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준이 사라진 후에도 한여름은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짙은 남색 세단이 남긴 배기가스 냄새가 콧속을 맴도는 듯했다. 차갑고 단호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울렸다. ‘예상치 못한 복병.’ 그 말은 단순한 견제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처럼 들렸다.
한여름은 낡은 창문 너머 어둠 속으로 강하준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심장이 여전히 거세게 뛰었다. 블루밍 로맨스. 업계 최고를 노리는 대형 프랜차이즈의 대표. 그런 거물이 왜 하필 이 작은 동네 카페에, 그것도 문 닫을 시간에 찾아왔을까. 단순히 ‘썸 메뉴’의 인기를 견제하러 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단순한 경쟁심을 넘어선 묘한 탐색과 흥미가 섞여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찬 그녀에게, ‘썸’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이 갑작스러운 인기는 이미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그런데 이제는 ‘경쟁’이라는 또 다른 파도가 그녀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이 소박한 공간을 지키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 왜 이렇게 복잡한 소용돌이 속으로 그녀를 밀어 넣는 걸까.
삐걱이는 문을 잠그고 불을 끄자 카페 안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텅 빈 공간은 낮 동안의 북적임이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했다. 한여름은 익숙하게 앞치마를 벗어 걸고 카운터를 정리했다. 컵 하나하나를 닦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언제까지 갈까. 강하준의 말처럼 ‘유행에는 수명이 있는 법’이라면, 이 지긋지긋한 ‘썸 명소’라는 오명도 언젠가는 사라질까.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단순히 인기가 식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강하준이라는 변수가 생겼으니까. 그는 분명 이대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썸머스윗’ 카페 앞에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여름은 익숙하게 셔터를 올리며 굳은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어제 강하준과의 만남이 꿈이었던 것처럼, 카페 안은 다시금 핑크빛 기류와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사장님, 저 오늘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요! 썸 메뉴, 최고로 부탁드려요!"
새로 들어온 젊은 여성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그녀의 옆에는 어색하게 서 있는 남자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한여름은 그들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다. 그녀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받았다.
"오늘은 어떤 썸을 타실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사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인데, 뭔가 확실하게 진전시키고 싶어서요. 좀 더 로맨틱하고… 달콤한 분위기로 부탁드려요!"
한여름은 무표정한 얼굴로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섰다. 로맨틱? 달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강하준의 차가운 미소만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원두를 갈고 우유를 스팀했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음료는 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이 그녀의 아이러니한 운명이었다.
"여기요, '썸머스윗 로맨스'입니다."
그녀가 내놓은 음료는 부드러운 라테 위에 섬세하게 그려진 하트 모양의 라테 아트가 돋보였다. 여자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수줍게 웃으며 음료를 받아 들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미 썸 이상의 무언가가 피어나고 있었다. 한여름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카페는 오늘도 사랑의 큐피드가 되고 있었다.
"여름 씨, 오늘도 성황이네요! 이러다 진짜 '썸머스윗'이 아니라 '썸머러브' 카페로 이름 바꿔야겠어요!"
창가에 앉아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김도윤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카페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썸 메뉴 대신, 늘 마시던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림이나 그리세요."
한여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김도윤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어제보다 더 시니컬해진 것 같은데?"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한여름은 순간 당황했다. 김도윤은 늘 그랬다. 그녀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피곤?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데. 혹시… 어제 그 남자 때문이에요?"
김도윤의 말에 한여름은 들고 있던 행주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그를 쏘아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제 문 닫을 때쯤, 으리으리한 차 한 대가 서는 걸 봤거든요. 그리고 거기서 내린 남자가 여름 씨한테 말 거는 모습도 얼핏 봤고요. 딱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던데."
김도윤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남자가 혹시… '블루밍 로맨스' 대표인가요?"
한여름은 입을 다물었다. 김도윤의 촉은 언제나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걸 어떻게…"
"요즘 카페 업계에서 가장 핫한 이슈가 '썸머스윗' 카페의 예상치 못한 인기잖아요? 그리고 그 인기를 가장 견제할 만한 곳이 '블루밍 로맨스'고요. 대표 이름이 강하준이라는 것도 유명하고요. 연결고리가 너무 명확하지 않나요?"
김도윤은 스케치북을 덮으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강아지 같은 눈망울 속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했어요?"
한여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강하준이 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예상치 못한 복병’, ‘유행에는 수명이 있는 법’, 그리고 ‘곧 다시 찾아뵙게 될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그 남자가 우리 카페를 위협할 것 같아요. 이 작은 카페를 어떻게든 해코지할지도 모르고요."
