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끈적한 물이 몸을 감쌌다. 더스트 벨트의 하수 시스템은 거대한 지하 강과 같았다. 폐기물이 뒤섞인 탁한 물은 악취를 풍기며 거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낡고 부식된 파이프와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를 맹렬히 흘러갔다. 한서진은 거대한 배수구 안으로 몸을 던지자마자, 강한 물살에 휩쓸려 나선형으로 곤두박질쳤다. 폐허 같은 지하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함에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훅 하고 폐 깊숙이 스며드는 썩은 물의 역겨운 냄새가 순간적으로 그의 정신을 마비시켰다.
그가 제이드에게 보낸 긴급 메시지는 끝내 답이 없었지만, 제이드는 그의 다음 수를 예상하고 있었다. 메모리움의 추격망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는 더스트 벨트의 지하 네트워크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서진이 몸을 던진 배수구 입구 너머에서, 그의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내뿜는 미세한 파동을 간신히 추적해왔다. 서진이 거친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는 순간, 그녀 또한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화려한 사이버네틱스 문신이 새겨진 그녀의 팔 위로 흙탕물이 거칠게 스며들었다.
"크흑, 서진! 정신 차려!"
뒤따라 물속으로 뛰어든 제이드가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그녀 역시 거친 물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휩쓸리는 중이었다. 화려한 사이버네틱스 문신이 새겨진 그녀의 팔이 서진을 향해 필사적으로 뻗어졌다. 서진은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간신히 한쪽 팔을 뻗어 제이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물속에서도 느껴지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은 놀랍도록 단단했다.
"괜찮아?"
서진은 짧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소리에 묻히기 쉬웠지만, 제이드는 그의 입술 모양과 임플란트의 희미한 푸른빛으로 그의 말을 읽어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고통과 동시에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이 정도 가지고 죽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저 아래는 더 위험할 거야!"
제이드가 외쳤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스캔하는 듯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녀의 말대로, 물살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썩은 물에 뒤섞인 부유물들이 사납게 부딪치며 피부를 스쳤다. 서진의 왼쪽 눈에 박힌 낡은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격렬하게 깜빡였다. 푸른빛이 빠르게 붉은빛으로 변하며 비상 경고를 알렸다. 위험이 감지되고 있었다. 바로 그들 뒤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크였다.
‘벌써 여기까지 왔나.’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아크의 존재는 그의 임플란트가 감지하는 어떤 위협보다도 강력했다. 단순한 메모리움 요원이 아니었다. 그는 이 지하 미궁의 환경 자체를 거스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서진의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가 장착된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는 물속에서도 네트워크 파동을 감지하려 애썼지만, 이 깊은 지하에서는 통신망 자체가 극도로 불안정했다.
"젠장, 저놈은 인간이 아니야!"
제이드가 뒤를 돌아보며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물살을 뚫고 희미하게 보이는 아크의 검은 강화 슈트와 붉은 임플란트 빛은 마치 심해의 포식자 같았다. 그의 거대한 체구는 물의 저항을 무시하는 듯 빠르고 강력한 움직임을 보였다. 아크의 손에 들린 기억 추출 장치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것은 서진의 뇌리를 스치는 망자의 기억과 H-S-J-7-9-E-C-4-F 코드를 떠올리게 했다.
서진은 제이드의 손목을 더 단단히 잡았다.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갈증과 진실을 향한 집착이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었다. 그 코드가 무엇이든, 그의 과거가 무엇이든, 그는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그의 심장이 거친 물살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폐 깊숙이 스며든 썩은 물의 역겨운 냄새도,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싸는 불쾌함도, 끈질긴 추격의 공포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어떤 강단이 깨어나는 듯했다.
"저쪽으로."
서진은 몸을 틀어 거대한 배수구 벽에 붙어 있는 낡은 철제 사다리를 가리켰다. 사다리는 녹슬고 부식되어 있었지만, 이대로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물살이 잠시 약해지는 틈을 타, 서진은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 사다리로 향했다. 마른 체구였지만 그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단단했다. 제이드도 서진을 따라 재빨리 사다리로 몸을 옮겼다. 철제 사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들의 무게를 겨우 지탱했다.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오직 서진의 임플란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만이 길을 비췄다. 사다리의 끝은 더욱 좁고 어두운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은 마치 거대한 동물의 내장 속 같았다. 천장에서는 끈적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어… 여긴 대체 어디지?"
