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씨, 저 오늘 드디어 고백했어요!”
카운터 너머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한여름은 들고 있던 스팀 피처를 내려놓았다.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방금 전까지 하트 거품이 가득한 라테를 마시며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던 커플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이제 막 연인이 되었다는 듯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건조하게 내뱉은 축하의 말은 그녀의 굳은 표정만큼이나 감흥이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달콤한 눈빛 교환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몇 주 전, 이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썸 메뉴’를 주문했고, 매일같이 들러 묘한 기류를 풍겼다. 그리고 오늘, 그들은 기어코 ‘썸’의 종지부를 찍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한여름은 한숨을 삼켰다. 분명 그녀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이 낡고 아늑한 카페를 조용히 운영하며, 맛있는 커피를 내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썸머스윗’ 카페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장소’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얻게 되었다.
그 시작은 한 손님의 SNS 게시물 때문이었다. ‘썸머스윗 카페의 썸 메뉴를 마시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문구와 함께, 그녀가 정성껏 만든 음료 사진이 올라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 게시물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연애에 목마른 청춘들은 마치 성지순례라도 하듯 그녀의 카페로 몰려들었다.
문제는 그 ‘썸 메뉴’가 정말로 효과가 있다는 미신이 퍼졌다는 것이었다. 사실 ‘썸 메뉴’는 그녀의 뛰어난 감각으로 손님의 취향과 분위기에 맞춰 특별히 블렌딩한 음료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기대감과 그녀의 섬세한 서비스가 만들어낸 착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손님들은 굳게 믿었다. 이 카페에서 썸 메뉴를 마시면 솔로 탈출은 물론, 썸과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여름 씨, 제 썸 메뉴는 언제나 완벽했어요.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은 그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손님들이 행복하면 된 거지. 하지만 그녀의 속은 매일같이 비명을 질렀다. 연애 혐오자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사랑의 큐피드 노릇을 해야 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그녀의 카페는 20대 후반, 연애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찬 한여름과는 정반대로 매일같이 핑크빛 기류가 넘실거렸다. 아침 일찍 문을 열면 이미 문 앞에는 썸을 타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썸 메뉴’를 주문했고, 이내 카페 안은 썸과 밀당, 오해와 착각이 뒤섞인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사장님, 저도 썸 메뉴 주세요! 오늘은 꼭 고백 성공해야 해요!”
새로 들어온 손님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절박함과 함께 간절함이 가득했다. 한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받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그녀는 이제 능숙하게 썸 타는 커플들을 피해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음료를 서빙했다.
“여름 씨, 오늘도 대박이네요? 슬슬 이 근처 카페들 다 망하는 거 아니에요?”
창가에 앉아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김도윤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카페의 단골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가진 소년 같은 외모와 달리, 그의 눈빛은 늘 그녀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대박이 아니라 대환장파티겠죠.”
한여름은 툴툴거렸다. 그녀의 말에 김도윤은 쿡쿡 웃었다. 그는 늘 그녀의 시니컬한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따뜻한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여름 씨 카페는 매일이 축제잖아요. 여기 오면 다들 행복해하는 걸요.”
김도윤의 말에 한여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행복? 그녀는 과연 행복할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매일같이 지쳐갔다. 그녀의 목표는 오직 카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뿐이었다. 사랑 같은 건, 이제 그녀의 인생에 없었다.
그날 저녁,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카페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다. 낡은 창문 너머로 짙은 남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그리고 차 문이 열리며 완벽하게 재단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 깔끔하게 정돈된 헤어스타일, 그리고 지적인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빛. 그는 망설임 없이 ‘썸머스윗’ 카페 앞으로 다가왔다.
한여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저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이 허름한 동네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시선은 카페 간판에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를 향했다.
“썸머스윗 카페, 한여름 씨 맞습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탐색전이 담겨 있었다. 한여름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꼈다. 이 남자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었다. 그녀의 카페에, 그리고 그녀에게, 어떤 새로운 파장을 몰고 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일상이, 이제 막 새로운 폭풍의 전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한여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시간에, 이런 남자가,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누구신지?”
“강하준입니다. 블루밍 로맨스 대표.”
블루밍 로맨스. 그 이름이 귀에 꽂히는 순간, 한여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최근 몇 년간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전국에 매장을 늘려가며 업계 1위를 넘보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그 대표가 왜 이 허름한 동네 카페에? 그것도 문 닫을 시간에?
강하준은 그녀의 당황한 기색을 놓치지 않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최근 ‘썸머스윗 카페’가 SNS에서 꽤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썸 메뉴’가요.”
그의 시선은 카페 내부를 한 번 스캔하더니,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빛에는 칭찬보다는 날카로운 분석과 견제가 담겨 있었다. 한여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저희는 그저 손님들이 좋아해 주시는 메뉴를 제공할 뿐입니다.”
한여름은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 ‘그저’가 저희 같은 프랜차이즈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복병이랄까요.”
강하준은 빙긋 웃었지만, 그 웃음은 전혀 친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여름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는 듯했다. 그는 지적인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작은 개인 카페에서 이런 파급력을 만들어내다니, 대단하군요. 하지만 모든 유행에는 수명이 있는 법이죠. 특히 이렇게 감성적인 부분은 더더욱.”
그의 말은 칭찬인 듯 비난인 듯 모호했다. 한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 그는 잠시 한여름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뚝뚝한 표정 뒤로 얼핏 스치는 피로감과,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단단한 눈빛. 강하준의 입가에 묘한 흥미가 스쳤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상대였다.
“오늘 방문은 그저 인사 차원이었습니다. 곧 다시 찾아뵙게 될 겁니다, 한여름 씨.”
강하준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의 고급 세단은 왔을 때처럼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여름은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심장이 여전히 거세게 뛰었다. 블루밍 로맨스 대표 강하준. 그의 방문은 단순히 경쟁사의 견제 차원을 넘어, 그녀의 조용한 일상에 거대한 균열을 내는 듯했다.
‘유행에는 수명이 있는 법.’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썸 메뉴’로 인한 반짝 인기는 곧 사그라들 것이고, 그러면 그녀의 카페는 다시 평범한 동네 카페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읽었던 것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그 수명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한 오만함과 자신감이었다.
한여름은 낡은 계산대 위에 팔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이 소박한 공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 그 목표가 이렇게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줄은 몰랐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모든 소용돌이가, 이제는 ‘경쟁’이라는 또 다른 폭풍을 불러온 셈이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과거의 아픈 기억들처럼, 이 모든 것이 또다시 그녀를 지치게 하고 상처 입힐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카페는 사랑 때문에 유명해졌고, 이제 그 사랑 때문에 위협받게 되었다. 이 복잡한 감정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폭풍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