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뭐… 뭐라고요? 그게… 건물주님의 의뢰라고요?"
은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는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로키의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1층 ‘이한 카페’의 통유리창 너머로 서이한이 여전히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은 아까보다 더 깊게 찌푸려진 것 같았다.
‘설마… 건물주님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건물에 낙서했다고 화가 난 거였어?’
다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로키의 식욕을 되찾아주기 위해, 로키가 좋아하는 산책 코스를 건물 외벽에 그림으로 그려 붙여놓았던 것이 문제였다니. 그것도 ‘향기 나는 허브 그림’이라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정성껏 붙여놓았던 것인데! 그녀의 엉뚱한 발상과 넘치는 열정이 때로는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현실로 닥치니 등골이 오싹했다.
"소장님, 일단 건물주님께 내려가서 상황 설명을 드리는 게 좋겠어요. 아무리 로키를 위한 일이었다고 해도, 건물 외벽에 그림을 붙인 건… 좀 그렇죠."
은우가 조심스럽게 다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강다미는 도망가지 않아! 문제 해결 사무소 소장답게 정면으로 돌파해야지!"
다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처럼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차분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던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는 2층 사무실의 아기자기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서이한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은 언제나 완벽했다. 다미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화내면… 더 무섭겠지?’
다미는 용기를 내어 서이한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섰다.
"저… 건물주님! 서이한 건물주님 맞으시죠?"
다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이한은 그제야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다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다미를 향했다.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의 심장까지 꿰뚫어 보는 듯 차갑고 날카로웠다. 다미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2층 사무소에서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서이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짜증과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다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까 전화 주신 의뢰 때문에… 외벽 그림 말이에요! 제가 붙인 건데… 죄송합니다!"
다미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사과했다. 서이한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다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다미는 그 안에서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려 애썼다.
"설마, 본인이 한 짓이라고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건물 외벽에 그런 낙서를 한 겁니까? 그것도 향기 나는 그림이라니…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미관을 심각하게 해치는 행위입니다."
서이한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는 ‘낙서’, ‘비합리적’, ‘비효율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다미의 행동을 비난했다. 다미는 순간 울컥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낙서라뇨! 로키라는 강아지의 식욕 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후각 테라피'이자 '환경 개선 프로젝트'였다고요! 로키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저는 로키에게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와 시각적 자극을 통해 식욕을 되찾아주려 했던 거예요! 결과적으로 로키는 밥을 먹게 됐고요!"
다미는 서이한의 비난에 맞서 자신의 ‘문제 해결 방식’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녀의 눈은 다시금 활기찬 빛을 되찾았다. 그녀에게 로키의 문제는 단순한 강아지 문제가 아니었고, 그녀의 해결 방식은 결코 ‘낙서’가 아니었다.
서이한은 다미의 열정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미간의 주름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지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건물 외벽을 함부로 사용하는 건 계약 위반입니다. 게다가 그 '시큼한 냄새'라는 것도… 저희 카페에서는 어떤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늘 최고급 원두만을 사용하고, 청결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서이한은 자신의 카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다미는 그제야 은우가 아랫집 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설마… 내가 또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서 일을 벌인 건가?’
다미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로키가 밥을 먹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니요! 분명히 로키 의뢰인님이 '시큼한 냄새'라고 말씀하셨어요! 어쩌면 건물주님은 너무 효율성을 추구하셔서 감성적인 후각의 미묘한 변화를 느끼지 못하시는 걸 수도 있죠! 저는 로키의 후각에 공감한 거예요!"
다미는 자신의 공감 능력과 직관을 굳게 믿었다. 서이한은 다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감성적인 후각이라… 좋습니다. 그럼 그 감성적인 후각으로 인해 발생한 외벽 손상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지실 겁니까? 다음 주에 중요한 투자자들이 방문할 예정인데, 이런 상태로 건물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당장 내일까지 깨끗하게 원상 복구하세요. 아니면… 계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사무실을 비워주셔야 할 겁니다."
서이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다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사무실을 비워달라니! 이제 막 문을 연 ‘문제 해결 사무소’가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안 돼! 세상 모든 사소한 고민을 해결해줄 강다미의 사무소가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다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은 다시금 번뜩였다. 서이한의 차갑고 단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미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건물주님은 완벽주의자니까! 이왕이면 더 완벽하고, 더 예술적이고, 더 의미 있는 그림으로 바꿔드리면 되는 거잖아?’
다미는 서이한의 경고를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문제 해결 의뢰’로 받아들였다. 그것도 ‘까칠하지만 잘생긴 건물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의뢰로!
"알겠습니다, 건물주님! 내일까지 완벽하게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완벽을 넘어선 감동을 선사해드리죠!"
다미는 활기차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이한은 다미의 황당한 반응에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다미가 자신의 경고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감동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깔끔하게 원상 복구만 해주세요."
"아니죠! 문제 해결은 의뢰인의 숨겨진 니즈까지 파악해서 해결해드리는 게 진정한 전문가죠! 건물주님은 겉으로는 깔끔함을 원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 진심이 담긴 예술을 통해 삭막한 도시에 작은 활력을 불어넣고 싶으신 거죠? 제가 다 알아요!"
