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의 어두운 구석에 버려졌던 빛바랜 그림자는 이제 막 깨어난 별빛처럼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차가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여전히 격렬하게 뛰었지만,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순간의 공포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낯선 곳으로 던져진 충격 때문이었다. 눈꺼풀을 닫아도, 귓가에는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덮쳐오던 거대한 철골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내가… 죽었단 말이야?’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낯선 천장, 낯선 몸. 혼란과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몸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가늘고 창백한 손을 들어 올리자, 손목에는 옅은 흉터 자국이 보였다. 이곳은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기이하고 끔찍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이 삐걱거리는 듯 아팠다. 머릿속에는 ‘아멜리아’라는 이름과 함께, ‘마법 없는 공주’라는 멸시와 조롱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지만, 차가운 침대 시트의 감촉과 싸늘한 공기는 너무나 선명했다. ‘이서연… 정신 차려야 해.’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보랏빛 눈동자에 희미한 불안과 함께, 간신히 붙잡은 작은 결의가 감돌았다. 현대인의 상식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지금은 그런 거창한 것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그저 이 낯선 지옥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외침만이 가슴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울릴 뿐이었다.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해야 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감촉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방은 화려했지만 어딘가 습하고 낡은 기운이 감돌았다. 거대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영락없이 중세 유럽의 고성 같았다.
“공주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며 깡마른 몸매의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회색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 낡은 시녀복을 입은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억눌린 짜증 같은 것이 희미하게 스치는 듯했다. 아멜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시녀가 바로 ‘마법 없는 공주’를 조롱했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겠지.
“그래… 방금 깨어났단다. 그나저나 너는… 누구지?”
아멜리아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지만,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원래 아멜리아의 기억 속에서 이 시녀의 얼굴은 흐릿했다. 하도 많은 시녀들이 그녀를 거쳐 갔고, 모두가 그녀를 외면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시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마 ‘마법 없는 공주’가 자신에게 이름을 묻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소녀, 공주님의 시중을 드는 메리라고 합니다.”
메리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아멜리아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쳐 방 안을 훑었다. 마치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멜리아는 메리의 행동에서 깊은 경멸감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메리… 그래. 그런데 방이 왜 이렇게 추운 거니? 난방은 안 되는 거야?”
메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이 궁전의 난방 시설이 마나의 쇠퇴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마법 없는 공주의 방은 최하급 마나석조차 배정받지 못해 늘 싸늘했다. 원래의 아멜리아라면 이런 질문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묵묵히 추위를 견디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공주님. 아시다시피, 왕궁의 마나석이 부족하여….”
메리가 말을 흐렸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차가운 공기에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마나석이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따뜻하게 지낼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 다른 난방 기구라도… 아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일단… 일단 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부터.’ 그녀의 생각은 절박하게 맴돌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럼 따뜻한 물이라도 좀 가져다줄 수 있니? 몸이 좀 으슬으슬해서 말이야.”
아멜리아는 일부러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메리는 한숨을 쉬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메리가 물러나자 아멜리아는 창가로 다가섰다. 높은 창밖으로는 루미나리아의 웅장한 왕궁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첨탑과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분명 과거의 영광을 웅변하는 듯했지만, 곳곳에 금이 가고 이끼가 낀 벽면, 빛바랜 스테인드글라스는 마법의 쇠퇴가 얼마나 심각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탑의 실루엣은 왕궁과는 또 다른 위압감을 풍겼다.
‘젠장, 진짜 소설 속이잖아….’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아니,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폐가 충분히 팽창하지 않는 것처럼 답답했다. 교통사고로 죽었던 자신. 그리고 눈을 떠보니 낯선 몸, 낯선 세계. 심지어 자신이 읽었던 웹소설 속의 ‘마법 없는 공주’ 아멜리아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이 몸의 기억이 섞여들어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이서연인데… 아멜리아라고? 공주? 마법이 없다고 멸시받는…?’ 그녀는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픔보다 더 큰 막막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살아남는 것? 하지만 어떻게? 이 낯선 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심지어 멸시받는 존재로. 그녀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전생의 ‘이서연’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외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저 이 모든 것이 악몽이기를,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익숙한 현실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뜨기를 반복해도,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여전히 이서연의 좁고 아늑한 자취방이 아닌, 에테르나 왕국의 차갑고 낯선 공주 침실이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냉기가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꿈이 아니었다. 절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뇌 한구석에서는 서늘한 이성이 속삭였다. ‘울고만 있을 수는 없어. 여기서 무너지면 진짜 끝이야.’
