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밤새도록 뒤척인 탓에 개운치 않은 아침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스마트폰 화면은 이제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뿌연 새벽빛에 묻혔다. 어제 겪었던 일들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선명한 잔상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5분 전으로. 그 세 글자가 마치 주문처럼 귓가에 울렸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을 더듬어 스탠드를 켰다. 따뜻한 주황빛이 원룸을 채웠다. 텅 빈 공간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더욱 고요하게 만들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침이 되니, 그 능력의 실체가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평범한 삶에 찾아온 균열. 그 균열 속에서 그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고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늘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던 일상에 갑자기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그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차가운 물로 얼굴을 몇 번 더 헹궜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컵에 담긴 시리얼은 우유에 불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제처럼 멍하니 있다가는 출근 시간도 놓칠 판이었다. 그는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고, 시선은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모든 사소한 움직임, 모든 작은 소음에 신경이 곤두섰다. 혹시 또 다시 ‘쨍’ 하는 소리가 들릴까 봐. 혹시 또 누군가의 ‘작은 불행’을 목격하게 될까 봐.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는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옆집 문이 열리며 꼬마 아이가 뛰쳐나왔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풍선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재원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풍선에 고정되었다. 혹시 저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 그것도 ‘작은 불행’에 속할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아이의 풍선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 아이는 풍선을 놓치지 않았고, 이재원의 능력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제 모든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길. 복잡한 인파 속에서 그는 더욱 예민해졌다.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넘어질 뻔하고, 물건을 떨어뜨리는 순간마다 그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능력은 어떤 기준으로 발동하는 것일까. 어제는 여학생의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발동했다. 그렇다면 저 할머니가 들고 가던 봉투가 찢어져 내용물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발동할까? 아니면 저 아이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순간에도?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주변을 살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지하는 레이더가 생긴 것 같았다.
정류장에 도착했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그가 타야 할 203번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버스에 오르기 위해 몸싸움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는 늘 그렇듯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때,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으로, 급하게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버스가 정류장에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문 쪽으로 달려갔다. 급한 듯 보였다. 아마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버스 문 바로 앞까지 다가섰을 때였다. 그의 발이 갑자기 삐끗했다. 길바닥에 튀어나온 작은 보도블록에 걸린 모양이었다. 남자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손에 들려 있던 서류 가방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가방의 잠금장치가 열리며 안에 있던 서류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남자의 절규가 귓가를 때렸다. 중요한 서류들이 바람에 흩어져 사방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몇몇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재원 역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남자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저 서류들은 분명 중요한 것이리라.
그때였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풍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는 듯한 기묘한 느낌.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버스 문을 향해 달려오던 남자가 있었다. 그의 발은 아직 보도블록에 걸리기 전이었고, 서류 가방은 굳게 닫힌 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또… 5분 전으로 돌아왔어!’
이재원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누군가의 ‘작은 불행’이 닥치기 직전이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남자가 보도블록에 걸리기 직전, 그는 재빨리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갑작스러운 이재원의 등장에 남자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그 순간, 그의 발은 보도블록을 무사히 지나쳤다. 버스는 이미 정류장에 멈춰 섰고, 문이 활짝 열렸다.
"저… 저한테 무슨 할 말씀이라도?"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재원을 바라봤다. 버스에 오르려던 다른 승객들도 두 사람을 주시했다.
이재원은 순간 당황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아무 이유 없이 사람 앞을 가로막은 꼴이 되었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아… 저, 혹시 넥타이가… 좀 풀리신 것 같아서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넥타이를 가리켰다. 남자는 자신의 넥타이를 내려다봤다. 깔끔하게 매여 있는 넥타이는 전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닌데요? 멀쩡한데요."
남자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재원의 얼굴은 화끈거렸다. 역시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버스 기사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네요!"
이재원은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는 재빨리 버스에 올랐다. 남자는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겨우 빈자리를 찾아 몸을 구겨 넣었다. 창밖을 내다봤다. 남자는 멀쩡히 자신의 서류 가방을 든 채 앉아 있었다. 서류들은 안전하게 가방 안에 담겨 있었다.
‘성공했다….’
이재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어설픈 변명으로 남자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서류는 무사했다. 이 작은 행동이 남자의 하루를 얼마나 바꿨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작은 불행’을 막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샘솟았다. 이 능력이 발동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단순히 ‘작은 불행’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추상적이었다. 그리고 왜 하필 5분 전일까? 1분도, 10분도 아닌 정확히 5분. 마치 누군가 정해놓은 규칙처럼 느껴졌다.
그는 버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출근길의 소동은 잠시 잊고, 그의 머릿속은 온통 능력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 능력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정말로 타인의 불행을 막기 위해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발현된 기이한 현상일 뿐일까.
늘봄 기획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최민준 팀장은 이미 출근해 있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박선영 사원은 아직 출근 전인 듯,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재원은 자신의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오전 내내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는 일부러 능력을 사용해 보려 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능력을 통제하는 방법을 몰랐고, 자칫 잘못하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들에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10시 정각, 박선영 사원이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그녀는 늘 그렇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이재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제처럼 텀블러를 들고 팔을 휘두르는 버릇은 없었다. 그녀는 오늘은 텀블러 대신 작은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처럼 갑자기 커피를 쏟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박선영은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 이게 뭐지…?"
