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아파트, 다음 날 아침. 창밖으로 옅은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전날 밤의 폭풍우가 할퀴고 지나간 듯 혼란스러웠다. 침대 시트는 밤새도록 뒤척인 흔적으로 구겨져 있었고, 그녀의 미간에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강준혁의 손길, 이마에 닿았던 그의 입술, 옆 테이블 커플의 격렬한 다툼, 그리고 준혁의 나른하지만 단호했던 마지막 말까지. 모든 감각 정보들이 그녀의 뉴런을 자극하며 쉬지 않고 경고음을 울렸다.
유진은 스마트 워치를 통해 에이치에게 요청했던 감각 데이터 분석 보고서를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화면 가득한 그래프와 수치들은 그녀의 심박수, 체온, 뇌파 활동이 비정상적인 패턴을 보였음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감정 키워드’ 항목은 여전히 ‘인과관계 불명’을 표시하며 텅 비어 있었다. 에이치가 무려 10만 건 이상의 감정 데이터베이스와 시나리오를 학습했음에도, 지금 그녀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분석하고 정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개발한 최첨단 AI 시스템이 그녀 자신의 핵심 감정을 해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유진에게 깊은 무력감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에이치조차 정의하지 못한 그 미지의 감각은 어젯밤 브런치 카페에서 강준혁의 손이 닿았을 때, 이마에 그의 입술이 스쳤을 때, 그리고 옆 테이블 커플의 격렬한 다툼을 목격했을 때… 그 모든 감각 정보들이 마치 얽히고설킨 회로처럼 그녀의 뉴런을 자극하며 쉬지 않고 경고음을 울렸다. ‘버그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능인가?’ 유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그 자리가 아직도 얼얼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짧은 순간, 온몸의 신경 세포가 비상 경보를 울리며 그녀의 시스템을 마비시켰다. 그것은 공포도, 혐오도, 심지어 기쁨도 아니었다. 그저… ‘미지의 감각’이었다. 그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데이터. 유진은 그것을 어떤 기존의 프로토콜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중요한 프로그램이 예고 없이 다운된 듯, 그녀의 사고 회로는 한동안 정지된 상태였다. 심장이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뛰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마치 심각한 시스템 오류를 진단하는 개발자처럼 자신의 내부를 면밀히 관찰하려 애썼다.
강준혁의 나른하지만 단호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금 속삭이는 듯했다. ‘감정은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거야. 데이터로는 절대 알 수 없지.’ 그의 말은 그녀의 논리적 세계관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다음 훈련은 좀 더 과감해질 거야. 준비됐어?’ ‘과감해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보다 더 ‘과감한’ 스킨십을 의미하는 걸까? 유진은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세포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피부가 오소소 돋고,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낯선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그 불안감의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나는 것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마치 미지의 버그가 발생한 프로그램에 대한 개발자의 호기심처럼, 그녀는 이 ‘오류’의 근원을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혼란 속에서 그녀의 이성과 감정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강준혁이 제시한 새로운 과제, ‘인간적인 주말 일지’였다. 유진은 자신의 지난 주말 일상을 떠올렸다.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구실 컴퓨터를 켜는 것이었다. 새로운 알고리즘 테스트, 에이치 시스템의 미세한 버그 개선 작업, 그리고 저녁에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해외 논문 자료를 검토했다. 일요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주말은 ‘연구실’이라는 단어 하나로 완벽하게 요약될 수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 영화 관람? 야외 활동? 그런 ‘비효율적인’ 시간 소모는 그녀의 주말 일정표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25년 인생은 오직 효율성과 생산성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에이치, ‘인간적인 주말’의 정의와 일반적인 활동 패턴을 분석해줘.”
유진의 질문에 에이치의 차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분석 결과, ‘인간적인 주말’은 개인의 사회적 상호작용, 여가 활동, 감정적 교류 등을 포함하는 비업무적 시간으로 정의됩니다. 일반적인 활동 패턴으로는 문화생활(영화, 전시), 야외 활동(산책, 운동), 사교 활동(친구, 가족과의 만남), 휴식 등이 있습니다.”
에이치의 목소리는 늘처럼 차분하고 명료했지만, 유진에게는 마치 다른 행성의 언어처럼 들렸다. 그녀의 삶의 궤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개념들이었다.
‘이런 활동들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하라…’ 강준혁의 지시가 뇌리를 스쳤다. 유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데이터화’하고 ‘분석’하는 데는 능숙했지만, 그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는 극도로 서툴렀다. 마치 코드 한 줄 없이 완벽한 프로그램을 짜야 하는 개발자의 막막함과도 같았다.
