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회색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표정 없는 가면과 같았고, 발걸음은 목적 없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활기 넘치던 거리의 상점들은 빛을 잃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메마른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세계의 맥박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소문이 아닌, 모두가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 된 지 오래였다. 감정은 사치품이 되었고, 희망은 잊힌 단어가 되었다.
엘리엇은 늘 그랬듯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사람들 틈에 섞여 걸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햇빛 한 줄기 받지 못해 더 창백해 보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색 눈동자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타인의 감정에 공명하는 아우라를 숨기려는 듯 조심스러웠다. 다른 이들의 희미한 무기력과 절망이 그의 아우라를 통해 증폭되어 엘리엇의 심장을 짓눌렀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저 타인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아우라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친구의 작은 슬픔은 그에게 거대한 비탄으로 다가왔고, 부모님의 사소한 걱정은 온몸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이 되었다. 그의 아우라는 타인의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을 넘어, 그 감정의 파동을 거대하게 증폭시켜 주변을 혼란에 빠뜨렸다. 한때 그의 주변은 감정의 폭풍으로 휩싸였다. 작은 다툼은 격렬한 분노로, 사소한 오해는 걷잡을 수 없는 증오로 번졌다. 결국 그는 모두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다른 아카데미들은 그의 아우라를 ‘통제 불능의 결함’으로 분류했고, 그는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곳, 에테르 심장 학원으로의 입학은 마지막 선택이었다. 다른 학원들이 아우라를 전투나 실용적인 기술로 가르칠 때, 에테르 심장 학원은 오직 약해진 세계의 맥박을 되살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부적격자’로 분류된 특별한 아우라를 가진 학생들을 모아 그들의 감정을 조율하는 데 집중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리엇은 그 소문이 자신에게 한 줄기 빛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학원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고요했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메마른 아스팔트 대신 촉촉한 흙길이 이어졌고, 회색빛 하늘은 점차 푸른빛을 되찾았다. 길 양옆으로는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이따금씩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이곳이 바로 고대의 정령들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심장의 숲’이었다. 숲이 깊어질수록 엘리엇의 심장은 더욱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의 아우라가 숲의 생명력과 반응하는 듯했다. 숲은 살아 있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희미하지만 분명한 생명의 파동이 그를 감쌌다.
얼마나 걸었을까,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자연의 재료로 지어진 건물들은 숲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벽면에는 이끼가 푸르게 내려앉아 있었고, 낡았지만 견고해 보이는 지붕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차분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학원 입구에는 닳아버린 글씨로 ‘에테르 심장 학원’이라 새겨진 팻말이 걸려 있었다.
엘리엇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다시 한번 자신의 아우라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제 돌아갈 곳은 없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숲의 생명력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학원 내부는 외부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바닥에 오색찬란한 빛깔을 수놓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잔잔한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어떤 감정의 흐름과 같은 것이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속삭임, 아련한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의 파동. 엘리엇의 아우라가 그 모든 것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의 심장이 울렸다. 그의 몸속을 흐르는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때였다. 텅 빈 복도 한가운데서 그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또 다른 파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불꽃처럼 강렬하고,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엘리엇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복도 저편에서 한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붉은색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 그리고 똑 부러지는 자세. 그녀의 아우라는 주변 공기를 뜨겁게 달구는 듯했다. 엘리엇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녀의 강렬한 아우라는 그의 공명 아우라를 자극했고, 그의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소녀는 엘리엇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엘리엇의 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엘리엇의 심장이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며, 억눌려 있던 그의 아우라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소녀의 얼굴에 경계심 어린 표정이 스쳤다.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엘리엇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갖 감정의 파편들로 가득 차 버렸다. 두려움, 호기심, 그리고 알 수 없는 끌림. 모든 것이 뒤섞여 거대한 파도를 이루었고, 엘리엇은 그 파도에 휩쓸려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의 아우라가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부적격자’로서의 첫걸음이었다.
엘리엇의 시야는 흐릿해졌고, 머리가 핑 돌았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색채들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듯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평소 희미한 울림에 불과했던 그의 아우라는 이제 그 안에서 폭풍처럼 포효했고,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격동하는 감정들을 메아리쳤다. 두려움, 그래, 거부에 대한 그의 깊은 공포도 있었지만, 동시에 맹렬하고 불타는 듯한 결의도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낯설었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의 무언가와 강렬하게 공명했다. 그것은 그녀의 것이었을까? 불꽃 같은 아우라를 지닌 그 소녀의?
"또다시…." 그의 입술에서 신음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또다시 이런 식이었다. 다른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늘 그랬다. 그의 아우라는 타인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뒤섞으며, 결국 모두를 혼란에 빠뜨렸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의 간절한 소망은 언제나 이 통제 불능의 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마치 뜨거운 불에 데인 것처럼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이곳에서도 그는 ‘결함’으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했다. 세상의 맥박이 약해져 감정이 메말라 가는 시대에, 그의 아우라는 오히려 감정을 과잉으로 폭주시켰으니, 어쩌면 그는 시대가 원치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때, 거친 파도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존재감이 엘리엇의 혼란스러운 아우라를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차분하고 온화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 속 등대처럼, 그의 정신을 붙잡는 힘이었다. 엘리엇은 간신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소녀의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계심, 의문,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번지는 호기심. 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엘리엇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아우라는 여전히 요동쳤지만, 아까보다는 미약하게나마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은은한 푸른빛 아우라를 두른 백금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고, 그 미소는 엘리엇의 폭주하는 감정을 신기할 만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렌 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