 섞인 말, 그리고 위협적으로 번뜩이던 도구들. 그녀는 가까스로 그들을 막아섰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공포와 무력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흙먼지 섞인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가 애써 가꾼 작은 구역이 길드원들의 발길에 다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뽑아낸 잡초들이 다시 짓밟히고 흩어져 있었다. 희망의 상징처럼 피어났던 연보랏빛 ‘소망의 꽃’마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했다. 꽃잎에 묻은 흙먼지가 마치 그녀의 노력에 드리운 그림자 같았다.
“젠장…”
미소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전생에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던 거친 말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황폐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흙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겨우 꽃 하나 피웠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거대한 벽에 부딪히다니.’
막막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전생의 기억, 무력하게 타인의 요구에 휘둘리던 자신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달라지고 싶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녀는 또다시 거대한 힘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존재인 걸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울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차분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흙을 밟는 소리는 무겁지 않았지만, 미소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고개를 들자 카이렌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냉철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미묘한 걱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옆에 앉아 그녀가 떨어뜨린 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흙먼지 묻은 ‘소망의 꽃’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섬세한 손길에 미소는 묘한 위안을 느꼈다. 마치 상처 입은 아기 새를 다루듯 부드러웠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 속에는 섣부른 동정이나 위로 대신, 상대를 존중하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미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좌절감이 묻어났다.
“괜찮을 리가요… 저는… 저는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큰 위협이 닥쳐오다니… 이 정원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삽 하나 들고 저들을 막아설 수는 없잖아요.”
카이렌은 미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길드의 위협은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상업 길드는 효율과 이득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 황폐한 정원은 그들에게 그저 개발 가치가 있는 ‘쓸모없는 땅’일 뿐이죠. 베르트람은 단순한 악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이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이 정원을 되살릴 당신의 소망보다, 도시의 발전을 위한 효율적인 토지 활용이 더 중요한 신념인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리춤에서 고대 비전서를 꺼내 펼쳤다. 낡은 가죽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정원을 되살리려는 순수한 소망이 있다면, 길드의 위협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전서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카이렌은 비전서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복잡한 그림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했다. 미소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림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대 문자는 더더욱 해독 불가능한 암호처럼 보였다.
“이 정원은 단순히 흙과 식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에테르의 흐름이 끊기고, 정령들이 잠들어 버린 곳입니다. 당신이 피워낸 ‘소망의 꽃’은 정원의 에테르가 미약하게나마 당신의 소망에 반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길드의 위협을 막아낼 수도, 정원 전체를 되살릴 수도 없습니다.”
미소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비전서와 카이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에테르요? 정령이요? 그게 다… 대체 무슨 말이에요? 저는 그저 잡초를 뽑고 꽃을 심는 것밖에 모르는데요. 이런 어려운 이야기까지 알아야 한다니…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이 거대한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무능함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이렌은 미소의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소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약한 온기가 실려 있었다.
“에테르는 이 세계의 생명력입니다.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죠. 공기처럼, 물처럼,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입니다. 이 소망 정원은 한때 에테르의 보고(寶庫)였습니다. 정령들은 그 에테르를 통해 정원에 생기를 불어넣고, 식물들을 성장시키는 존재들이고요. 하지만 정원이 황폐해지면서 에테르의 흐름이 끊겼고, 정령들도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겁니다.”
그는 다시 비전서의 페이지를 가리켰다.
“이 비전서는 사라진 에테르의 흐름을 복원하고, 잠든 정령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의 지혜이자, 이 정원을 되살릴 유일한 열쇠죠.”
카이렌은 미소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푸른 눈빛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순수한 소망’은 이 비전서의 마법을 깨울 열쇠입니다. 당신의 의지가 강렬할수록, 정원은 더 빠르게 반응할 겁니다. 당신의 손에서 피어난 ‘소망의 꽃’이 그 증거입니다. 당신의 소망이 에테르에 닿아 꽃을 피워낸 것처럼, 더 강력한 소망은 정원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미소는 카이렌의 설명을 들으며 혼란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을 느꼈다. 에테르, 정령, 비전서… 모든 것이 난해하고 거대하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피어났던 작은 꽃이 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작은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여전히 막막했지만, 이제는 단순히 맨몸으로 삽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비전서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이 정원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처럼 보였다. 그녀는 카이렌을 바라보았다. 그의 차분한 눈빛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믿음을 주었다. 이 복잡한 세계에서 길을 잃을 것 같던 그녀에게, 카이렌은 나침반처럼 느껴졌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죠? 이 비전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더 강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고대 비전서를 꽉 쥐었다. 이 정원을 지켜내고 싶다는, 다시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그녀의 순수한 소망이, 이제는 단순한 희망을 넘어 강렬한 의지로 바뀌고 있었다.
카이렌의 설명을 들은 다음 날, 미소는 해가 뜨자마자 정원의 가장 황폐한 구석으로 향했다. 어제 상업 길드원들과의 실랑이로 엉망이 된 구역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지만, 동시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강렬한 동기를 부여했다. 그녀는 굳게 다문 입술로 쪼그려 앉아 품속에서 고대 비전서를 꺼내 펼쳤다. 낡은 양피지에서 풍기는 희미한 흙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카이렌은 이미 그녀의 옆,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자신의 식물 도감을 펼쳐 들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한 번씩 미소에게로 향했지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미소에게 알 수 없는 압박감과 함께, ‘혼자 힘으로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했다.
비전서에는 ‘에테르 흐름 복원’을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복잡한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은 특정 식물의 뿌리 근처에 손을 대고, 눈을 감은 채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옆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했지만, 그림만으로도 대략적인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순수한 소망을 담아 에테르를 불어넣는 방식’.