이 모든 훈련이 뉴런랩의 투자 유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박선우 대표의 간절한 눈빛, 투자 컨설턴트들의 날카로운 지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간미’와 ‘매력’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말은 여전히 그녀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문이었다. 그녀의 논리로는 그들의 요구 사항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기술력이 전부가 아닌가? 수치와 데이터로 증명되는 명확한 성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암호문을 풀어내지 못하면, 그녀의 꿈이자 열정인 뉴런랩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극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마치 거대한 시스템 속의 작은 ‘오류’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명확한 규칙과 패턴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그녀의 내면은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오류’가 자신의 시스템을 완전히 ‘재부팅’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기대감도 함께 찾아왔다. 두려움과 기대, 혼란과 결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진은 다음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한 채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강준혁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려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시스템이 완전히 멈춰버릴까 두려웠다. 동시에, 멈춰버린 줄 알았던 시스템이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도 품었다. 그녀는 강준혁과의 다음 훈련이 두려웠지만,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줄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설렘이 심장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강준혁과의 다음 훈련이 두려웠지만,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줄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설렘이 심장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금요일 저녁, 유진은 일주일 내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마침내 ‘인간적인 주말’ 계획을 수립했다. 에이치가 제안한 활동들을 바탕으로, 그녀는 마치 새로운 프로젝트의 일정표를 짜듯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다. 토요일 오전에는 브런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사회적 상호작용 및 관찰 데이터’를 수집하고, 오후에는 영화를 관람하며 ‘보편적 감정 유발 메커니즘’을 분석하기로 했다. 일요일에는 공원 산책을 통해 ‘자연과의 교감 지수’를 측정하고, 서점을 방문하여 ‘인간적인 교양 데이터’를 축적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토요일 오전, 유진은 어색한 정장 대신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얇은 면 티셔츠에 청바지. 평소라면 연구실에서 입던 낡은 트레이닝복이나, 투자자 미팅을 위한 정갈한 수트가 전부였다. 몸에 닿는 부드러운 면의 감촉이 낯설었고, 헐렁한 핏은 그녀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옷차림부터 ‘인간적인’ 변수를 주입당한 기분이었다.
에이치가 추천한 브런치 카페에 들어서자, 전날 강준혁과 함께 앉았던 창가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고, 손끝에 남아있는 듯한 미세한 온기가 떠올라 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덜그럭거리는 의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주변의 커플들은 여전히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 속삭임, 손짓 하나하나가 유진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문처럼 보였다. 그녀는 스마트 워치를 꺼내들어 ‘관찰 모드’를 활성화했다.
‘10시 32분. 2번 테이블 남성은 여성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남성의 어깨에 기대었다. 신체 접촉의 빈도: 15분당 1회. 감정 표현: 애정, 안정감으로 추정.’
유진은 속으로 분석하며 스마트 워치에 기록했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훑었다. 어떤 커플은 손을 잡고 있었고, 어떤 커플은 서로의 음식을 덜어주었다. 한 남성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여성에게 보여주며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은 유진에게는 마치 고도로 복잡한 알고리즘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들의 행동을 분해하고, 패턴을 찾아내고, 최종적으로 ‘연애 프로토콜’을 해독하려 애썼다.
주문한 아보카도 토스트와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접시 위에는 푸릇한 아보카도와 톡 터지는 방울토마토, 그리고 반숙 계란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코끝을 스쳤지만, 유진은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 영양분 섭취’라는 기능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포크를 움직여 토스트를 잘라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브런치 카페 방문 목적: 사회적 상호작용 및 관찰 데이터 수집. 현재까지 수집된 데이터는 유의미하나, 나의 감정적 개입은 0.001% 미만. 프로토콜 v1.0의 ‘인간적인 매력 최적화’ 항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불명확함.’
유진은 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서는 순간, 강준혁의 나른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감정은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거야.’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라니. 개발자의 세계에서 그런 것은 ‘오류’에 불과했다.