제이드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녀의 화려한 홀로그램 액세서리는 흙탕물에 젖어 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서진은 말없이 낡은 통신 단말기를 꺼내 들었지만,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주변 네트워크의 미세한 파동조차 감지되지 않는 완전한 고립 공간이었다. 그의 임플란트는 여전히 아크의 존재를 경고하며 붉게 깜빡였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미지의 파동을 감지하는 듯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추격자만의 위협이 아니었다. 이 지하 미궁 자체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밑의 끈적한 진흙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고, 공기 중에는 쇠와 썩은 유기물의 불쾌한 혼합된 냄새가 맴돌았다. 서진의 귀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물소리와 함께, 무언가 기어 다니는 듯한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서진은 낡은 통신 단말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낀 손으로 주변 벽을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과 축축한 콘크리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이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예리하게 빛났다.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주저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제이드는 그런 서진의 뒷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연대감과 동시에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 미지의 지하 세계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깊고 위험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통로를 따라 몇 발자국 더 나아갔을 때, 갑자기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그것은 인위적인 빛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서진의 임플란트가 더욱 격렬하게 경고하며 붉은빛을 발산했다.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빛은 분명 어떠한 장치가 내는 것이었지만, 그의 임플란트가 감지하는 파동은 이전과는 다른, 더욱 강력하고 불안정한 무엇이었다. 그 빛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 다른 위험인가? 아니면 진실의 실마리인가? 서진은 숨을 멈추고 빛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차가운 물이 서진의 몸을 에워쌌다. 썩어가는 금속과 흙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부패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발아래로는 미끄러운 이끼와 미끈거리는 침전물이 느껴졌다. 거대한 배수구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고, 멀리서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만이 불쾌한 잔향처럼 울렸다. 서진은 낡은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는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불안정한 미세 전류가 망막을 자극하며 어둠 속의 흐릿한 윤곽을 더듬었다.
"젠장, 여기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야." 제이드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물소리에 묻히기 쉬울 만큼 작았다. 그녀는 입을 가린채로 고개를 저었다. 낡은 방독면을 꺼내 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듯했다. 서진은 말없이 앞만 바라봤다. 그의 낡은 후드티는 이미 축축한 물에 절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박힌 왼쪽 눈은 푸른빛을 더욱 강하게 깜빡이며 주변 네트워크의 미세한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지하 미로는 오래전 버려진 시스템으로 가득했다. 죽은 통신선, 부식된 센서, 그리고 기억의 파편처럼 흩어진 전자기 신호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의 임플란트는 그 모든 불협화음 속에서 미세한 떨림을 포착했다. 익숙한, 그리고 불길한 파동. 아크였다.
뒤쪽에서 물을 헤치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메모리움 요원들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둔중하고 일정한, 기계적인 움직임이 수면을 갈랐다. 서진은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제이드를 돌아봤다. 제이드는 눈을 크게 뜨고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가 역력했지만, 이내 결연한 빛이 스쳤다.
"젠장, 저놈은 인간이 아니야!" 제이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녀의 손은 이미 낡은 통신 단말기를 꽉 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 키보드를 두드리듯 공중을 휘저었다. 주변의 부식된 배관에 붙어있던 오래된 센서들이 갑자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규칙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센서들이 내뿜는 미세한 전자기 노이즈가 주변을 뒤덮었다. 일종의 전자 교란이었다.
"시간을 벌어줄게!" 제이드가 소리쳤다. "하지만 오래 못 가! 저놈의 방어 시스템은 미쳤어!"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아크는 단순한 요원이 아니었다. 그는 거대한 기업, 메모리움의 의지를 구현한 존재였다. 그의 슈트는 서진의 신경망 조작을 일시적으로 지연시켰을 뿐, 완전히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서진은 물길을 따라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그의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파동을 감지하며 경고음을 내보냈다.
그들은 이끼 낀 벽을 따라 구부러진 통로로 접어들었다. 물은 더욱 깊어졌고, 미끄러운 바닥은 발걸음을 위태롭게 했다. 서진은 한 손으로 제이드를 잡고 이끌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흔들릴 때마다 서진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지탱했다. 그들의 위로, 오래된 강철 구조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녹슨 파이프와 찢어진 케이블들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내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서진?" 제이드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더 깊이. 메모리움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는 곳까지." 서진은 짧게 대답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빛났다.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갈증, 그리고 그 코드가 품고 있는 진실에 대한 집착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H-S-J-7-9-E-C-4-F. 그 코드는 그의 존재 이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서진의 임플란트가 맹렬하게 진동했다. 단순한 경고음이 아니었다. 강력한 전자기 충격이 그의 뇌신경을 강타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크가 근접했다. 그는 제이드의 전자 교란망을 뚫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진, 왼쪽!" 제이드가 외쳤다.
