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나 왕국의 하늘은 한때 별의 마나로 찬란하게 빛났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은 대지의 생명을 불어넣고, 고대 성좌 마법의 힘으로 왕국을 지탱하는 근원이었다. 하지만 수 세기 전부터 그 빛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별의 마나는 마치 생명을 잃은 혈관처럼 가늘어지고 끊어져, 대륙 전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법의 쇠퇴는 단순히 힘의 약화를 넘어섰다. 대지는 메말라가고, 숲은 병들었으며, 바다는 예전의 풍요를 잃었다. 곳곳에서 원인 모를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어둠의 틈새에서 기괴한 괴생명체들이 출몰하여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다. 왕국의 수도 루미나리아는 여전히 장엄한 위용을 자랑했지만, 그 중심에 자리한 왕궁조차 생기를 잃은 채 과거의 영광만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화려했던 마법 문명의 흔적은 빛바랜 태피스트리처럼 벽면에 걸려 있었고, 한때 마나로 가득 차 반짝이던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이제 겨우 희미한 불빛만을 내뿜을 뿐이었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별의 마나를 직접 다루는 성좌 마법의 계승자였던 에테르나 왕족들은 이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힘은 전설 속 이야기처럼 아득해졌고, 백성들은 왕실에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고대 예언에 매달렸다. "별을 다시 엮을 자가 나타나리니, 사라져가는 마법의 불꽃을 되살려 세계를 구원하리라." 그 예언은 절망 속에서 유일한 등불이었으나, 아무도 그 등불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지 못했다.
가장 비참한 것은 왕국의 막내 공주, 아멜리아 드 에테르나였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단 한 줌의 마력도 지니지 못한 채였다. 왕족에게 마법은 곧 존재의 증명이었기에, 그녀는 ‘마법 없는 공주’라는 오명 아래 왕궁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은은한 은발과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는 분명 왕가의 피를 증명했지만, 그녀에게서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에게 멸시받았다. 창백하고 연약한 인상은 그녀의 처지를 더욱 가련하게 만들었다.
아멜리아는 차가운 왕궁의 벽 속에서 홀로 고립되었다. 시녀들은 그녀를 무시했고, 귀족들은 그녀를 향해 조롱 섞인 시선을 보냈다. 심지어 가족조차 그녀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들은 아멜리아가 왕실의 수치이며, 쇠퇴하는 에테르나 왕국의 비참한 현실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녀는 중요한 왕실 행사에조차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고, 그저 구석에 박혀 모두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어린 공주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누구도 그녀의 아픔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왕궁의 어두운 구석에 버려진 빛바랜 그림자 같았다.
왕궁 깊숙한 곳에는 고대 성좌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는 ‘별의 도서관’이 있었다. 그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었지만, 아멜리아는 가끔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마나의 잔향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 다가갈 용기조차 없었다. 마법 없는 공주에게 금지된 구역은 그저 또 하나의 절망적인 경계일 뿐이었다.
대륙 최고 마법사들이 모인 ‘벨라트릭스 마탑’은 사라져가는 마법의 원인을 연구하며 왕국과는 별개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곳의 젊은 탑주이자 대공인 카일러스 드 벨라트릭스는 밤하늘 같은 흑발과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가진 냉철한 천재였다. 그는 모든 것을 마법 연구와 세계 구원에 바쳤기에 감정 표현에 서툴렀고, 그의 희미한 미소 한 번에 주변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그는 왕국의 무능함과 왕실의 나약함을 경멸하며, 오직 사라져가는 마법의 근원을 찾아 세계를 구원하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에게 ‘마법 없는 공주’는 관심조차 가질 가치 없는 존재였다.
오직 한 사람, 에테르나 왕국 기사단장이자 아멜리아의 소꿉친구인 엘리엇 드 가이아만이 그녀의 편에 서 있었다. 찬란한 금발에 푸른 하늘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그는 햇살처럼 밝고 다정했으며, 어릴 적부터 아멜리아를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었다. 공주가 멸시받을 때도 그는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사랑조차 아멜리아를 둘러싼 절망의 벽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더욱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법은 끝없이 쇠퇴했고, 사람들의 희망은 바닥을 드러냈다. 모두가 마법 없는 공주 아멜리아를 비웃고 외면하는 사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모든 절망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는 것을. 멀고 먼 이세계의 한 평범한 영혼이, 이 절망적인 세계의 운명을 뒤바꿀 거대한 파문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머나먼 이세계의 한 평범한 여대생 이서연이 불의의 사고로 눈을 감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왕궁의 차가운 침대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빙의가 아니었다. 멸시받던 ‘마법 없는 공주’의 몸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마법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별의 마나와 공명하며,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의 운명을 바꿀, 찬란한 별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을 때, 이서연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멍하니 숨을 들이켰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퇴색된 침대 캐노피, 차가운 대리석 바닥,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고성. ‘내가 왜 여기 있지?’ 마지막 기억은 숨 막히는 트럭의 경적 소리와 강렬한 충격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시에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아멜리아 드 에테르나.’ 마법 없는 공주, 모두의 멸시, 차가운 시선들. 이서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앙상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하고 가늘어진 손가락. 분명 스무 살 건강한 여대생 이서연의 손이 아니었다.
"이게… 빙의? 말도 안 돼!"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몸은 휘청거렸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은은한 은발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생기 없이 창백한 얼굴은 영락없이 소설 속에서 읽었던 ‘마법 없는 공주’ 아멜리아의 모습이었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전생의 삶은 한낱 꿈처럼 아득해지고, 눈앞의 잔혹한 현실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마법이 사라져가는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마법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공주.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젠장, 여기서 죽으면 진짜 끝인데."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이서연, 아니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평범했지만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삶을 살아왔다. 위기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기지와 호기심 많고 사랑스러운 성격은 그녀의 강점이었다. ‘마법 없는 공주’라 불리며 멸시받고 고립된 삶을 살았던 원래 아멜리아와는 정반대의 성격. 그녀는 이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려웠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마법이 없다고? 그럼 내가 마법을 만들면 되지!"
엉뚱하지만 당찬 선언이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분명 이 몸에는 고대의 마법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힘을 깨워야 했다. 어쩌면 이서연의 빙의 자체가 그 마법을 깨우기 위한 운명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스쳤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을 인정받고, 잃어버린 마법력을 되찾아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것이 지금 이서연, 아멜리아에게 주어진 새로운 목표였다. 왕궁의 어두운 구석에 버려졌던 빛바랜 그림자는 이제 막 깨어난 별빛처럼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