다미는 서이한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이한은 다미의 터무니없는 해석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그저 조용하고 효율적인 일상을 원할 뿐이었다. 예술이니 활력이니 하는 것들은 그에게 있어 그저 번거로운 소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미는 서이한의 침묵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서이한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서이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여자는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그는 노트북 화면을 덮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완벽하고 효율적인 삶에 강다미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끼어들면서, 그의 일상은 완벽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2층 사무실로 돌아온 다미는 은우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포했다.
"은우 씨!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어! 건물 외벽에 그려진 로키 그림을… 건물주님이 감동할 만한 '문제 해결 사무소의 시그니처 아트'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야!"
은우는 다미의 말에 경악했다.
"소장님! 건물주님은 원상 복구를 원하신 거예요! 감동적인 아트가 아니라요! 이러다 정말 사무실 비워달라고 하시면 어쩌려고요?"
"걱정 마! 건물주님은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속으로는 따뜻한 분이실 거야. 게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신 걸 보면… 분명히 내게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어! 이참에 내 진심을 보여드려야지!"
다미는 서이한의 차가운 시선을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건물주님 감동시키기 대작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밤, 강다미는 잠도 자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로키 그림 위에 덧그릴 스케치를 하고, 새로운 향기 나는 허브들을 물색했다. 그녀는 로키의 산책 코스 지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그 위에 ‘문제 해결 사무소’의 로고와 함께 ‘당신의 모든 고민, 강다미가 해결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을 계획을 세웠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건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자 홍보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다음 날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다미와 은우는 건물 외벽에 매달렸다. 다미는 안전모를 쓰고 붓을 든 채 사다리 위에 올라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자, 은우 씨! 향기 나는 페인트 준비됐지? 오늘은 건물주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날이야!"
은우는 한숨을 쉬면서도 다미가 시키는 대로 향기 나는 특수 페인트를 섞어 건네주었다. 다미는 능숙하게 붓을 놀려 로키 그림 위에 새로운 그림을 덧그리기 시작했다. 로키의 산책 코스는 더욱 다채로운 색깔로 채워졌고, 그 위에는 작은 꽃들이 피어나고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듯한 그림이 더해졌다. 그리고 중앙에는 ‘문제 해결 사무소’의 로고가 크게 박혔다.
그녀의 작업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시끄럽고 요란했다. 사다리가 삐걱거리는 소리, 페인트 통이 부딪히는 소리, 다미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까지. 이른 아침의 조용했던 거리는 다미의 ‘예술 활동’으로 인해 활기찬 소음으로 가득 찼다.
아침 일찍 카페 문을 열기 위해 출근한 서이한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 속에서, 2층 외벽에 매달려 있는 다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시그니처 아트’를 본 순간, 서이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분명히 ‘원상 복구’를 지시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원상 복구’를 넘어 ‘재창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고, 요란하게! 로키의 산책 코스 지도는 이제 온갖 색깔의 꽃과 나비로 뒤덮인 거대한 벽화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문제 해결 사무소’의 로고가 마치 간판처럼 크게 박혀 있었다. 게다가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달콤한 허브 향은 그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강다미 씨!"
서이한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다미의 이름을 불렀다. 다미는 사다리 위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페인트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해맑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 건물주님! 일찍 나오셨네요! 어떠세요? 제 야심작! 어때요, 감동받으셨죠?"
다미는 활짝 웃으며 서이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붓에서는 아직 물감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서이한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미소와 눈앞에 펼쳐진 ‘예술 작품’을 번갈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저 여자, 정말… 내 말을 하나도 안 들은 건가?’
서이한은 자신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강다미라는 존재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당장이라도 사다리를 끌어내려 저 엉뚱한 여자를 끌어내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묻은 페인트와 해맑은 미소를 보니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강다미 씨, 지금 당장 내려와서 저걸 다 지우세요. 아니면…."
서이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다미는 그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어머, 화내는 모습도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역시 까칠한 남자에게는 이런 박력이 있어야지!’
다미는 서이한의 분노를 ‘자신에게 푹 빠진 남자의 열정적인 표현’으로 오해하며 또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다리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서이한의 앞으로 다가섰다.
"건물주님, 진정하세요. 제가 건물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이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에요. 이건… 건물주님을 향한 저의 진심과, 이 사무소를 향한 저의 열정이에요!"
다미는 서이한의 팔을 잡고 자신의 진심을 호소하려 했다. 서이한은 순간적으로 다미의 손길에 움찔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이게 지금 무슨…!"
그때였다.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그림 중 일부가, 다미가 너무 많은 페인트를 덧바른 탓인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찢어진 틈으로, 낡은 벽돌 사이에서 뭔가가 삐죽 튀어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래된 나무 상자였다. 상자는 찢어진 그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며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서이한과 강다미, 그리고 은우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나무 상자로 향했다. 낡고 먼지 쌓인 상자 안에서, 빛바랜 편지 한 묶음과 오래된 사진 몇 장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서이한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와 한 여자가 다정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 뭉치 중 하나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사랑, 그대에게. 이 건물은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오.’
세 사람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다미의 엉뚱한 ‘문제 해결 방식’이 또다시 새로운, 그리고 훨씬 더 거대한 문제를 불러온 순간이었다. 그것도 서이한의 평화로운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과거의 비밀이 담긴 문제였다.
과연 강다미는 이 오래된 상자 속 비밀이라는 가장 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