서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크였다. 그의 강화 슈트는 물살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접근했다. 아크의 손에 든 기억 추출 장치에서 푸른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서진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의 임플란트가 폭주하듯 격렬하게 경고하며 붉은빛을 뿜어냈다.
아크의 기계적인 음성이 배수구에 울려 퍼졌다. "멈춰라, 기억 스캐빈저. 더 이상의 탐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거대한 손이 서진을 향해 뻗어왔다. 강화된 손아귀는 강철도 부술 듯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진은 빠르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물이 크게 첨벙이며 튀어 올랐다. 그는 제이드에게 손짓했다. 제이드는 이미 다음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통신 단말기가 빠르게 깜빡였다.
"이건 어때, 기계 덩어리!" 제이드가 외쳤다.
그녀의 해킹 명령과 동시에, 그들이 지나왔던 통로의 낡은 격벽 하나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부식된 금속 파편과 거대한 잔해들이 물속으로 쏟아져 내리며 아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살이 격벽의 잔해에 부딪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흙탕물과 파편들로 뒤덮였다.
아크는 잠시 휘청거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곧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잔해들을 밀어내며 다시 전진했다. 그에게 방해물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강화 슈트는 어떠한 충격도 흡수하는 듯 완벽해 보였다. 서진은 그의 집요함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저놈은 벽도 부술 기세야!" 제이드가 이를 갈았다.
서진은 시간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의 임플란트가 끊임없이 주변 네트워크를 스캔했다. 배수구 벽면에 박혀 있는 오래된 제어 패널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의 신경 인터페이스는 미약한 잔류 전자기력을 감지했다. 희망은 있었다.
그는 제이드에게 눈짓하며 패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제이드는 즉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패널에 도달했다. 부식된 금속 패널은 녹과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서진은 손가락에 끼워진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패널의 잔류 포트에 연결했다. 차가운 금속이 그의 손끝에 닿자 미세한 전류가 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눈앞의 디지털 정보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폐쇄된 배수 시스템, 낡은 수압 제어 장치, 그리고 거대한 물탱크로 연결되는 비상 통로. 이 모든 정보가 그의 망막에 번개처럼 스쳤다. 그는 과거의 시스템 구조를 빠르게 분석했다. 이 배수구는 더스트 벨트 전체의 물을 제어하는 핵심 통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많았다.
"서진, 빨리!" 제이드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아크의 그림자가 다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억 추출 장치의 푸른빛이 서진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임플란트가 이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경고음을 냈다. 뇌가 타는 듯한 뜨거움과 함께, 그의 과거가 한순간 섬광처럼 스쳤다. 어렴풋한 이미지, 하지만 선명한 위협이 그를 덮쳤다.
서진은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인터페이스를 조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 코드들을 춤추듯 입력했다. 낡은 시스템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고대 컴퓨터가 깨어나는 듯한 굉음이 지하 세계를 뒤흔들었다. 먼 곳에서부터 거대한 수압이 상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수구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비상 배수구… 개방!" 서진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이 서 있던 발밑에서 거대한 물살이 솟구쳐 올랐다. 낡은 격벽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져 나갔다. 강력한 수압이 배수구 전체를 휩쓸었다. 아크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거대한 물살에 그대로 휩쓸려 뒤로 밀려났다. 그의 기계적인 몸체가 통제 불능 상태로 물속을 구르기 시작했다.
서진은 제이드와 함께 물살에 몸을 맡겼다. 그들은 통제 불능의 물살에 휩쓸려 미지의 통로로 빨려 들어갔다. 차가운 물속에서 몸이 회전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그들은 급류에 실려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이동했다. 거대한 물살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크와의 거리가 잠시나마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물살이 약해지는 곳으로 겨우 몸을 가눴을 때, 그들은 기이한 공간에 도달했다. 거대한 동굴처럼 펼쳐진 지하 공동이었다. 물은 이곳에서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있었고, 그 수면 위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빛의 근원은 저 멀리,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복잡한 회로도처럼 얽힌 문양의 중심에서, 흐릿하게 빛나는 홀로그램 패널이 떠올랐다.
