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스 아카데미의 늦은 오후는 언제나 그랬듯 찬란했다. 돔형 천장을 통해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은 대리석 바닥에 흩뿌려져 보석처럼 빛났고, 명문가의 후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곳은 재능과 배경, 그리고 타고난 친밀도 색이 곧 계급인 곳이었다.
나는 그 화려한 풍경 속에서 늘 희미한 존재였다.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내 친밀도 색은 언제나 옅은 회색이었다. 누구의 시선도 붙잡지 못하고, 어떤 관계에도 깊이 스며들지 못하는, 그저 배경에 불과한 색. 나는 그것이 익숙했고, 때로는 편안했다. 화려한 색을 가진 이들의 시선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며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오늘도 나는 아카데미 내 카페 ‘오로라’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커피 머신을 닦고 있었다. 이곳은 내가 유일하게 내 존재를 드러내는 곳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 이곳에서 나는 손님들의 친밀도 색을 무심히 관찰하곤 했다.
총학생회장 강이한 선배의 색은 언제나 압도적이었다. 칠흑 같은 흑발 아래 날카로운 턱선, 차가운 눈빛. 그의 주변에는 늘 푸른 사파이어처럼 깊고 강렬한 색이 일렁였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그 색은 너무나 짙어서, 감히 누구도 가까이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자주 이곳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곤 했는데, 그의 시선은 언제나 허공을 응시하거나 들고 있는 서류에 박혀 있을 뿐, 나 같은 아르바이트생에게는 단 한 번도 향한 적이 없었다. 그의 친밀도 색은 나를 향해 언제나 미동도 없이 차가운 푸른빛을 유지했다.
“소연아, 오늘따라 얼굴이 더 까칠해 보이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내 옆에 불쑥 나타난 건 유은찬이었다. 그의 친밀도 색은 따뜻한 호박색. 언제나 나를 향해 부드럽게 빛나는, 나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색이었다. 은찬이는 내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이자,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바쁜 스케줄 와중에도 틈만 나면 카페에 들러 내 안부를 묻고, 내 어깨를 툭 치며 장난을 걸곤 했다. 그의 호박색은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지만, 나는 그 색을 친구로서의 친밀함으로만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다.
“괜찮아. 어제 과제 때문에 밤새서 그래.”
내가 고개를 젓자 은찬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호박색이 더욱 진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나는 그를 소중한 친구로 생각했지만, 그의 친밀도 색이 가진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서도윤 선배가 들어섰다. 그는 이 카페의 사장이자 아카데미의 미스터리한 예술가였다. 은빛 머리카락에 나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그의 친밀도 색은 마치 안개처럼 흐릿한 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오묘한 색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색. 그는 언제나 반쯤 감긴 듯한 눈으로 모든 것을 관찰했지만, 그 시선은 결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나를 향한 그의 친밀도 색은 그저 무심한 은빛이었다. 마치 흥미 없는 풍경을 바라보듯,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다시 커피 머신을 닦았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 언제나와 같은 회색의 나.
하지만 그날 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카페 문을 잠그고 혼자 남은 시간. 피곤에 절어 무심히 카운터 위를 닦아내던 내 손끝에, 순간 강렬한 전율이 스쳤다. 마치 오래된 전선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듯한 짜릿함이었다. 몸 안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 심장이 격렬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익숙했던 카페의 색들이 마치 유화 물감이 번지듯 흐려지더니, 이내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도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뜨겁고, 생경하고, 압도적인 기운.
‘이게… 뭐야?’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수천 개의 유리 조각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숨이 막혔다. 공기가 희박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손이 저절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드는 순간.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상이 변해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는 놀랍도록 선명해졌고, 모든 사물이 생생한 색으로 되살아났다. 카페 안의 평범한 의자와 테이블, 컵 하나하나까지도 저마다의 고유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 전체를 감싸는, 눈부신 무지개색이었다. 옅은 회색이었던 나의 친밀도 색이, 마치 수만 개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세상의 모든 색이 내 안에서 폭발하듯 솟아나, 나를 중심으로 찬란한 오로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거울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낡은 거울 속에는 더 이상 희미한 회색의 내가 없었다. 무지개색 빛에 감싸인, 눈부시게 빛나는 한소연이 서 있었다. 내 눈동자는 알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었고,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평범했던 긴 생머리조차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내가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나?
놀란 눈으로 문 쪽을 돌아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을 등지고, 세 명의 실루엣이 차례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강이한, 유은찬, 그리고 서도윤 선배였다.
그들의 친밀도 색은 어둠 속에서도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이한 선배의 사파이어색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격렬하게 요동쳤고, 유은찬의 호박색은 불안하게 떨리면서도 나를 향해 맹렬히 뻗어 나오는 듯했다. 서도윤 선배의 은빛과 보랏빛은 언제나처럼 오묘했지만, 그의 반쯤 감긴 눈은 완전히 떠져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시선은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존재를 탐색하듯 강렬한 흥미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에게 고정되었다.
단 한 번도 나를 제대로 본 적 없던 그들의 눈빛이, 지금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강이한 선배의 차가운 눈빛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졌다.
“한소연…?”
내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평범한 일상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내 안에서 폭발한 무지개색은, 이 세계의 모든 균형을 뒤흔들 파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