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중생활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아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한숨 속에는 어제 밤의 작가에게서 받은 메일의 잔잔한 여운이 섞여 있었다. 따뜻하고 정중한 문장들. 강태준 대표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것이 서아의 마음 한구석에 작은 온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부터 시작될 강태준 대표와의 지옥 같은 현실을 상기시키며 불안감을 키웠다.
다음 날 아침, 서아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30층 대표이사 집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기 있었지만, 눈빛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제 강태준 대표가 던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가차 없을 겁니다’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낮은 목소리가 마치 실체가 있는 압력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대표이사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태준 대표는 이미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일찍 출근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서류 뭉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모니터에서는 복잡한 그래프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서아에게 첫 지시를 내렸다.
"한 대리, 오늘 오전까지 지난 분기 웹소설 시장 점유율 데이터와 경쟁사 '드리밍노블'의 최근 3년간 성장률 분석 자료를 취합해서 보고서로 만들어 제출하세요. 핵심은 우리 회사의 잠재적 리스크 요인을 찾아내는 겁니다. 단순한 데이터 나열이 아닌,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서아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오전까지?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경쟁사 분석까지 심층적으로 해내라는 것은 결코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잠재적 리스크 요인까지 파악하라니, 신입 대리에게 맡길 법한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이건 마치 그녀의 역량을 시험하려는 듯한 과제였다.
"네, 대표님." 서아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심장은 이미 비상벨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대표실 옆에 마련된 작은 비서실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거대한 데이터의 산으로 보였다. 서아는 노트북을 켜고 자료 검색을 시작했다. ‘스타라이트 웹툰앤노블’의 내부 데이터베이스와 외부 시장 조사 자료, 경쟁사 공시 자료 등을 쉴 새 없이 뒤졌다. 엑셀 창은 수많은 숫자로 가득 찼고,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한 정보들로 뒤엉켰다. 평소 뛰어난 자료 분석 능력을 자랑했지만, 제한된 시간과 강태준 대표의 높은 기대치는 그녀를 압박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손목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아는 커피 한 잔을 급하게 마시고 다시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었다. 데이터 속에서 의미 있는 인사이트를 찾아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잠재적 리스크 요인….’ 그녀는 이 문구를 되뇌며 단순한 보고서가 아닌, 강태준 대표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녀는 웹소설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표면적인 수치 뒤에 숨겨진 흐름과 변화를 읽어내려 했다. 특정 장르의 과포화, 신인 작가 유입의 어려움, 독자층의 변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점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신저 알림이었다. 발신자는 유지혁 팀장.
‘서아 대리, 대표님이 오늘부터 좀 무리한 업무를 시키실 수도 있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줄게.’
따뜻한 팀장님의 메시지에 서아는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강태준 대표의 냉정함이 더욱 부각되는 기분이었다. 유지혁 팀장은 늘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점심시간도 건너뛴 채, 서아는 겨우 보고서를 완성했다. 단순한 데이터 요약이 아닌, 그녀 나름의 분석과 제안까지 담아냈다. ‘드리밍노블’이 최근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특정 장르의 성장세가 ‘스타라이트’의 주력 장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신인 작가 발굴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담았다. 손목시계는 1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감 시간 10분 전.
"대표님, 보고서 완성했습니다." 서아는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강태준 대표는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서아는 그의 책상 앞에 보고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는 잠시 후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보고서 위를 빠르게 훑었다. 서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읽기 위해 숨죽이며 기다렸다. 어떤 질책이 쏟아질지, 아니면 무심한 한마디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몇 분간의 정적이 흘렀다. 강태준 대표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 페이지에 멈췄을 때, 서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부분." 그가 보고서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쟁사 '드리밍노블'의 신규 장르 투자에 대한 분석은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투자 방향이 장기적으로 우리 플랫폼의 어떤 콘텐츠에 영향을 미칠지,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세 가지 이상 제시하고 그에 따른 우리 회사의 대응 전략을 함께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예상했던 질책보다는 날카로운 지적에 가까웠다. 나쁘지 않다는 말에 서아는 안도하면서도, 더 깊이 파고들라는 그의 지시에 다시금 긴장했다. 그는 그녀의 보고서에서 부족한 점을 정확히 짚어냈고, 동시에 더 높은 수준의 사고를 요구하고 있었다.
