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은 노트북을 덮는 대신, 탁자 위에 펼쳐진 계약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연애 알고리즘 훈련’. 강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새로운 프로젝트의 설계도를 받아든 개발자처럼, 그녀의 시선은 계약서의 조항 하나하나를 해독하듯 훑었다. ‘비즈니스 관계’, ‘감정적 개입 배제’, ‘인간적인 매력 최적화’. 세 가지 핵심 키워드는 그녀의 뇌 속에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며 복잡한 쿼리를 던지고 있었다. 이 추상적인 개념들을 어떻게 코드화할 것인가? 그녀의 뇌는 마치 슈퍼컴퓨터처럼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했다.
첫 만남은 주말 오후, 유동 인구가 적당히 있는 한적한 동네의 브런치 카페였다. 약속 시간 10분 전, 유진은 이미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카페 안을 채우는 잔잔한 재즈 음악과 고소한 커피 향, 그리고 사람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를 인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오직 한 곳에 쏠려 있었다. 주변의 연인들. 그들의 자연스러운 대화, 무의식적인 스킨십, 서로를 향한 눈빛 교환은 그녀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문 같았다.
“평균적인 연인들의 대화 패턴은? 비언어적 표현의 빈도는? 손을 잡는 빈도는? 시선이 마주치는 지속 시간은? 상대방의 말에 대한 공감 표현의 종류는?”
그녀는 머릿속으로 데이터를 수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 커플이 마주 앉아 서로에게 브런치를 먹여주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저것은 어떤 프로토콜에 해당하는가? 친밀도 상승을 위한 특정 행동인가?’ 그녀의 분석 엔진은 과부하가 걸린 듯 빠르게 돌아갔다. 카페 창밖으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녀의 내면은 차가운 논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정각, 약속된 시간에 맞춰 카페 문이 열리고 강준혁이 들어섰다. 깔끔한 아이보리색 캐주얼 셔츠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는, 마치 방금 패션 잡지 화보 촬영을 마치고 온 듯 유려했다. 그의 등장에 카페 안의 시선이 잠시 집중되는 것을 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주변 테이블의 몇몇 여성들은 그를 흘끗 보며 작은 속삭임을 나누기도 했다. ‘인간적인 매력 최적화’라는 목표에 걸맞은 ‘표본’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유진은 준혁을 보자마자 일어설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일어서서 인사하는 것이 사회적 예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몸은 어딘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결국 그녀는 어색하게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오셨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게 들렸다. 마치 조율되지 않은 악기에서 튀어나온 음정처럼 어색했다. 준혁은 그녀의 어색함을 정확히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그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유진의 딱딱한 태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유진 씨, 안녕하세요. 첫 번째 훈련이 시작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유진아’, ‘준혁아’로 부르는 연습부터 시작해볼까요?”
그의 제안에 유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프로토콜에 명시되지 않은 호칭 변경인가? 계약서에는 명확한 호칭 규정이 없었지만, 암묵적인 사회적 규범에 따르면 관계의 발전에 따라 호칭이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또한 ‘훈련’의 일부일 터였다.
“알겠습니다. 준혁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마치 낯선 외국어처럼 딱딱하게 굴러갔다. ‘준혁아’. 단 세 음절이었지만, 그녀의 혀끝에서 맴도는 그 이름은 마치 낯선 코드를 디버깅하듯 버벅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긴장감이 스쳤다.
준혁은 그런 유진의 반응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더니, 그녀의 앞에 작은 노트를 건넸다. 표지에는 깔끔한 글씨체로 ‘연애 알고리즘 훈련 프로토콜 v1.0’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은 ‘자연스러운 데이트’ 시뮬레이션입니다. 목표는 ‘연인 간의 편안한 상호작용 습득’입니다. 특별한 지시 없이, 평범한 연인처럼 대화하고 행동하는 것이 첫 번째 미션입니다.”
그는 마치 프로젝트 매니저가 업무 지시를 내리듯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이어서 메뉴판을 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일단 뭐라도 주문해볼까요?”