전생의 이서연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모색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낯선 몸으로 깨어난 이 상황은 분명 최악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두 번째 삶’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마법 없는 공주? 멸시? 암살 위협? 그래, 다 좋다. 하지만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아서, 이 낯선 세상에서 어떻게든 행복을 찾아야 했다.
아멜리아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낡고 해진 커튼, 얼룩진 벽지, 먼지가 쌓인 가구들. 이 모든 것이 ‘마법 없는 공주’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낡은 것들 사이에서 작은 가능성을 찾으려 애썼다. ‘난방이 안 된다고? 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다못해 따뜻한 물이라도… 아까 메리에게 부탁했으니 그건 해결될 거야. 그럼 그 다음은?’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대인 이서연의 지식과 아멜리아의 몸이 가진 경험이 뒤섞였다. 아멜리아의 기억 속에는 마법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세상에서, 마법 없는 존재는 사실상 무능력자였다. 하지만 이서연의 머릿속에는 달랐다. 마법이 없으면 과학이 있었다. 기술이 있었다. 지혜가 있었다.
‘여기서 마법 없이 뭘 할 수 있을까? 일단… 추위부터 해결해야 해. 옷을 더 껴입거나, 아니면… 침대에 이불을 잔뜩 가져와서 웅크리고 있는 수밖에 없나? 아니, 이건 너무 수동적이야.’
그녀는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 놓인 촛대를 발견했다. 촛불 하나로는 방 전체를 데울 수 없겠지만, 적어도 손이라도 녹일 수는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몇 권의 낡은 책. 그녀는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지만, 표지에는 섬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에테르나 왕국의 역사: 건국부터 마법의 쇠퇴까지>.
‘이런 책도 있었네. 마법 없는 공주 방에 웬 역사책?’
아멜리아는 책을 펼쳤다. 고풍스러운 글자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왕국의 건국 신화, 위대한 마법사들의 활약, 그리고 마법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시점에 대한 기록. 페이지를 넘길수록 마법의 힘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고, 그것이 어떻게 점차 사라져 갔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고대 성좌 마법은 세상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별의 힘을 빌어 우주 자체의 법칙을 움직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그 힘은 점차 잊혔고, 이제는 전설로만 전해질 뿐…."
그녀의 눈이 한 문장에 꽂혔다. ‘고대 성좌 마법’.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 하고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던 조각을 발견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이끌림이 느껴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글자를 더듬었다. 이 몸의 어딘가에 이와 관련된 기억이 잠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대 성좌 마법이라… 내가 빙의된 소설의 핵심 설정이었던가? 아멜리아에게 잠들어 있는 힘이 바로 이거였지! 근데 그게 대체 뭐지? 어떻게 쓰는 거지?’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불안감은 조금씩 사그라들고, 대신 호기심과 함께 미약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서연은 원래도 호기심이 많았다. 낯선 것에 대한 탐구심과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비록 지금은 생존이 최우선이었지만, 이 책 속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메리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나무 양동이를 들고 들어섰다. 양동이 안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했다. 메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아멜리아는 그녀의 눈빛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당혹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공주님, 따뜻한 물입니다."
메리가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에서 피어나는 온기가 차가운 방 안의 공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아멜리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메리. 정말 고마워."
진심이 담긴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메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메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멜리아는 양동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물에 담갔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래, 이거야.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나가자. 살아남는 것. 그리고 이 낯선 세상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는 것.’
그녀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은은한 은발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창백하고 연약했던 이전의 아멜리아와는 달리, 지금 그녀의 눈빛에는 생기 넘치는 활기와 함께, 낯선 세계에 대한 결의가 어려 있었다. 뺨에 닿는 따뜻한 물의 감촉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도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불씨가 언젠가 이 세상을 밝히는 별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마법 없는 공주’로 멸시받으며 숨죽여 살지 않을 것이다. 이서연은, 아니, 아멜리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