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휴대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동공을 흔들었다. ‘회귀자들의 모임’, ‘빙의자 커뮤니티’, ‘환생자 동호회’. 믿을 수 없는 단어들이 그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는 몇 시간째 같은 기사와 게시글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미래 주식 예측으로 억대 수익 인증’, ‘망해가는 기업 살려낸 빙의자의 기적’, ‘전생의 무공으로 범죄 조직 소탕’. 하나같이 현실이라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그가 오늘 회사에서 겪은 일들과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박선영 대리의 ‘회귀 특전’과 명품들, 이지훈 차장의 ‘원작’과 ‘빙의’ 그리고 ‘핵심 기술 유출’ 경고. 김 부장의 ‘다음 회차’ 발언까지. 모든 조각들이 맞춰지자 하나의 기괴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미쳤거나, 아니면 정말로… 그들만 아는 어떤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오직 김현수만이 홀로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는 중얼거렸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했다. 이것이 꿈이라면 좋으련만, 허벅지를 꼬집었던 통증은 여전히 생생했다. 그는 노트북을 켜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웹소설 사이트에는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이라는 태그가 붙은 소설들이 인기 차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소설들의 줄거리는 놀랍게도 그가 오늘 겪은 일들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미래를 아는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하는 이야기, 다른 인물에게 빙의되어 원작의 흐름을 바꾸는 이야기.
그는 문득 자신이 이 모든 웹소설의 주인공인가 하는 헛된 상상마저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 김현수였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저 월급으로 살아가는 소시민. 그런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동이 트고, 창밖으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 때쯤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하지만 깊은 잠은 아니었다. 꿈속에서도 박선영이 명품 백을 흔들며 ‘회귀 특전’을 외치고, 이지훈 차장이 그의 귀에 대고 ‘주인공님, 파멸입니다!’라고 속삭였다.
다음 날 아침, 김현수는 좀비처럼 회사로 향했다. 눅눅한 지하철 냄새, 빽빽한 인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옆자리 여자가 휴대폰으로 주식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어제 같았으면 ‘누군가 또 주식에 미쳤군’ 하고 생각했을 테지만, 오늘은 ‘저 사람도 회귀자인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웹소설을 보고 있었다. ‘혹시 저 소설이 이 세계의 ‘원작’인가?’ 하는 망상마저 스쳤다.
한빛 기획 사무실 문을 열자,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그를 맞았다. 박선영 대리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깔끔했던 책상은 이미 개인 물품이 모두 사라진 채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퇴사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어제의 모든 일들이 현실이었다.
"현수 씨, 어서 와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지훈 차장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어제보다 더 편안한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풀어헤쳐져 있었고, 셔츠 단추도 하나 풀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믹스커피 대신 고급스러운 원두커피가 들려 있었다.
"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현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 차장의 손목으로 향했다. 어제 번쩍이던 시계는 없었다. 대신 가볍고 캐주얼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주인공님,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밤새 고민이 많으셨나 봅니다."
이지훈 차장은 현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걱정하는 듯했지만, 눈빛에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아, 네… 좀요."
현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숨길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이 차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제가 어제 말씀드렸던 내용, 잘 새겨들으셨겠죠? 한빛 기획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주인공님의 미래가 달린 일이죠. 원작대로라면 여기서 주인공님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위기거든요."
이지훈 차장은 소곤거리듯 말했다. 현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그들의 대화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모두들 각자의 업무에 몰두하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들은 어쩐지 현수를 비웃는 듯 느껴졌다.
"차장님, 정말 김 부장님이… 핵심 기술을 유출한다는 말씀이세요?"
현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김 부장은 평소에도 깐깐하고, 회사의 기밀 유지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기술을 유출한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작에서는 그랬습니다. 김 부장은 회사의 핵심 기술을 경쟁사에 넘기려다가 주인공님에게 발각되어 모든 것을 잃게 되죠. 그로 인해 회사는 잠시 휘청이지만, 주인공님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주인공님의 각성 계기이자, 서사의 시작이었어요."
이지훈 차장의 눈빛은 마치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설명하는 시청자의 그것과 같았다. 현수는 그 눈빛에서 일말의 거짓말도 찾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원작과 다를 수도 있잖아요."
현수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주인공님께 미리 알려드리는 거 아닙니까. 제가 빙의한 이 몸은 원작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악역 조연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이 몸을 잘 써서,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원작의 주인공인 현수 씨가 잘 되는 게 저에게도 이득이죠. 원작에서 김 부장이 기술을 유출하려던 시점은 이번 달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이제 이틀 남았네요."
이틀. 현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지훈 차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이틀 안에 김 부장의 기술 유출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에게는 아무런 증거도, 힘도 없었다. 평범한 회사원이 어떻게 회사의 핵심 기술 유출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김 부장은 그의 직속 상사였다.
그는 하루 종일 김 부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김 부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지시하고, 회의에 참석하고,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수상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현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김 부장이 휴대폰을 만질 때마다, 누군가와 통화할 때마다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마 지금?’, ‘지금 저 대화가 그 계획과 관련된 건가?’ 하는 의심이 꼬리를 물었다.