유진은 메뉴판을 펼치고는 잠시 침묵했다. ‘평범한 연인처럼? 평범한 연인은 어떤 대화를 하지? 어떤 주제를 선택해야 상대방의 흥미를 유발하고, 자연스러운 대화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녀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오류’였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녀가 겨우 내뱉은 말은 마치 일기예보 같았다. 건조하고,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문장이었다. 준혁은 웃음을 참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네, 좋네요. 그런데 유진아, 날씨 이야기만 할 건가요?”
그는 유진의 눈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깊고 침착했지만, 유진에게는 왠지 모를 불편함과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마치 자신의 내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 그,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유진은 솔직하게 물었다. ‘데이터 부족. 입력값 없음.’ 그녀의 뇌는 새로운 정보 입력을 요구했다. 준혁은 턱을 괴고 유진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에는 미소가 어렸지만, 동시에 진지함이 엿보였다.
“음… 예를 들어, 주말에 뭐 했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아니면 저에 대한 궁금한 점 같은 거요. 어떤 주제든 괜찮아요.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해 알아가려는 노력과 자연스러운 감정의 교환이니까요.”
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개인 정보 요청’과 ‘친밀도 상승을 위한 질문 유형’이라는 키워드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개인 정보는 최소한으로 공유하되, 관계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질문은 허용된다.’ 그녀는 나름의 규칙을 적용하려 애썼다.
“준혁 씨는… 아니, 준혁이는 주말에 무엇을 했습니까?”
그녀는 다시금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습니다’ 체가 주는 경직성은 그녀의 평소 언어 습관이자,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다. 준혁은 한숨을 쉬는 듯 보였지만, 이내 미소 지었다.
“저는 주로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어요. 유진이는요?”
그의 질문에 유진은 자신의 주말 일상을 떠올렸다. ‘코드 디버깅’, ‘새로운 알고리즘 연구’, ‘논문 읽기’. 그녀의 일상은 오직 연구와 개발로 채워져 있었다.
“저는 주로… 연구실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답변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건조했다. 그 안에 어떤 감정의 기복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미소가 살짝 옅어지는 것을 유진은 감지했다.
“음, 물론 그것도 좋지만, 조금 더 ‘인간적인’ 활동은 없었나요?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났다거나, 영화를 봤다거나…”
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삶에서 ‘인간적인’ 활동이라는 범주에 속할 만한 것은 극히 드물었다. 친구? 영화?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낯선 개념이었다.
“친구는… 없습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준혁의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표정은 잠시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이런 유진의 모습조차도 흥미로운 ‘데이터’일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제가 유진이의 ‘인간적인 주말’을 시뮬레이션해볼까요?”
그는 유진의 손을 뻗어 자신의 손 위에 살포시 얹었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유진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준혁의 손은 따뜻했다. 차가운 금속에 뜨거운 물이 닿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의 심장이 갑작스럽게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연인들은 이렇게 손을 잡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거죠.”
준혁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깊은 눈빛은 흡수될 듯 강렬했고, 그 시선 속에서 유진은 왠지 모를 당혹감을 느꼈다. 낯선 감각과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모든 감각 기관을 흔들었다. ‘이것은 프로토콜의 일부인가? 나의 감각 기관이 오류를 일으키는 것인가? 신체 접촉에 대한 반응은 어떤 데이터로 분류해야 하는가?’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한 질문들로 가득 찼다. 손을 빼낼까 말까 망설이다, 그녀는 결국 그대로 두었다. 준혁의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차가운 손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준혁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훈련은 유진에게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버그’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녀의 연애 알고리즘은 이미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그랜드 볼룸은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공기를 채우고,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대화 소리가 마치 잘 정돈된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졌다. 유진은 준혁의 팔짱을 낀 채 이 낯선 공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파티장의 구조, 참석자들의 동선, 그리고 그들의 표정 변화를 스캔하듯 훑었다. 마치 고성능 센서가 작동하는 로봇처럼, 그녀의 뇌는 이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잠재적인 위협 요소와 기회 요소를 분류하고 있었다.
“유진아, 지금은 ‘연인 모드’야.”