서진의 임플란트가 다시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번에는 경고음이 아니었다. 어떤 끌어당김, 강렬한 이끌림이었다. 그의 뇌신경이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파동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H-S-J-7-9-E-C-4-F 코드가 다시 한번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문양이 그 코드를 해독하기 위한 열쇠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뭐야?" 제이드가 경외심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홀로그램 패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패널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서진의 임플란트가 다시 한번 맹렬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이번에는 차가운 살의가 담긴 경고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급류가 흘러들어오는 통로 저편에서, 검은 강화 슈트를 입은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크였다. 그는 잔해와 물살을 뚫고 끈질기게 추격해 온 것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기억 추출 장치는 푸른빛을 더욱 강하게 빛내며,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기억을 집어삼킬 듯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아크의 기계적인 시선은 홀로그램 패널과 그 앞에 선 서진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는 마치 오래된 비밀의 수호자처럼 보였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기억 스캐빈저." 아크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동 전체를 울렸다. "저곳은 네가 감히 손대서는 안 될 영역이다."
서진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그 홀로그램 패널. 저 문양. 그리고 그 안에서 감지되는 H-S-J-7-9-E-C-4-F 코드와의 강렬한 공명. 진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아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쥐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마주할 것인가. 그의 눈은 불타는 듯한 결의로 빛났다. 그는 잃어버린 과거를 향한 마지막 계단에 서 있었다. 그 계단은 지금, 아크라는 이름의 거대한 장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 계단은 지금, 아크라는 이름의 거대한 장벽으로 막혀 있었다.
서진의 푸른 사이버네틱스 눈이 아크의 기계적인 마스크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물러선다면, 그는 영원히 과거에 갇힐 것이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갈증이 그의 신경망을 뒤흔들었다. 이 코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이었다.
"물러서라, 기억 스캐빈저." 아크의 차가운 금속성 음성이 공동의 습한 공기를 갈랐다. 그의 강화 슈트에서 미세한 전기음이 울렸다. “네놈이 감히 손댈 수 있는 진실은 없다.”
아크의 거대한 몸체가 홀로그램 패널의 입구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그의 사이버네틱스 강화 슈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서진의 뺨을 스쳤다. 마치 이곳의 모든 공기가 아크의 존재에 의해 얼어붙은 듯했다. 서진의 푸른 눈동자에서 미세한 데이터 스트림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의 신경 인터페이스는 이미 주변 네트워크를 훑으며 약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크의 슈트는 단순한 방어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방화벽이자, 모든 침입 시도를 즉시 감지하고 차단하는 거대한 시스템 그 자체였다.
"메모리움의 기밀은 기억 관리국 외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 아크의 목소리는 마치 녹슨 기계음처럼 들렸다. 그의 오른팔에 장착된 기억 추출 장치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깜빡였다. "네놈의 어설픈 해킹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서진은 아크의 말에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비틀었다. 어설픈 해킹? 그의 해킹 실력은 더스트 벨트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무기였다. 그는 수많은 망자의 기억 속에서 길을 찾아냈고, 보안 프로토콜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능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아크는 차원이 다른 벽이었다. 단순한 요원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요새였다.
서진의 푸른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위험 신호였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경고음은 아크의 존재가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 ‘절대적인 위협’임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갈증이 그를 제자리에 붙잡았다. 이 코드는. H-S-J-7-9-E-C-4-F. 그것은 그의 존재를 관통하는 핵심이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 위에서 번개처럼 움직였다. 서진은 아크의 슈트를 직접 해킹하는 대신, 주변에 연결된 더스트 벨트 지하 네트워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폐쇄된 공동에 설치된 낡은 환풍기, 전력 공급 라인, 심지어 천장의 배수관까지. 모든 것이 그의 손끝에서 하나의 도구로 변모했다.
‘지연 전력 과부하, 이더넷 통신망 교란, 음파 진동 주파수 불일치….’
서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데이터를 분석하고 명령을 내렸다. 공중에 퍼져 있던 습한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짓눌리는 듯한 압력을 풍겼다. 천장의 낡은 전등이 지지직거리며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잠시 후, 공동 전체를 울리던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불협화음으로 변하더니, 이내 고주파의 날카로운 소음으로 변해 서진의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공동 내부의 모든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일그러지고 왜곡되기 시작했다.
아크의 사이버네틱스 마스크 아래에서 감지될 리 없는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의 기계적인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무의미한 짓이다, 기억 스캐빈저."
아크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거대한 발걸음이 돌바닥을 울렸다. 그는 서진의 교란 공격이 자신의 신경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일으킨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해 경고하는 듯했다. 서진의 공격은 아크 자체의 시스템을 뚫지 못했지만, 주변 환경을 혼란시켜 시야와 청각을 마비시키려는 의도였다.
