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지만, 심장은 격렬하게 울렸다. 낡은 후드티 아래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더스트 벨트의 골목은 언제나처럼 악취와 습기로 가득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본 코드 조각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H-S-J-7-9-E-C-4-F.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메모리움의 그림자.
서진은 자신이 무언가 거대한 장난감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누군가 기억의 조각을 뿌려놓고, 자신이 그것을 줍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그 장난감은 위험하게 기울어졌다. 그가 잃어버린 과거는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기업, 메모리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비밀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잊고 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차가운 금속음, 희미한 빛,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그것들은 마치 조각난 거울처럼 그의 과거를 비추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단지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향한 처절한 갈증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위험한 법. 특히 메모리움과 얽힌 진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박힌 눈을 감았다. 감시망에 포착된 이상, 더 이상 혼자서는 이 거대한 그림자와 싸울 수 없었다. 그에게는 정보가 필요했다. 네오-서울의 가장 깊은 곳까지 뻗어 있는 정보의 거미줄, 그 중심에 있는 인물. 제이드.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이드의 은신처는 이 더스트 벨트의 가장 복잡한 미로 속에 숨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희미하게 발하는 그의 임플란트가 길을 비추는 듯했다. 추격의 시작은 곧 진실을 향한 그의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 도망치면서도,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기꺼이 불꽃 속으로 뛰어들 각오를 다졌다. 도시의 밤은 그의 결심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서진은 좁은 골목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낡은 배수관에서 흘러나오는 퀴퀴한 물이 그의 낡은 부츠에 튀었다. 머리 위로는 수십 층짜리 건물들의 그림자가 거대한 벽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 벽면에는 네오-서울 상층부의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들이 끊임없이 번쩍였다. 웃고 있는 미녀의 얼굴, 최신형 사이버네틱스 의수, 그리고 기억 증진제 광고. 그 빛은 더스트 벨트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허름한 노점상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불법 사이버네틱스 시술을 위한 부품들이 쌓여 있는 상점, 정체불명의 음식물을 파는 포장마차, 그리고 기억을 암거래하는 자들의 은밀한 속삭임이 뒤섞여 혼돈의 교향곡을 이루었다. 서진은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제이드의 은신처로 향하는 길과, 혹시 모를 추격자의 기척을 감지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한쪽 눈의 임플란트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단순히 시각 보조 장치가 아니었다. 주변 네트워크의 미세한 파동을 감지하고, 잠재적인 위협을 경고하는 기능도 있었다. 지금, 임플란트의 떨림은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누군가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메모리움의 감시망이 그를 완전히 포착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망자의 기억 속에서 발견된 코드 하나 때문에 이토록 빠르고 집요하게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그 코드 자체가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던 것인가?
서진은 낡은 통신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외부 네트워크와 완벽히 단절된 자신의 작업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빠르게 제이드에게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간결했다. ‘긴급. H-S-J-7-9-E-C-4-F. 메모리움. 지금 당장.’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제이드는 항상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지만, 이런 긴급 상황에서는 빠르게 응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녀가 이미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녀 역시 메모리움의 감시망에 걸린 것일까? 서진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제이드는 단순한 정보 브로커가 아니었다. 그녀는 더스트 벨트에서 유일하게 서진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폐쇄된 지하철역 입구를 발견했다. 녹슨 철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더스트 벨트 지하에 펼쳐진 거대한 네트워크의 입구 중 하나였다. 불법 사이버네틱스 시술소, 기억 암시장, 그리고 각종 범죄 조직들의 은신처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곳. 제이드의 주된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서진은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홀로그램 광고의 빛은 희미해졌다. 대신, 곳곳에 설치된 불법 네트워크 중계기들이 붉은 빛을 깜빡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벽면에는 그래피티와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뒤섞여 그려져 있었다. 이곳은 상층부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무법의 공간이었다.
그는 낡은 터널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발소리가 축축한 콘크리트 바닥에 울려 퍼졌다. 터널 중간쯤, 낡은 환풍구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제이드의 은신처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늘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두었다.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위장된 곳.
환풍구 앞에 도착한 서진은 잠시 멈춰 섰다. 임플란트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경고 신호. 누군가 주변에 있었다. 그는 몸을 벽에 바싹 붙이고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최소 두세 명. 그들은 서진을 추적해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서진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정면으로 돌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전투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의 강점은 정보와 기술, 그리고 은밀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제한된 상황이었다.
그는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가 끼워진 손가락으로 벽면의 낡은 배전반을 더듬었다. 더스트 벨트의 모든 시설물은 낡고 허술했지만, 그 틈새를 파고드는 데는 오히려 유리했다. 그는 능숙하게 배전반을 열고 내부 회로에 손을 댔다. 푸른빛이 그의 손끝에서 흐르며 회로와 연결되었다. 임플란트의 떨림이 더욱 강렬해졌다.
"젠장, 너무 빠르잖아."
그는 낮게 읊조렸다. 메모리움의 추격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들이 그를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코드가 그들에게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진은 빠르게 주변 네트워크를 스캔했다. 다행히 제이드의 은신처는 아직 노출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배전반의 전력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 구역의 모든 전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시간을 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 둘, 셋…."