나지막이 속삭이는 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미묘한 전율이 일었지만, 유진은 애써 그 감각을 무시했다. “투자 유치는 나중 문제고, 오늘은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목표야. 미소, 눈 맞춤, 그리고 가끔은 나한테 기대는 듯한 제스처.” 그의 지시는 명확했고, 유진은 그 프로토콜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마치 긴장한 로봇이 학습된 감정을 구현하려는 시도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미지의 코드와 씨름하는 개발자의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준혁은 그런 유진의 어색함을 눈치챈 듯, 그녀의 허리를 살짝 감싸 안으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고, 그녀의 얇은 드레스 위로 전해지는 온기는 또다시 미묘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의 속삭임은 칭찬이라기보다는 마치 기계의 오류를 바로잡는 듯한 안정적인 명령어처럼 들렸다. 유진은 이 모든 것이 ‘프로토콜’의 일부임을 다시금 상기하며,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데이터 노이즈로 처리하려 애썼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준혁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파티장의 온갖 소음과 향기,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오감을 자극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오직 ‘준혁의 지시’와 ‘자연스러운 연인 연기’라는 두 가지 목표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 옮겼을까. 파티장 한쪽에서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유진의 시야에 포착된 인물은 다름 아닌 과거 뉴런랩의 투자 컨설팅 과정에서 그녀의 ‘인간미 부족’을 지적하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던 박 이사였다. 그는 멀리서도 유진을 발견하고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어이구, 한유진 CTO님 아니신가. 여전히 연구실에만 박혀 계시는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도 오시는군요?”
박 이사의 비꼬는 듯한 말투는 유진의 뇌에 즉각적인 경고등을 켰다. ‘뉴런랩의 투자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격적인 언어 감지.’ 그녀의 뇌는 즉각적인 반박 로직을 가동하려 했다. 차가운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이고 논리적인 반박 문장을 구성하려던 찰나, 박 이사는 준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옆에는… 남자친구인가?” 그의 질문에는 ‘설마?’ 하는 비웃음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유진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뇌는 박 이사의 발언을 ‘뉴런랩 CTO의 개인적인 평판을 훼손하려는 시도’로 인식하고, 더욱 강력한 반박 로직을 준비했다. “박 이사님, 저는…”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려는 순간, 준혁이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이 유진의 허리를 더욱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강준혁입니다. 유진이 남자친구 맞습니다.”
준혁은 박 이사에게 악수를 청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매력적이어서, 마치 잘 훈련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는 듯했다. 박 이사는 준혁의 예상치 못한 대처와 그 완벽한 미소에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그의 얼굴에 비아냥거림 대신 묘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는 어색하게 준혁의 손을 잡았다.
“아, 네… 박 이사입니다. 그런데 한 CTO님은 워낙 일벌레라… 연애는커녕 친구도 잘 안 만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네요?”
박 이사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투를 버리지 못했지만, 그 강도는 한풀 꺾인 듯했다. 그의 시선은 준혁과 유진 사이를 오가며 진실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준혁은 유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유진의 몸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그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그녀의 귓가에 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하하, 유진이는 겉으로는 좀 차가워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 제가 먼저 반했죠. 제가 옆에서 잘 챙겨주고 있습니다.”
준혁은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정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의 손길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스치자,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인 연기에 유진은 속으로 경악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박 이사의 날카로운 말들이 준혁의 부드러운 방어막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보호받는다’는 낯선 감정을 경험했다. 이 감정은 그녀의 연애 알고리즘에 새로운 변수로 입력되었다. 유진은 준혁의 말에 맞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박 이사는 준혁의 능숙한 대처와 유진의 ‘변화’에 당황한 듯, 더 이상 비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를 피했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패배감과 함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박 이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유진은 준혁에게 속삭였다. “방금 그 사람, 뉴런랩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반박했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함께 자신의 프로토콜이 중단된 것에 대한 불만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뇌는 여전히 박 이사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시나리오를 빠르게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준혁은 유진의 말을 자르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 유진아. 잘했어.”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방금 같은 상황에서는 논리적인 반박보다 ‘감정적인 방어’가 더 효과적이야. 내가 보여준 것처럼, 연인의 든든한 모습으로 유진이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거지.” 그는 유진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깊고 따뜻했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유진은 완벽하게 해독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투자자들은 기술력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인간적인 매력’과 ‘안정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그는 유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진이의 솔직함은 분명한 매력이지만, 때로는 전략적인 표현이 필요해. 이건 일종의 ‘소셜 인터페이스’ 최적화라고 생각하면 돼.” 그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셜 인터페이스 최적화’. 그제야 그녀의 뇌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알고리즘을 찾은 듯했다. 복잡한 사회적 상황을 단순한 논리적 규칙으로 환원하는 준혁의 능력에 유진은 작은 감탄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지시를 새로운 학습 데이터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행동 프로토콜을 업데이트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진의 손을 잡고 파티장 한쪽, 비교적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의 손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 그럼 다음 미션.” 준혁은 유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다음 단계의 퍼즐을 제시하는 듯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기 보이는 투자자에게 가서, 뉴런랩의 비전을 설명하되, 중간중간 나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나의 의견을 묻는 식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보여줘.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나에게 살짝 미소 지어줘.”