미소는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망’을 떠올렸다. 황폐한 정원이 푸른 생명으로 가득 차고, 메마른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저마다의 잠재력을 꽃피우며 웃음 짓는 모습.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내고 일궈내는 자신. 그녀의 손으로 일궈낸 정원이 세상의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안식처가 되는 모습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는 그 광경에 그녀의 심장이 뜨겁그 광경에 그녀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그 생생한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모든 소망이 실현될 것 같은 강렬한 확신을 느꼈다.
미소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비전서에 지시된 대로, 가장 메마른 흙 속에 파묻힌 작은 나무뿌리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닿는 흙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거칠었다. 마치 죽은 듯 아무런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의식을 집중하며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에테르를 끌어내려 애썼다. 어제 카이렌이 설명했던 ‘순수한 소망’의 힘을 믿고, 마음속의 염원을 손끝으로 모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바닥은 여전히 차가웠고, 흙은 그저 흙일 뿐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시도했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변함없이 차갑고 메마른 흙뿐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정말 나에게 이런 힘이 있는 걸까?’ 전생에 느꼈던 무능함이 다시 그녀를 잠식하려는 듯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기억, 아무리 노력해도 상사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좌절감이 떠올랐다. 이 정원 재건이라는 거대한 임무 앞에서 자신이 또다시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카이렌은 그녀의 옆에서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미소의 손끝과 흙을 번갈아 응시했지만, 어떤 조언도, 어떤 격려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미소에게 더욱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마치 시험대에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절대.’ 미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단순한 소망이 아니었다. ‘아니야. 포기할 수 없어. 이 정원은… 나의 소망이야. 나의 전부야.’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지배했던 무력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녀는 이번에는 ‘정원을 지키겠다’는 결의뿐만 아니라, ‘정원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순수한 염원을 온전히 집중했다. 메마른 땅에 단비가 스며들고, 앙상한 가지에 푸른 잎이 돋아나는 모습. 죽어버린 줄 알았던 씨앗들이 흙을 뚫고 솟아나는 생명의 환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펼쳐졌다. 그녀의 손으로 피워낸 연보랏빛 ‘소망의 꽃’이 다시 눈앞에 선명하게 피어나는 환영이 보였다. 그 꽃잎 하나하나에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차가웠던 흙이 아주 희미하게, 정말 미세하게 따뜻해지는 듯했다. 손바닥 아래의 뿌리가 작은 심장처럼 아주 약하게 박동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미소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이 닿은 뿌리 주변의 흙에서 아주 미세한 푸른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가 잠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너무나 희미해서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짜릿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카이렌! 봤어요? 빛이… 빛이 났어요!"
미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 작은 푸른빛은 그녀에게 거대한 희망의 증거였다.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미묘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당신의 소망이 정원에 닿았습니다. 에테르의 흐름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시작된 겁니다. 처음부터 큰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정원은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소에 대한 칭찬과 함께,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을 암시하는 듯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의 말은 마치 그녀의 작은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미소는 비록 작은 변화였지만, 그 성취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생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했던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이곳에서 처음으로 맛본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뿌리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더욱 집중하여 에테르를 불어넣었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조금 더 강해졌고, 뿌리 주변에서 깜빡이던 푸른빛도 이전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그녀의 소망이 물리적인 형태로 변환되어 정원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이 정원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그녀는 그날 하루 종일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전서에 나온 대로 에테르 흐름 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비전서에는 다양한 식물의 뿌리, 혹은 특정 바위에 손을 얹고 에테르를 불어넣는 방법들이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곳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어떤 곳에서는 미약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좌절감이 들 때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소망의 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작은 꽃이 그녀에게 준 희망을 되새기며 다시금 집중했다. 작은 변화들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했다. 메마른 흙 속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푸른빛, 손바닥에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 그리고 아주 가끔씩 느껴지는 정령의 속삭임 같은 신비로운 기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주황빛 노을이 황폐한 정원을 붉게 물들였다. 미소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카이렌이 있는 나무 그늘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흙먼지가 가득했지만,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생기가 넘쳤다. 온몸의 근육은 쑤시고 아팠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에테르를 너무 무리하게 끌어내면 당신의 몸에도 부담이 갈 수 있습니다." 카이렌이 그녀에게 작은 물통을 건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미소는 물통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된 몸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노력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느껴졌다.
"카이렌, 정말 이 정원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계속하면요?" 미소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함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의 대답에서 미래의 모든 희망을 찾으려는 듯했다.
카이렌은 비전서를 덮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정원 입구 너머,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을 향했다. 그곳은 상업 길드가 지배하는 번화가였다. "정원의 심장은 관리인의 순수한 소망에 반응합니다. 당신의 소망이 꺾이지 않는 한, 이 정원은 다시 깨어날 겁니다. 하지만… 상업 길드의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겁니다. 그들은 당신이 정원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에게 이 정원은 단지 개발 가치가 있는 '쓸모없는 땅'일 뿐입니다."
그의 말은 미소에게 새로운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정원 재건의 희망이 싹트는 동시에, 더 큰 위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카이렌은 다시 미소를 응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전보다 더 깊은 경고의 빛이 서려 있었다. "내일은 아마 베르트람이 직접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단순한 위협이 아닐 겁니다. 그는 당신이 일으킨 미약한 변화를 감지했을 테니까요. 그의 목적은 명확할 겁니다. 이 정원의 소유권을 완전히 빼앗는 것."
미소는 손에 든 물통을 꽉 쥐었다. 차가운 물통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은 성공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쳐오는 듯했다. 베르트람의 이름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 날 찾아올 위협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어둠이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푸른 에테르의 흔적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