"네, 대표님. 다시 보완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3시, '밤의 작가' 신작 기획팀과의 첫 미팅이 있습니다. 준비된 자료와 아이디어 있으면 가져오세요." 강태준 대표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업무적인 딱딱함 외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서아는 대표실을 나오자마자 깊은 숨을 내쉬었다. 비록 칭찬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오후에 있을 ‘밤의 작가’와의 미팅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낮에는 까칠한 대표님 아래에서 냉정한 현실을 마주했지만, 오후에는 존경하는 작가님과 꿈같은 교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이중적인 설렘이 그녀를 감쌌다.
오후 3시, 서아는 웹소설 기획팀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은 이미 밤의 작가 신작 프로젝트에 참여할 팀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유지혁 팀장이 회의를 주재했다. 서아는 미리 준비해 온 밤의 작가 신작 기획안을 펼쳤다. 밤의 작가의 지난 작품들을 분석하고, 그의 문체와 감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를 비틀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서아 대리부터 밤의 작가님 신작에 대한 기획안을 발표해볼까요?" 유지혁 팀장이 서아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서아는 심호흡을 하고 스크린에 준비된 자료를 띄웠다. 그녀는 밤의 작가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담아냈다. 그의 글이 독자들에게 어떤 위로와 설렘을 주었는지, 그리고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이것으로 밤의 작가님 신작 기획안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서아는 발표를 마치며 가슴 벅찬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어요, 서아 대리. 아주 훌륭한 기획안이네요." 유지혁 팀장이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다른 팀원들도 박수를 보냈다. 서아는 뿌듯함과 동시에 밤의 작가가 이 기획안을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했다.
미팅이 끝난 후, 서아는 다시 비서실로 돌아와 강태준 대표가 지적한 보고서 보완 작업을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드리밍노블’의 시나리오와 ‘밤의 작가’의 새로운 작품 아이디어가 뒤섞여 돌아갔다.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업무가 그녀의 하루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는 냉철한 이성과 분석을 요구했고, 다른 하나는 따뜻한 감성과 창의력을 필요로 했다.
늦은 저녁, 서아는 겨우 보완된 보고서를 강태준 대표의 책상에 놓았다. 그는 이미 퇴근했는지 집무실은 비어 있었다. 서아는 피곤에 절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노트북에서 다시 한번 ‘띵동’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메일함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역시나 ‘밤의 작가’.
[제목: 오늘 미팅, 잘 마쳤습니다.]
서아는 홀린 듯 메일을 클릭했다.
[한서아 에디터님,
오늘 미팅에서 에디터님의 기획안을 전달받았습니다.
깊이 있는 분석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발표였습니다.
특히, 제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에 감탄했습니다.
에디터님께서 제안하신 새로운 시도와 독자층 확장에 대한 아이디어는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가 더욱 기대됩니다.]
메일은 짧았지만,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따뜻하고 섬세한 문장이었다. 낮에 강태준 대표에게 받은 스트레스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밤의 작가’의 메일은 마치 지친 서아의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 같았다.
서아는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꿈결 같은 현실이었다. 존경하는 작가에게서 직접 받은 칭찬. 그녀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거렸다. 그의 섬세한 문장과 낮에 마주했던 차가운 강태준 대표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밤의 작가님은 내 기획안을 이렇게나 칭찬해 주시는데… 대표님은….’
서아는 문득 고개를 들어 강태준 대표의 텅 빈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집무실은 항상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과연 그도 그녀의 보고서에서 ‘인상 깊은’ 점을 발견했을까? 아니면 그저 ‘나쁘지 않다’는 건조한 평가로 끝낼까?
그때, 서아의 시선이 강태준 대표 집무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작은 문에 닿았다. 평소에는 늘 굳게 닫혀 있던,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공간. 작가 전용 공간이라고만 알고 있던 그곳의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틈새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서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함도 잊은 채, 호기심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그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문틈으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텅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 그의 어깨는 넓고 단단했으며, 잘 정돈된 흑발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것은… 강태준 대표의 안경이었다.
서아는 숨을 들이켰다. 강태준 대표? 그는 분명 퇴근했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그 비밀스러운 작가 전용 공간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서아는 더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남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스치는 것을 보았다. 모니터에는 하얀 바탕 위에 검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마치… 소설의 원고처럼.
서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저 사람이… 밤의 작가?
그녀의 머릿속에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녀는 자신이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서아는 문득 강태준 대표에게서 온 메일과 밤의 작가에게서 온 메일을 떠올렸다.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 리 없어.
그녀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이미 그 비밀스러운 공간 속 남자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밤의 작가가 강태준 대표일 리 없어.
그녀는 자신을 다독였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이중생활은, 첫날부터 상상치 못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