준혁의 지시에 유진은 다시금 긴장했지만,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따뜻한 감각이 왠지 모를 용기를 주었다.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미묘하게 뛰고 있었지만,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다음 ‘프로토콜’을 수행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여전히 어색했지만, 준혁의 존재가 그녀에게 낯선 ‘안정감’이라는 변수를 주입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박 이사에게서 느꼈던 굴욕감과 불쾌감 대신, 준혁 덕분에 처음으로 ‘보호받는다’는 낯선 감정을 경험한 유진은, 이 가짜 연애가 그녀의 예측 불가능한 연애 알고리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세계는 준혁이라는 새로운 변수와 함께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딩동.
예상했던 알림음이었다. 유진은 현관문 앞에 선 채로 몇 초간 심호흡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자신의 보금자리에 초대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시스템 리소스를 요구했다. 그녀의 뇌는 현재 ‘관계 시뮬레이션: 홈 데이트’ 프로토콜을 실행 중이었고,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프로토콜은 곳곳에서 예측 불가능한 ‘버그’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제저녁, 준혁에게서 ‘좀 더 친밀한 관계 시뮬레이션을 위해 유진의 집에서 홈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유진은 순간적으로 시스템 오류를 경험했다. ‘집? 홈? 데이트? 개인 공간 침범 및 사생활 노출 위험 발생. 프로토콜에 명시되지 않은 항목.’ 그녀는 즉시 반박하려 했지만, 준혁은 그녀의 혼란을 간파한 듯 부드럽게 말했다. “유진아, 프로토콜이야. 연인 관계 시뮬레이션에서는 서로의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며 친밀도를 높이는 과정이 필수적이지.” 그의 말에 그녀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토콜’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절대적인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밤부터 유진의 아파트는 일종의 데이터 센터 서버실로 변모했다. 널브러져 있던 개발 서적들은 알파벳 순서와 출판 연도에 따라 책장에 완벽하게 정렬되었다.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였고, 창문은 얼룩 하나 없이 투명하게 빛났다. 그녀는 심지어 ‘로맨틱한 분위기 연출’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까지 해봤다. 검색 결과는 ‘캔들’과 ‘잔잔한 음악’이었다. 캔들을 사러 갈 시간은 없었으므로, 그녀는 연구실에서 쓰던 밝기 조절이 가능한 LED 무드등을 가져왔다. 푸른빛이 도는 차가운 백색광 대신, 따뜻한 주황색으로 조명을 설정했다. 음악은 ‘카페에서 자주 듣는 편안한 재즈’라는 알고리즘에 따라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녀의 플레이리스트는 유명 재즈 피아니스트의 연주곡들로 가득했다. ‘로맨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구현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어딘가 엉뚱하고도 사랑스러웠다.
저녁 메뉴는 ‘초보자도 쉽게 만들 수 있는 파스타’ 레시피를 따라 하다가 결국 망쳐버렸다. 면은 불어터졌고, 소스는 짠맛과 밍밍한 맛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그녀는 자신의 요리 능력이 예상치 못한 최악의 결과값을 내놓자 잠시 좌절했지만, 이내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냈다. 배달 앱을 통해 가장 평점이 높은 치킨집에 주문을 넣었다. ‘배달 음식’ 또한 ‘프로토콜’의 일부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그녀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한 최적의 해결책을 찾았음에 안도했다.
딩동.
