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루한 아침을 맞았다. 눅눅한 지하철 냄새, 빽빽한 인파 속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출근길에 올랐다. 서울의 빌딩 숲은 언제나 그를 압도했지만, 스물아홉의 김현수에게는 그저 월급을 벌어 살아가는 익숙한 배경일 뿐이었다. 한빛 기획, 그의 직장이자 그의 평범한 삶의 중심. 대단한 꿈도 야망도 없이, 그저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것이 그의 모토였다.
"후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키보드 소리, 전화벨 소리, 믹스커피 냄새.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현수 씨, 좋은 아침!"
명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박선영 대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늘 수수하고 단정한 차림을 고수하던 박 대리가 오늘은 어깨에 명품 로고가 선명한 백을 메고 있었다. 손목에는 번쩍이는 금시계, 손가락에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마치 드라마 속 재벌 2세처럼 화려했다.
"어... 박 대리님도 좋은 아침입니다."
현수는 얼떨떨하게 인사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박선영 대리는 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침없이 휴대폰을 꺼내 주식 앱을 실행했다. 화면에는 빨간색 상승 그래프가 가득했다.
"어때요, 현수 씨? 제가 지난번에 말했죠? 그 주식 대박 날 거라고. 회귀 특전 제대로 누리는 중이에요, 후훗."
회귀 특전? 현수는 멍하니 박선영을 바라봤다. 방금 들은 말이 한국어는 맞는 것 같은데, 뇌가 단어들을 조합하길 거부했다. 특전? 회귀? 무슨 게임 용어인가? 박 대리가 갑자기 웬 게임에 빠진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박 대리님, 혹시 무슨 게임하세요?"
현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박선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게임이요? 아, 현수 씨는 아직 잘 모르시는구나. 뭐,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아니, 이미 알고 계시려나? 아무튼, 저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 청산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겁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무실 한가운데서 양팔을 활짝 펼쳤다.
"모두들! 저 박선영, 드디어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동료들은 박선영의 기행에 놀라는 대신, 몇몇은 박수를 치고, 몇몇은 "크으, 역시 회귀자 누님!" 같은 말을 내뱉으며 축하를 건넸다. 심지어 김 부장은 "박 대리, 마지막까지 멋지게 가는구먼! 나도 다음 회차 때는 박 대리처럼 시원하게 질러야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현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김 부장이? 평소에는 한없이 보수적이고 잔소리만 늘어놓던 김 부장이 저런 말을? 회차?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지?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공님, 이대로 가면 망합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이지훈 차장이 언제 왔는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평소에는 넥타이를 꽉 매고 깐깐한 표정을 짓던 이 차장은 오늘은 왠지 모르게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안경도 벗고 머리 스타일도 한결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의 눈빛은 묘하게 진지했다.
"차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뭘 망한다는 거죠?"
현수가 당황해서 묻자, 이 차장은 주변을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현수의 어깨를 툭 쳤다.
"쉿. 여기서 대놓고 말할 순 없죠. 원래는 제가 나설 일이 아니지만, 원작의 흐름이 너무 심하게 뒤틀려서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공님은 너무 평범하게 살고 계세요. 이대로 가다가는..."
이지훈 차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떻게 되는데요?"
현수는 불안감에 목소리가 떨렸다.
"파멸입니다. 주인공님의 해피 엔딩은 물 건너가는 거죠. 아니, 뭐, 제가 빙의한 이 몸의 '원작'에서는요. 물론 이곳이 원작 세계관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인지는 저도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아는 정보에 따르면 주인공님은 더 이상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곧 회사의 중대한 기밀이 터져 나갈 텐데..."
이지훈 차장은 갑자기 현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달 말에 한빛 기획의 핵심 기술 유출 사건이 터집니다. 범인은 김 부장이고요. 미리 알아두세요. 그리고 박선영 대리 말은 너무 믿지 마세요. 그녀는 회귀자니까요. 주인공님에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현수는 이지훈 차장의 말을 듣는 내내 머리가 띵했다. 핵심 기술 유출? 김 부장? 박선영 대리가 회귀자? 그는 순간 자신이 정신병원에 와 있는 건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주변 사람들의 눈빛을 살폈지만, 아무도 그들의 대화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모두들 평소처럼 각자의 업무에 몰두하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 하루는 현수에게 악몽 그 자체였다. 박선영 대리는 정말로 퇴사해 버렸고, 그 과정에서 "이 회귀물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갈 거야!" 같은 해괴한 말을 남겼다. 이지훈 차장은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다가와 "원작의 주인공이시여, 이대로는 안 됩니다!" 같은 알 수 없는 조언을 퍼부었다.
퇴근길, 현수는 텅 빈 지하철에 몸을 싣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빌딩들의 불빛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그는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박선영의 ‘회귀 특전’, 이지훈의 ‘원작’과 ‘빙의’, 김 부장의 ‘다음 회차’. 그리고 다른 동료들의 무심한 듯 던지는 ‘미래가 바뀌었어’, ‘이 전개는 원작에 없었는데’ 같은 말들.
문득, 소름 끼치는 가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설마. 설마 나만 빼고, 모두가…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창에 ‘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수많은 웹소설 제목과 함께, 놀랍게도 ‘회귀자들의 모임’, ‘빙의자 커뮤니티’, ‘환생자 동호회’ 같은 검색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뉴스 기사에는 ‘미래를 아는 투자자들, 연일 대박 행진’, ‘갑자기 변한 사람들의 행동 패턴, 사회학적 분석 필요’ 같은 내용들이 보였다.
현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나만 빼고 모두가…
나만 모르는 채, 모두가 ‘특별’해진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평범한’ 채로 남겨진 것일까.
김현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의 평범한 일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혼란 속에서, 과연 그는 자신의 평범함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 지켜낼 수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혼돈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혼돈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