서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휘젓자, 공동 입구에 쌓여 있던 낡은 금속 파편들이 자기장의 영향을 받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는 파편들을 아크에게 던지는 동시에, 몸을 낮춰 아크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 쇄도했다. 파편들은 아크의 강화 슈트에 부딪혀 팅, 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그의 슈트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아크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찰나의 순간에 몸을 회전시켜 서진의 진입을 막았다. 그의 강화된 팔이 마치 강철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서진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거대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제대로 맞았다면 머리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젠장, 너무 빨라!’
서진의 임플란트가 더욱 격렬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아크는 단순히 힘만 센 것이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은 완벽하게 계산된, 오차 없는 기계 그 자체였다. 서진은 아크의 팔 아래로 파고들며 그의 품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아크의 슈트 허리춤에 연결된 전력 공급 포트를 노렸다. 그는 그곳에 자신의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직접 연결하려 했다. 슈트 내부 시스템에 직접 침투하는 가장 무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크는 이미 그의 의도를 간파한 듯했다. 아크의 강화 슈트 표면에서 갑자기 보라색 섬광이 터져 나오며 강력한 전류가 흘러나왔다. 서진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전류가 그의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크윽!"
서진의 몸이 경련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오작동하며 푸른빛 대신 붉은빛을 깜빡였다.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이 그의 뇌를 마비시켰다. 그는 잠시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크는 서진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기계적인 마스크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경고했다, 기억 스캐빈저. 네놈이 감히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크는 천천히 서진에게 다가섰다. 그의 오른팔에 장착된 기억 추출 장치가 서진을 향해 정렬되었다. 푸른빛이 더욱 섬뜩하게 번뜩였다. 서진은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전류 충격으로 인해 몸의 모든 신경이 마비된 듯했다. 그의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지만, 아크의 그림자가 점점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네놈의 잃어버린 기억은, 메모리움의 보안 프로토콜 속에 영원히 봉인되어야 할 진실이다."
아크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기억 추출 장치의 작동 버튼을 눌렀다. 장치에서 강력한 에너지 파동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진의 뇌 속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의 연결망을 끊어내고, H-S-J-7-9-E-C-4-F 코드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삭제하려는 시도였다.
서진의 눈앞에 마지막 순간처럼 H-S-J-7-9-E-C-4-F 코드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과거의 단편,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낡은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에서,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푸른빛이 그의 눈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각성한 듯한, 원초적인 에너지의 분출이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H-S-J-7-9-E-C-4-F 코드가 강렬하게 반응하며 그의 신경망 깊은 곳에서 울렸다.
아크의 기억 추출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던 에너지 파동이 갑자기 멈칫했다. 그의 마스크 아래에서 미세한 시스템 오류 경고음이 울렸다. 아크의 기계적인 시선이 서진의 푸른 눈, 그리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에너지 파동에 고정되었다.
"이것은…!"
아크의 차가운 음성에 한 줄기 당혹감이 스쳤다. 메모리움의 기록 어디에도 이런 현상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서진의 몸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푸른빛은, 아크의 모든 시스템을 단번에 교란시키는 듯했다. 그것은 기억을 추출하는 대신, 오히려 기억을 ‘방출’하는 듯한, 거대한 폭풍의 전조였다.
서진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이 생소한 에너지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H-S-J-7-9-E-C-4-F 코드가 자신의 존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임을 직감했다.
그때, 아크의 강화 슈트 표면에서 억제할 수 없는 균열이 번개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보라색 섬광이 폭주하며 아크의 전신을 감쌌다. 그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더니,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크의 슈트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듯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서진의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 빛은 공동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뿜어져 나왔고, 홀로그램 패널의 문양까지 뒤흔들었다. 아크는 처음으로 당황한 듯, 그의 강화 슈트가 뿜어내는 섬광 속에서 서진을 응시했다.
"기억 스캐빈저… 네놈의 기억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거지?"
아크의 질문은 메아리처럼 공동을 울렸다. 동시에, 홀로그램 패널 깊숙한 곳에서, H-S-J-7-9-E-C-4-F 코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거대한 문양이 눈을 뜨듯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문양의 중심에서, 또 다른,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가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잊혀진 과거가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는 듯한, 강렬하고 위험한 기운이었다.
서진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깨달았다. H-S-J-7-9-E-C-4-F 코드는 단순한 열쇠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본질 그 자체이자, 거대한 진실의 문을 열기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그 문은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열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