김도윤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뭐 어때요? 여름 씨 카페는 여름 씨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잖아요. 그런 프랜차이즈랑은 차원이 다르죠."
"그런 말은 위로가 안 돼요. 그들은 자본과 조직력으로 무장한 대기업이나 다름없어요. 우리 같은 개인 카페는 한 번 찍히면 끝이라고요."
한여름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의감이 묻어났다. 그녀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떠올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그녀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고, 오직 이 카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위협받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름 씨. 제가 있잖아요."
김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이는 듯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제가 뭘 할 수 있다고."
"여름 씨는 몰라도, 여름 씨의 커피는 마법을 부리잖아요? 그 마법으로 강하준 씨의 마음도 녹여버리면 되죠!"
김도윤의 엉뚱한 말에 한여름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해맑은 미소는 그녀의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그때, 카페 문이 다시 열리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눈을 반짝이며 ‘썸 메뉴’를 외쳤다. 그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한여름은 다시금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이들의 기대감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썸을 응원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이 모든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오후가 되자 카페는 더욱 북적였다. ‘썸 메뉴’를 주문하는 손님들 외에도, 이미 썸을 타는 커플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여름은 정신없이 음료를 만들고 서빙하며 테이블 사이를 오갔다.
"사장님, 저 친구랑 오늘 처음 만났는데… 왠지 모르게 끌려요! 썸 메뉴 덕분인가 봐요!"
한 여성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옆에 앉은 남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한여름은 그들의 순수한 설렘을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는 사랑을 혐오했지만,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아직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불씨는 곧 강하준이라는 이름 앞에서 다시금 재로 변했다. 그녀는 손님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도, 강하준의 차가운 눈빛과 그의 경고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소박한 꿈은 이제 거대한 폭풍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카페 문을 닫으려던 한여름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여름 씨, 접니다. 강하준."
예상치 못한 그의 목소리에 한여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분명 ‘곧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전화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썸머스윗 카페'의 '썸 메뉴'에 대한 기사가 오늘 오전에 나갔더군요. 생각보다 파급력이 대단하던데요?"
강하준의 목소리에는 비즈니스적인 냉정함과 함께, 묘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한여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사? ‘썸 메뉴’에 대한 기사라면… 그녀는 강하준의 방문 이후 불안감에 휩싸여 인터넷 뉴스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기사…요?"
"네. '사랑을 이어주는 마법의 카페, 썸머스윗'이라는 제목으로요. 꽤 자극적이죠? 덕분에 저희 '블루밍 로맨스' 주가가 조금 출렁거렸습니다만."
그의 말에 한여름은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주가가 출렁거릴 정도의 파급력이라면, 단순한 온라인 게시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카페는 이제 단순한 ‘썸 명소’를 넘어, 전국적인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모르셨다니 의외군요. 하지만 이제 아셨으니, 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 쪽에서도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게 됐거든요. 조만간 공식적인 제안을 드리게 될 겁니다. '썸머스윗 카페'에 대한."
강하준은 말을 마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한여름의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강하준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공식적인 제안’. ‘썸머스윗 카페’에 대한 제안.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고 인터넷 검색창에 ‘썸머스윗 카페’를 검색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썸머스윗 카페, 썸 메뉴로 연애 성공률 100% 신화 달성?’, ‘MZ세대 열광! 사랑의 성지 된 썸머스윗 카페’, ‘대형 프랜차이즈 위협하는 동네 카페의 반란’.
기사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그녀의 카페를 ‘마법의 장소’로 포장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가 만든 ‘썸 메뉴’와 행복해하는 손님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댓글창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헐, 여기 진짜 대박이래! 나도 솔탈하러 간다!"
"블루밍 로맨스 긴장 타야 할 듯 ㅋㅋㅋ"
"개인 카페가 프랜차이즈 이긴다니, 드라마 아니냐?"
한여름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카페는 이제 단순한 입소문을 넘어, 언론과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은 곧 강하준이 말한 ‘공식적인 제안’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녀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일상은 이제 정말로 끝장이 난 것만 같았다. 사랑을 혐오하는 그녀의 카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때문에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고, 이제 그 사랑 때문에 거대한 기업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강하준의 ‘공식적인 제안’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의 카페를 집어삼키려는 무서운 계략일까, 아니면 이 모든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까.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어떤 폭풍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