오후에는 영화관을 찾았다. 에이치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추천한 로맨스 영화였다. 멜로 드라마 장르 중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자, 감정선이 깊고 캐릭터 간의 갈등이 명확하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유진은 표를 예매하고 팝콘 대신 생수를 든 채 어두운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달콤한 팝콘 냄새가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지만, 그것은 그저 ‘환경적 변수’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스크린 속 이야기에 몰입했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시작될 때는 여기저기서 풋풋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별 장면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그들의 반응을 보며 스마트 워치에 ‘웃음’, ‘눈물’이라는 감정 키워드를 기록했다. 그녀는 마치 실험실에서 미지의 생명체를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사람들의 감정적 반응 패턴을 분석하려 애썼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는 그녀에게 그저 ‘예측 가능한 스토리 전개’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남녀 주인공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오해로 인해 이별하고, 결국 다시 재회하는 과정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시퀀스 다이어그램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관계 시작, 갈등 발생, 일시적 단절, 재연결.’ 이 모든 것이 효율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유진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안의 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나 젖은 눈가가 남아 있었다.
‘왜 사람들은 이런 비효율적인 활동에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 걸까? 스토리 예측 정확도 95% 이상. 감정적 피드백 없음. 효율성 0%.’ 그녀의 논리 회로는 여전히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인간적인 주말’이라는 프로젝트는 점점 더 복잡하고 난해한 ‘버그’ 투성이처럼 느껴졌다. 외로움이 옅은 안개처럼 그녀를 감쌌지만, 유진은 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 유진은 공원으로 향했다. 맑고 상쾌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자, 전날의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드넓은 잔디밭에는 산책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가족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노인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고,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저들은 왜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걸까? 그들의 행복 지수는 몇 퍼센트일까? 저들의 뇌파는 어떤 패턴을 보일까?’ 그녀는 또다시 데이터 분석 모드에 돌입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러다 문득, 벤치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은 작고 주름져 있었고, 할아버지의 손은 그보다 조금 더 크고 투박했다. 두 손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듯 단단히 깍지 끼고 있었다. 그들의 주름진 손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함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유대감이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은 멀리 떨어진 나무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서로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유진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쿵. 아주 작은 진동. 강준혁의 손길에 폭주했던 심장박동과는 다른, 부드럽고 잔잔한 울림이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지?’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들어 심박수를 확인했다. 평소보다 아주 약간, 정말 미세하게 상승해 있었다. 62bpm에서 65bpm으로. 미미한 변화였지만, ‘연애 알고리즘 오류’ 훈련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몸이 외부 자극 없이 반응한 것이었다. 특정 스킨십이 아닌, 그저 ‘관찰’만으로 발생한 내적인 변화. 유진은 기록했다. ‘노부부의 신체 접촉 관찰 후 심박수 3bpm 상승. 감정 키워드 불명. 정의 불가.’
오후에는 서점을 방문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온갖 종류의 소설과 에세이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책을 고르고, 조용히 읽고, 때로는 작은 메모를 남겼다. 유진은 에이치에게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에이치는 ‘인간 관계의 본질’, ‘사랑과 상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감정의 스펙트럼’ 등의 키워드를 제시하며 몇 권의 책을 추천했다.
수많은 책들 속에서, 그녀는 한 권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흩날리는 벚꽃잎이 그려져 있었고, 제목은 ‘예측 불가능한 너에게’였다. 시인들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난해한 언어였지만, 이상하게도 몇몇 구절들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했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의 집합.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버그.’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유진은 강준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그의 손길…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그 자체였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그녀의 시스템에 예상치 못한 ‘버그’를 심어 놓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의 ‘연애 알고리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시집을 품에 안고 서점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더 시집을 읽었다. 낯선 감정들이 그녀의 내면을 미묘하게 간질였다.
집으로 돌아온 유진은 주말 동안 모아둔 ‘데이터’와 ‘감정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브런치 카페의 어색함, 영화관에서의 무미건조함, 공원에서의 미묘한 동요, 서점에서 느낀 알 수 없는 울림.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인간적인 주말 일지’에 담아내야 할지 막막했다.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비정형 데이터의 홍수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주말이 더 이상 ‘연구실’이라는 단어 하나로 완벽하게 요약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정의하는 데 서툴렀지만, 적어도 감정을 ‘인지’하고 ‘경험’하려는 시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강준혁이라는 ‘변수’가 자신의 시스템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면에서 아주 작은, 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프로그램이 새로운 코드 라인을 받아들여, 이제 막 재시작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 기록들을 강준혁에게 제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묘한 긴장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일요일 밤, 유진은 책상에 앉아 ‘인간적인 주말 일지’의 마지막 장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텅 비어 있던 백지에는 그녀의 어색하고 서툰 문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처음에는 기계적인 관찰 기록에 불과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녀의 내적 갈등과 미묘한 감정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색한 브런치 카페에서 주변 연인들의 행동을 분석하려 했던 시도, 로맨스 영화를 보며 무감각했던 시간, 그리고 공원에서 노부부의 손을 보며 느꼈던 아주 작은 심박수 상승까지. 서점에서 시집을 읽으며 떠올렸던 강준혁의 얼굴은 그 모든 혼란스러운 감각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어설프게나마 기록했다. 마치 버그 마치 버그 리포트를 작성하듯,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기록했다.
