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은 눈앞의 보고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분명 다 지운 줄 알았던 오탈자가 다시 붉은색 밑줄을 그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출 마감은 불과 5분 전이었다. 팀장님은 이런 사소한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분이셨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수정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때였다. 귓가에 쨍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풍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을 깜빡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한 사무실 풍경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니터 속 보고서는 아무런 오탈자 없이 완벽한 상태로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위치는 그가 오탈자를 발견하기 5분 전의 위치였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이재원은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했다. 착각인가?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어젯밤 늦게까지 작업한 탓이리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생각을 지웠다. 보고서를 다시 훑어보았지만, 더 이상 붉은 밑줄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제출했다. 최민준 팀장은 굳게 닫힌 입술을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재원은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 늘봄 기획 사무실은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이재원은 평소처럼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동료들의 뒤를 따랐다. 박선영 사원은 특유의 발랄함으로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텀블러가 들려 있었다. 늘 그렇듯, 보폭이 넓고 팔을 크게 휘두르는 버릇이 문제였다.
"선영 씨, 조심해요!"
그가 외치기도 전에, 박선영의 팔이 옆을 지나던 김 대리의 어깨와 부딪쳤다. 텀블러는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뚜껑이 열려 안에 있던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하얀색 셔츠를 입은 김 대리의 가슴팍에 고스란히 쏟아졌다.
"아악! 내 셔츠!"
"어떡해, 김 대리님! 죄송해요!"
박선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재원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런 작은 실수들이 쌓여 선영 씨를 위축시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때였다. 또다시 귓가에 쨍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시간이라도 멈춘 듯, 김 대리의 셔츠에 커피가 쏟아지기 직전의 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이재원은 눈을 비볐다. 분명 방금 전까지 커피가 쏟아져 있었는데. 그의 눈앞에는 텀블러를 든 채 김 대리와 부딪치기 직전의 박선영이 있었다.
‘설마… 5분 전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침의 그 이상한 경험이 떠올랐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박선영의 팔을 붙잡았다.
"선영 씨, 잠시만요!"
갑작스러운 이재원의 행동에 박선영은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김 대리는 박선영과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다.
"어? 재원 대리님, 왜요?"
박선영은 멀쩡한 텀블러를 들고 멀뚱히 이재원을 바라봤다. 이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아니, 그냥… 텀블러 뚜껑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려고요."
박선영은 자신의 텀블러를 확인하더니 활짝 웃었다.
"네, 잘 닫혔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시 밝게 웃으며 앞서 걸어갔다. 이재원은 그 뒷모습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방금 전에는 텀블러가 떨어져 김 대리 셔츠에 커피가 쏟아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 마치 그 5분간의 불행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퇴근길,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재원은 겨우 한자리를 찾아 앉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무료한 일상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은 매일이 똑같았다. 특별할 것도, 설렐 것도 없는 하루의 연속.
그때, 옆자리에 앉아 졸고 있던 여학생의 스마트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액정이 바닥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재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시 쨍하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여학생의 스마트폰은 바닥에 닿기 직전의 허공에 멈춰 있었다. 이재원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또 5분 전으로 돌아왔어…!’
이번에는 명확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불행’이 닥치기 직전에 시간이 되돌려진다는 것을.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잡았다. 여학생은 잠에서 깨어 눈을 비볐다.
"어? 제 폰이… 감사합니다!"
놀란 눈으로 스마트폰을 받아든 여학생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의 경험.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선명하고 반복적이었다. 보고서의 오탈자, 박선영 사원의 실수, 여학생의 스마트폰. 모두 누군가의 ‘작은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불행을 막기 5분 전으로 돌아갔다.
이재원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봤다. 그의 심장이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평범했던 그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능력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힘이 생긴 걸까. 그리고 이 능력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의 손안에 쥐어진, 5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 만들어낼 나비효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기묘한 능력은 그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숙명이 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5분 전으로 되돌아간 세상에서, 그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의 평범한 일상은 이제 특별한 기적을 품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재원은 익숙한 원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 침묵은 낮 동안 겪었던 기이한 일들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그는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었다.
‘5분 전으로….’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를 다시 재생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보고서. 두 번째는 박선영 사원의 텀블러. 세 번째는 지하철 여학생의 스마트폰. 공통점은 분명했다. 누군가의 ‘작은 불행’이 닥치기 직전, 시간은 정확히 5분 전으로 되감겼다. 그리고 그는 그 불행을 막을 기회를 얻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명백한 ‘능력’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특별한 존재가 되어본 적 없던 자신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힘이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내향적이고 소심한 자신이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늘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결핍이 이 능력을 통해 채워질 수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혼란도 밀려왔다. 왜 하필 5분일까?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걸까? 능력이 발동되는 정확한 조건은 무엇일까? 단순히 ‘불행’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혹시 자신이 직접 목격해야만 발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 인물에게만 한정되는 것일까?
그는 눈을 감았다.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이미 산산조각 난 듯했다. 하지만 그 파편 속에서, 그는 새로운 희미한 빛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기묘한 힘이 축복이든 숙명이든, 그는 이 능력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능력으로 인해 그의 평범한 삶에 작지만 소중한 의미가 더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에,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했다. 내일, 또 어떤 5분 전이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