두 번째 알림음이 울렸다. 유진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유진아, 늦어서 미안.”
준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정확히 5분 늦게 도착했다. 한 손에는 라벨이 고급스러운 와인 한 병이, 다른 한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연한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장미 꽃다발이었다. 꽃잎에서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오는 길에 유진이 생각나서 꽃 좀 사봤어.”
그의 다정한 말과 함께 내밀어진 꽃다발에 유진은 또다시 당황했다. 그녀의 뇌는 빠르게 정보를 처리했다. ‘꽃? 프로토콜에 없는 변수인데? 이건 어떤 의미의 입력값인가? 감성적 표현? 호감도 상승을 위한 전략인가?’ 그녀는 어색하게 꽃다발을 받아들고는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꽃다발을 놓는 그녀의 손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중요한 샘플을 다루는 듯 조심스러웠다.
준혁은 그녀의 어색한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집이 아주 깔끔하네. 마치 유진이의 코드처럼.”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된 유진의 아파트를 스캔하듯 훑었다. 유진은 준혁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프로토콜에 따라 올라갔지만, 눈빛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들어와.”
그녀의 말은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명령어 같았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은 배달 온 치킨을 먹으며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바삭한 튀김옷과 부드러운 살코기, 매콤달콤한 양념의 조화는 훌륭했지만, 유진의 입맛을 돋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치킨을 기계적으로 씹으며 다음 대화 시퀀스를 예측하려 애썼다.
“유진아, 요즘 연구는 어떻게 돼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그 AI 모델, 진전이 있어?”
준혁의 질문에 유진의 눈이 평소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AI 기술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았고, 손짓은 설명을 돕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박 이사에게 뉴런랩의 투자 유치를 설득하던 그때처럼, 그녀는 논리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기술의 핵심과 잠재적 가치를 명확하게 전달했다.
“저희가 개발 중인 ‘감정 인식 AI’는 기존의 감성 분석 모델과는 차별화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미세한 표정 변화, 음성 톤, 심박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종합 분석하여, 텍스트 기반 감성 분석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중 모달리티 기반의 심층 학습 모델을…”
준혁은 그녀의 설명을 조용히 듣다가, 유진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고, 그의 눈빛은 다정했다.
“유진아, 지금은 ‘연인과의 대화’ 모드야. 너무 전문적인 용어는 잠시 접어두고, 좀 더 일상적인 언어로, 감정을 담아서 이야기해볼까? 예를 들어, 이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 같은 거.”
그의 따뜻한 손길이 유진의 손을 감싸자, 그녀는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심장의 박동이 평소보다 빠르게 울렸다. 그녀의 뇌는 이 현상을 ‘비정상적인 심박수 증가’로 분류하며 경고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 기관이 이상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감정적 반응인가? 아니면 단순한 생리적 현상인가? 데이터 부족으로 분석 불가.’
치킨을 다 먹고, 준혁은 유진이 준비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은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유진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귓가에 그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연인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쉬기도 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얻는 거지.”
유진은 그의 어깨에 기대자 낯선 온기와 안정감에 휩싸였다. 그의 어깨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그의 몸에서는 은은하고 상쾌한 향기가 났다. 그녀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에 당황했다. 그녀의 뇌는 이 감각을 ‘안전’, ‘편안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따뜻함’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려 애썼지만,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이 감각들은 기존의 어떤 데이터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프로토콜의 일부인가? 아니면... 버그인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어렴풋이 느꼈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박동은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장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준혁은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유진아, 너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야. 그저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그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소파 위 LED 무드등의 주황색 빛이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부드러웠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유진은 전혀 해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그녀를 묘하게 이끌었다. 그는 천천히 유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그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따뜻하고 촉촉한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 유진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시스템 과부하로 인해 폭주하는 서버 팬 소리 같았다.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의 눈동자, 그의 입술의 미세한 움직임, 그의 숨결의 온도,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프로토콜의 일부일 리 없어. 이건... 버그야.’
그녀의 뇌는 필사적으로 경고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준혁의 눈빛 속에서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기 직전,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그녀의 연애 알고리즘은 예측 불가능한 치명적인 오류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관계의 정의가,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더 이상 ‘프로토콜’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시스템은 완전히 재부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