‘감정 키워드: 정의 불가. 하지만… 존재함. 시스템 오류로 판단되었으나, 동시에 새로운 기능 활성화 가능성 관찰됨.’ 유진은 마지막 문장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펜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일지를 덮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녀는 ‘인간적인’ 활동을 인위적으로 시뮬레이션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의 시스템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녀는 이제 감정이 단순히 ‘데이터’나 ‘프로토콜’로 설명될 수 없는, 살아있는 ‘변수’라는 것을 어렴풋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개발한 에이치조차도 감지하지 못했던 영역이었다.
문득, 고요한 방 안에 스마트폰의 진동 소리가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자 박선우 대표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유진아, 주말 잘 보냈어? 많이 피곤했지?” 선우의 목소리는 늘처럼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긴장감과 투자 유치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유진은 그 뉘앙스를 재빨리 감지했다.
“네, 선배. 주말 동안… 새로운 데이터들을 많이 수집했습니다.” 유진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건조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 그래? 다행이다. 다음 주에 투자 컨설턴트들이랑 미팅이 잡혔는데… 진행 상황 좀 공유해줄 수 있을까? 강준혁 씨와의 훈련은… 잘 되고 있는 거지?” 선우는 ‘잘 되고 있는 거지’라는 말에 힘주어 물었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잘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잘 되고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쉽게 ‘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스템은 ‘오류’ 투성이였고, 그녀의 감정은 통제 불능 상태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 ‘오류’가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 최적화’에 기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혼란스러운 감각들이야말로 투자 컨설턴트들이 말하는 ‘인간적인 매력’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네, 선배. 훈련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음 주 미팅 전에 제가 정리해서 보고드릴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진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담고 있지 않았다. 마치 확신에 찬 개발자가 시스템의 버그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전화를 끊자, 방 안에는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유진의 내면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강준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나른한 눈빛, 유려한 미소,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닿았던 그의 입술의 감촉. 모든 것이 생생하게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다음 훈련은 좀 더 과감해질 거야. 준비됐어?’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과감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길수록, 유진의 심장은 다시금 통제 불능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는 이제 더 이상 ‘오류’의 경고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프로그램을 로드하기 직전의 CPU 팬 소리처럼, 더 빠르고, 더 강렬하게 회전하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소리였다.
불안감과 함께, 그녀는 알 수 없는 강렬한 기대감에 휩싸였다. 마치 미지의 코드를 디버깅하기 직전의 개발자처럼, 그녀는 이 ‘버그’의 근원을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버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끝에 도달하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 별들이 마치 복잡한 알고리즘의 패턴처럼 보였다. 수많은 점들이 연결되고, 또 다른 점들과 상호작용하며 거대한 우주를 이루는 모습.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패턴 너머에 존재하는 예측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바깥의 밤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강준혁과의 계약서 조항들을 떠올렸다. ‘비즈니스 관계’, ‘감정적 개입 배제’, ‘인간적인 매력 최적화’. 처음에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프로토콜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조항들이 마치 낡은 코드처럼 느껴졌다. 시스템 업데이트 과정에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혹은 새로운 기능과 충돌을 일으키는 구시대적인 명령어들. 그녀의 시스템은 이미 ‘감정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변수는 그녀의 모든 논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텅 빈 공간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마치 데이터 비트처럼 느껴졌다.
유진은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벗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에이치에게 의존해 감정을 분석하고 정의하려 했던 이전의 자신과는 달리, 이제 그녀는 스스로 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설렘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게이트가 열린 것처럼, 그녀의 시야는 확장되고 있었다.
“그래, 준비됐어.” 유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녀는 다음 훈련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알 수 없는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시스템은 이제 완전히 ‘재부팅’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 재부팅의 과정은 그녀의 삶을, 그리고 그녀의 ‘연애 알고리즘’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다음 훈련을 기다리는 자신의 심장이, 이제는 ‘오류’가 아닌 ‘기대’로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후, 그녀는 강준혁의 연락처를 찾았다. ‘준비됐습니다, 준혁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발신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심장은 새로운 알고리즘을 받아들인 듯 힘차게 고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