그가 숫자를 세는 순간, 터널 안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동시에 추격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당황한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서진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환풍구 안으로 몸을 던졌다. 좁고 녹슨 통로가 그의 몸을 긁었지만, 그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통로를 기어가던 서진은 문득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이드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누군가와 격렬하게 논쟁하고 있는 듯했다.
"그건 불가능해! 이 거래는 성사될 수 없어!"
"네오-서울 최고의 정보 브로커가 이 정도도 못 한다니. 실망이군, 제이드."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 서진의 임플란트가 더욱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 목소리는, 망자의 기억 속에서 봤던 검은 강화 슈트의 남자, 아크의 목소리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그들이 제이드에게 먼저 접근한 것인가?
서진은 통로 끝에 다다랐다. 환풍구 덮개를 살짝 열자, 아래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이드의 은신처는 폐쇄된 상점의 뒷방을 개조한 곳이었다. 벽면에는 수많은 모니터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홀로그램 키보드가 공중에 떠 있었다. 제이드는 모니터들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화려한 사이버네틱스 문신이 푸른빛을 발하며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평범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만은 아크와 다를 바 없었다. 메모리움의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제이드에게 어떤 정보를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가진 모든 정보를 넘겨라. 특히 최근 접촉한 '기억 스캐빈저'에 대한 모든 것을."
요원 중 한 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들이 이미 제이드를 통해 자신에게 접근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망자의 기억 속 코드뿐만 아니라, 서진의 존재 자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제이드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메모리움이 이제 뒷골목 정보 브로커까지 찾아다닐 정도로 한가해졌나? 내가 아는 정보는 없어.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공짜로 넘겨줄 리 없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능글맞음이 섞여 있었지만, 눈빛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제이드. 협력하면 네 목숨은 보장될 것이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더스트 벨트에서 네 흔적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다른 요원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전기 스파크가 튀었다. 기억 추출 장치였다. 강제로 기억을 뽑아내려는 듯했다.
제이드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이 서진이 숨어 있는 환풍구 쪽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서진의 존재를 눈치챈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시선이었을까?
서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환풍구 덮개를 완전히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철제 덮개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요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진에게로 향했다. 제이드의 눈이 놀라움과 동시에 안도감으로 빛났다.
"서진!"
제이드가 외쳤다. 요원들은 즉시 자세를 잡고 서진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들의 총구는 사이버네틱스 신경망을 마비시키는 특수 탄환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억 스캐빈저, 한서진. 순순히 항복하면 고통 없이 끝내주겠다."
요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서진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항복?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서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신경 인터페이스 장비를 통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요원들의 신경망에 침투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메모리움 요원들의 방어 시스템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잠깐의 지연은 있었지만, 그들의 시스템은 곧 서진의 공격을 차단했다.
"제이드, 준비해!"
서진이 외쳤다. 제이드는 이미 책상 아래에서 소형 해킹 장치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주변 네트워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요원들이 총을 발사했다. 마비탄이 서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서진은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하고, 동시에 주변의 모니터들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모니터들이 깨지면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야가 혼란스러워지는 틈을 타, 제이드는 은신처의 비상 탈출구를 열었다.
"이쪽이야, 서진!"
제이드가 소리쳤다. 비상 탈출구는 좁은 지하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서진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제이드가 그 뒤를 따랐다. 요원들은 비상 탈출구로 향하는 그들을 향해 계속해서 총을 발사했다.
"놓치지 마라! 반드시 생포한다!"
요원들의 다급한 외침이 뒤따랐다. 서진과 제이드는 좁은 통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요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추격은 끈질겼다.
"젠장, 메모리움 놈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제이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코드가… 그만큼 중요한가 봐."
서진의 목소리에도 긴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임플란트가 끊임없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그들의 뒤를 쫓는 요원들 외에, 또 다른 강력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크였다. 그는 서진의 임플란트가 감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위협이었다.
그들은 통로 끝에서 낡은 지하 배수구와 마주했다. 거대한 배수구는 더스트 벨트의 하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었다. 썩은 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쪽으로 가면… 네오-서울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갈 수 있어."
제이드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좋아. 계속 가자."
서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배수구 안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뒤에서는 메모리움 요원들의 그림자가 배수구 입구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검은 강화 슈트를 입은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계적인 마스크에 덮인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아크였다.
아크의 사이버네틱스 임플란트가 붉은 빛을 뿜어냈다. 그는 서진이 뛰어든 배수구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기억 스캐빈저, 한서진. 네가 감히 메모리움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아크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배수구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네놈의 잃어버린 기억은, 영원히 묻혀 있어야 할 진실이다."
그는 손에 든 기억 추출 장치를 들어 올렸다. 푸른빛이 장치에서 뿜어져 나왔다.
"결코… 네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아크는 망설임 없이 배수구 안으로 뛰어들었다. 물이 거세게 튀었다. 더스트 벨트의 지하 깊은 곳에서, 기억을 둘러싼 추격전이 막 시작된 것이다. 서진은 차가운 물속을 헤치며 달렸다. 그의 잃어버린 기억이, 그리고 그 기억이 품고 있는 진실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그는 멈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