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런랩의 서버룸은 언제나 일정한 웅웅거림으로 가득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수많은 데이터가 쉴 새 없이 오고 갔다. 한유진은 이 공간을 사랑했다. 명확한 논리와 예측 가능한 결과로 이루어진, 완벽하게 통제된 그녀만의 세계였다. 스물다섯 살, AI 기반 스타트업 뉴런랩의 CTO 한유진은 모니터 세 대를 앞에 두고 오직 코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유진아, 잠깐 얼굴 좀 볼까?"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뉴런랩의 대표이자 유진의 대학 선배인 박선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늘 그렇듯 말끔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돌리다 말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막 중요한 알고리즘의 최적화 작업을 끝내려는 참이었다.
"5분 뒤에요. 지금 건드리면 데이터가 꼬일 수도 있어요."
유진의 단호한 말에 선우는 픽 웃었다. "하긴, 네 천재성은 이런 사소한 것에서 빛나지. 그래, 5분 뒤에 회의실로 와. 중요한 얘기가 있어."
선우가 사라진 뒤, 유진은 남은 작업을 속전속결로 마무리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춤추듯 날아다녔고, 복잡한 코드들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화면에 ‘최적화 완료’라는 메시지가 떴다. 완벽했다. 그녀의 AI ‘에이치’의 성능은 또 한 단계 진화했다.
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선우가 ‘중요한 얘기’라고 했으니, 아마 다음 투자 유치 건에 대한 최종 브리핑일 것이다. 뉴런랩은 유진의 독보적인 AI 기술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다음 시리즈 A 투자 유치는 회사의 존폐를 가를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녀의 기술력이라면, 문제없을 터였다.
그러나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유진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선우는 이미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두 명의 중년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갈한 차림새와 냉철한 눈빛에서 베테랑 투자자 특유의 분위기가 풍겼다.
"아, 유진아. 이쪽은 우리에게 투자 컨설팅을 해주고 계신 이사님들과 팀장님이셔. 그리고 이분들이 바로 우리 뉴런랩의 핵심, 한유진 CTO님이야."
선우의 소개에 유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한유진입니다."
짧은 인사가 오간 뒤, 선우는 유진에게 자리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유진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꼿꼿한 자세로 그들을 마주 보았다. 선우는 능숙하게 뉴런랩의 비전과 에이치의 기술력을 설명했다. 유진은 선우의 발표를 들으며, 혹시나 빠뜨린 기술적 디테일이 있을까 싶어 메모를 준비했다.
발표가 끝나자, 투자 컨설턴트 중 한 명인 이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박선우 대표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뉴런랩의 기술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군요. 특히 한유진 CTO님의 AI 개발 역량은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칭찬에 유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역시, 기술이 최고였다.
하지만 이사의 다음 말은 유진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저희가 내부적으로 분석한 결과, 한유진 CTO님께서는... 음,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하다는 평이 나왔습니다."
유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인간적인 매력? 그게 투자 유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희가 심층 인터뷰와 시장 조사를 진행해 본 결과, 투자자들이나 잠재적 파트너사들이 한 CTO님과의 소통에서 다소 어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기술적 전문성은 뛰어나지만, 공감 능력이나 부드러운 커뮤니케이션 스킬, 그리고...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죠."
옆에 앉아있던 팀장도 거들었다. "AI 기술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기능적인 것을 넘어, 인간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술을 만드는 사람 역시 '인간미'를 갖추고, 대중에게 신뢰와 호감을 줄 수 있어야 하죠. 특히 투자자들은 기술의 미래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이끌어갈 리더의 잠재력과 대중적 이미지를 중요하게 봅니다."
유진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들의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두뇌는 오직 ‘문제 해결’에 특화되어 있었다.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그녀의 알고리즘에 존재하지 않는 ‘오류’였다.
"그... 그럼 제가 투자 유치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유진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선우가 당황한 듯 끼어들었다. "아, 유진아, 그런 뜻은 아니고... 유진이의 잠재력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우리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거지."
"보완이요? 제가 지금 당장 인간적인 매력을 어떻게 보완하라는 거죠?" 유진은 자신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심박수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달 예정된 대규모 투자자 프레젠테이션에서 한 CTO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희는 이 '인간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투자 유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이 뒤섞여 그녀를 짓눌렀다. 평생을 논리와 이성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비논리적인 요소가 자신의 꿈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유진은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차분했던 서버룸의 웅웅거림이 오늘은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의자에 풀썩 앉아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최적화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혀 최적화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버그와 오류로 가득 찬 프로그램 같았다.
"인간적인 매력... 인간적인 매력..."
유진은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구글 검색창에 그녀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검색어가 입력되었다.
`'인간적인 매력 높이는 법'`
`'CTO 인상 좋아지는 법'`
`'비즈니스에서 호감 주는 방법'`
수많은 검색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웃는 연습’, ‘눈 마주치기’, ‘공감하는 리액션’, ‘경청하기’...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흉내 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는 늘 서툴렀다.
그때, 선우가 연구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었다.
"유진아, 너무 상심하지 마. 그분들 말씀이 틀린 건 아니지만, 네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저...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는 거지."
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선배, 저는 이해가 안 돼요. 기술이 완벽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제가 웃고, 공감하는 척해야 하는 거죠? 그게 제 기술력에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선우는 유진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아. 네가 답답할 거야. 하지만 비즈니스라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잖아.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믿고 투자하고 함께할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해. 네가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져야, 에이치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거야."