점심시간, 현수는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동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코인 또 한 번 떡상한다던데, 다들 준비됐어?"
"난 이미 지난 회차 때 다 해봤어. 이번엔 주식으로 갈아탔지."
"아, 내 전생의 기억으론 이 시기에 ○○전자 주식이 폭등했었는데… 아쉽네."
그들의 대화는 마치 그들만의 리그 같았다. 현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밥만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다. 밥맛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이지훈 차장이 현수에게 다가왔다.
"주인공님,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는 현수를 탕비실로 데리고 갔다.
"김 부장이 오늘 오후에 외부 미팅이 있다고 했죠? 그 미팅 상대가 바로 경쟁사 ‘미래 테크’의 이사입니다. 원작에서도 김 부장은 그 이사를 통해 기술을 넘기려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점입니다."
현수는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래 테크는 한빛 기획의 오랜 경쟁사였다. 김 부장이 그들과 만난다니. 이지훈 차장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요. 제가 뭘 할 수 있죠?"
현수는 절박하게 물었다.
"증거요? 원작에서는 주인공님이 김 부장의 USB를 몰래 확인해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김 부장의 서류 가방 안에 있었죠."
이지훈 차장은 태연하게 말했다. 현수는 그의 말에 경악했다. 남의 물건을 몰래 확인하라니. 그것도 직속 상사의 물건을? 그는 평생 그런 비도덕적인 행동은 해본 적이 없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그건 범죄잖아요!"
현수가 소리치듯 말했다. 이지훈 차장은 피식 웃었다.
"원작의 주인공님은 정의감이 투철하셨죠. 그래서 회사를 구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원작의 흐름이 뒤틀렸으니, 주인공님도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범죄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하는 영웅의 행동입니다."
이지훈 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서류 가방을 들고 사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김 부장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현수의 눈은 김 부장의 서류 가방에 고정되었다. 그 안에 정말로 회사의 미래를 좌우할 기밀이 들어있는 걸까? 그리고 그 기밀을 경쟁사에 넘기려는 계획이?
현수는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동시에 이지훈 차장의 말이 너무나도 구체적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만약 이지훈 차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평범한 삶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회사가 망하면, 그의 안정적인 직장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평범함을 지키려는 본능과, 눈앞의 비범한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했다. 이대로 파멸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맞서야 했다.
김 부장이 나간 지 10분쯤 지났을까. 현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마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김 부장의 책상으로 향했다. 주변 동료들은 여전히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도 현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 역시 현수가 어떤 행동을 할지, 이 ‘원작’의 흐름이 어떻게 바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김 부장의 책상 아래에 놓인 서류 가방을 바라봤다. 검은색 가죽 가방. 평소에는 늘 잠겨 있던 가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잠겨 있지 않은 듯했다. 그의 손이 떨렸다. 망설임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는 여러 서류철과 함께, 익숙한 검은색 USB가 눈에 들어왔다.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지훈 차장의 말이 떠올랐다. ‘김 부장의 USB를 몰래 확인해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USB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이제 이 USB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김 부장의 컴퓨터는 잠겨 있을 터였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컴퓨터에 연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현수는 USB를 꽉 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숨죽이며 자신의 컴퓨터에 USB를 연결했다. 윈도우 탐색기가 자동으로 열리며 USB 드라이브가 인식되었다. 폴더 안에는 여러 파일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한빛 기획_핵심기술_프로젝트A_최종보고서.docx’라는 이름의 파일과, ‘미래 테크_제안서_비밀협약.pptx’라는 이름의 파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현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정말이었다. 이지훈 차장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미래 테크_제안서_비밀협약.pptx’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열리자, 첫 페이지에 적힌 문구가 그의 눈을 강타했다.
[한빛 기획 핵심 기술 ‘프로젝트 A’ 기술 이전을 위한 제안서]
그 아래에는 구체적인 기술 이전 계획, 계약 금액, 그리고 김 부장의 서명이 들어갈 빈칸까지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현수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배신감, 충격, 그리고 거대한 혼란이 그를 덮쳤다. 그의 평범한 일상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대로 회사가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회사에 알리면 김 부장은 물론, 자신 역시 남의 USB를 몰래 열어본 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그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평범함을 지키려던 그의 노력이, 오히려 더 큰 혼돈 속으로 그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지훈 차장의 조언은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과연 그가 이 증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조용히 덮어야 하나?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경우의 수들로 가득했다.
그때, 현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이지훈 차장이었다.
[주인공님, 김 부장이 곧 돌아올 겁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메시지에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현수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현수는 USB를 뽑을지, 아니면 이 증거를 가지고 무엇이든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의 눈은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제안서 파일과, 손에 쥐고 있는 USB를 번갈아 응시했다. 김 부장이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쿵, 쿵. 그의 심장이 귀청을 때렸다. 그는 이제 정말로, 이 모든 비정상적인 상황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평범한 삶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는 선택해야 했다. 이 혼란 속에서, 과연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선택이, 그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키보드 위로 향했다.
그는 파일을 삭제해야 할까? 아니면…
그는 메일 작성 버튼을 눌렀다. 수신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