"그럼 제가 단기간에 없던 매력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유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는 모태솔로에, 사회생활도 사실 선배 덕에 버티고 있는 수준인 걸요. 저한테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건, 마치 AI에게 영혼을 주입하라는 말 같아요."
선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문제를 전문적으로 해결해 주는 사람이 있어."
유진은 선우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어떤 사람인데요? 연기 선생님이라도 소개시켜 주시게요?"
선우는 빙긋 웃었다. "아니. '관계 시뮬레이션 컨설턴트'라는 이색 직업을 가진 사람이야. 사람의 감정과 관계 역학을 기가 막히게 분석하고 시뮬레이션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일종의... 인간관계 알고리즘 디버깅 전문가랄까?"
유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인간관계 알고리즘 디버깅'이라니. 그녀의 흥미를 끄는 표현이었다.
"그런 직업도 있나요? 정말 효과가 있긴 해요?"
"내가 아는 한, 그 분야에서는 최고야. 좀 독특하긴 하지만,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너한테도 잘 맞을 거야. 게다가 지금 우리 상황에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 아니겠어?"
유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이성적인 부분은 ‘관계 시뮬레이션 컨설턴트’라는 직업 자체에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표 지향적인 본능은,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고 외쳤다. 자신의 꿈, 뉴런랩의 미래가 걸린 문제였다.
"좋아요. 만나볼게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바로 나올 거예요."
유진의 말에 선우는 활짝 웃었다.
"걱정 마.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어렵게 약속 잡았어. 내일 오후 2시, 강남 '더 라운지' 카페."
다음 날, 유진은 선우가 알려준 '더 라운지' 카페로 향했다. 그녀의 연구실과는 전혀 다른, 화려하고 번잡한 공간이었다. 어색함에 주변을 둘러보다 약속 시간 5분 전, 한 남자가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유진 CTO님이십니까?"
나른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였다.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남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말끔한 인상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깊이 있는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정갈한 수트 차림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네, 제가 한유진입니다. 강준혁 씨 맞으신가요?"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강준혁입니다. 박선우 대표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뉴런랩의 천재 CTO시라고."
유진은 그의 칭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근육은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준혁은 그런 유진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박 대표님께 한 CTO님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들었습니다. 투자 유치를 위한 '인간적인 매력' 향상 프로젝트."
유진은 그의 직설적인 화법에 살짝 당황했다.
"네... 솔직히 저는 아직도 그게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준혁은 작게 웃었다. "이해합니다. 한 CTO님 같은 분들은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사고에 익숙하시니까요. 하지만 인간 사회는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감정의 영역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특히 비즈니스 관계는 단순한 데이터 교환을 넘어, 신뢰와 호감이라는 감정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죠."
그의 말은 유진의 귀에 논리적으로 들렸다. '감정적 기반'이라는 표현이 그녀의 AI 알고리즘의 '기반 모델'을 떠올리게 했다.
"저는 심리학을 전공했고, 지난 5년간 수많은 사람의 관계 데이터를 분석해 왔습니다. 관계는 복잡한 데이터의 집합이며, 저는 그 패턴을 분석하고 최적의 시뮬레이션 경로를 제시합니다. 한 CTO님께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관계 알고리즘'에 대한 심층적인 학습과 실전 훈련입니다."
"실전 훈련이요?"
"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실제와 가장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즉, '가짜 연애'를 통해 연애 알고리즘을 훈련시키는 거죠."
유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가짜 연애’라니.
"가짜... 연애요? 저와 강준혁 씨가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확합니다. 제가 한 CTO님의 '가짜 연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제가 제시하는 '연애 프로토콜'에 따라 행동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변수들을 함께 분석하고 학습하는 겁니다. 마치 에이치를 훈련시키듯, 한 CTO님의 연애 알고리즘을 최적화하는 거죠."
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질문과 경고음이 동시에 울렸다. ‘가짜 연애’라니, 너무 비논리적이고 위험한 발상 아닌가? 하지만 동시에, ‘연애 알고리즘 훈련’이라는 그의 표현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녀의 약점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입니다. 감정적 개입은 일절 배제됩니다. 계약 기간, 역할, 행동 지침, 그리고 상호 간의 비밀 유지. 모든 것은 명확한 '프로토콜'에 따라 진행될 것입니다."
준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눈빛은 유진에게 ‘감정적 개입 없음’을 맹세하는 듯 보였다. 유진은 그의 말을 곰곰이 되뇌었다. '프로토콜'. '비즈니스 관계'. '감정적 개입 배제'.
그래, 어차피 그녀에게 연애란 버그 투성이의 프로그램이었다. 이 남자가 말하는 대로 ‘프로토콜’에 따라 움직이는 관계라면, 어쩌면 그녀의 연애 알고리즘도 디버깅될 수 있을지 모른다. 뉴런랩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요. 해보죠. 계약 기간은 투자 유치 프레젠테이션까지로 하고, 제게 필요한 '인간적인 매력'을 최적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절대, 단 한 번도, 진짜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준혁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그게 바로 저희의 '프로토콜'이니까요. 그럼, 다음 주부터 첫 번째 '연애 알고리즘 훈련'을 시작하시죠."
그렇게, 한유진의 연애 알고리즘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변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애 첫 연애이자, 동시에 가장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가짜' 연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