그녀는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이재원은 무심코 그 서류 뭉치를 바라봤다. 표지에는 ‘긴급 보고서 - 마감: 오늘 12시’라고 적혀 있었다. 박선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세상에… 이걸 지금 발견하다니!"
그녀는 어제 퇴근 전에 팀장님에게서 받은 서류였다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보고서 마감은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최민준 팀장은 마감 시간을 엄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선영 씨, 무슨 일 있어요?"
이재원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박선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리님!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애써 밝은 척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재원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작은 실수가 또다시 그녀를 위축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재원의 귓가에 또다시 ‘쨍’ 하는 소리가 울렸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박선영의 손에 들린 보고서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보고서의 존재를 깨닫기 5분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도…!’
이재원은 망설였다. 어제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그녀의 ‘작은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박선영을 돕고 싶었다. 그녀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해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선영에게 다가갔다.
"선영 씨, 잠깐만요."
박선영은 고개를 들어 이재원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직 보고서의 존재를 알기 전의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네, 대리님?"
이재원은 그녀의 책상 위를 슬쩍 훑었다. 아직 보고서는 그녀의 눈에 띄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보고서를 알려줄 수 있을까.
"어제 팀장님이 선영 씨한테 주신 보고서 말이에요. 그거 오늘 12시까지 마감이죠?"
이재원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박선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서요? 저한테요? 아, 어제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는데…"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이 책상 위 서류 뭉치로 향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 맞다! 팀장님이 이거 꼭 오늘까지 해달라고 하셨는데!"
그녀는 다급하게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대리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박선영은 활짝 웃으며 이재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어렴풋이 기억나서요."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박선영은 곧바로 보고서를 펼쳐 들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절망감이 없었다. 대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려는 열정이 가득했다.
이재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어설픈 변명 대신, 좀 더 자연스럽게 상황을 해결했다. 그의 능력은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불행을 막을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통해 타인을 도울 수 있었다. 내향적이고 소심했던 그였지만, 이 능력 덕분에 그는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 능력은 왜 하필 자신에게 온 것일까. 그리고 이 능력은 어떤 ‘기준’으로 발동하는 것일까. 어제는 스마트폰, 오늘은 서류. 그 기준은 무엇일까. 단순히 ‘작은 불행’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세상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통해 균형을 맞추려는 듯했다.
이재원은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 속 글자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의 평범한 일상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손안에 쥐어진 5분이라는 시간은, 그의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이 능력의 근원과 목적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이제 이 능력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능력은 그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박선영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이재원에게 다가왔다.
"대리님 덕분에 보고서 무사히 마쳤어요! 점심 제가 쏠게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이재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재원은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도움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복도를 걷던 최민준 팀장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은 복도 끝에 걸려 있는 액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액자 속 사진은 늘봄 기획 창립 기념 사진이었다. 오래된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대표와 창립 멤버들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최민준 팀장은 사진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액자를 만지려 했다. 그때였다. 액자가 걸려 있던 벽면에서 작은 균열이 ‘쩍’ 하고 생겼다. 균열은 액자의 한쪽 고정 나사 부분으로 이어졌다.
이재원의 눈이 커졌다. 저 액자가 떨어지면? 오래된 사진은 분명 손상될 터였다. 그것도 ‘작은 불행’일까?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쨍- 하는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이재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능력은 발동되지 않았다. 최민준 팀장의 손이 액자에 닿기 직전, 액자는 흔들림 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액자를 바라봤다. 균열은 없었다.
‘왜…?’
이재원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방금 전에는 벽에 균열이 생겼고, 액자가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멀쩡했다. 마치 그 순간 자체가 그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는 최민준 팀장의 옆을 지나치며 액자를 다시 쳐다봤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최민준 팀장은 액자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재원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능력이 발동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그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작은 불행’의 기준이 단순히 물리적인 손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일까? 최민준 팀장의 쓸쓸한 표정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재원은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능력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하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발동하지 않기도 했다. 마치 그 능력 자체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해가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능력은 그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걸까.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겪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버스 정류장에서의 남자, 박선영 사원의 보고서, 그리고 최민준 팀장의 액자. 그의 능력은 분명 발동했지만, 마지막 상황에서는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주어진 임무’처럼 작동한다는 세계관 설정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의 능력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일까? 모든 ‘작은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의 능력이 발동되는 대상이나 조건에 어떤 숨겨진 규칙이 있는 것일까?
이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 준비를 했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그의 일상은 이제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5분 전으로 돌아가는 기적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나서며 복도 끝 액자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액자는 여전히 굳건하게 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보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균열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생긴 균열이었다. 그의 능력이 침묵한 이유. 그 미스터리는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이재원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능력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의 능력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리고 그는 이 능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할까.
그는 오늘 하루 동안 겪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버스 정류장에서의 성공, 박선영 사원에게 도움을 준 뿌듯함. 그리고 최민준 팀장 앞에서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던 혼란. 이 능력은 그의 삶에 기적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의문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작은 불행’을 막는 것을 넘어, 능력의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그리고 이 능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의 평범한 삶은 이제 거대한 수수께끼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5분 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에게 주어진 이 기묘한 힘은, 과연 그를 어디로 이끌어갈 것인가. 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심장이 묘한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다시금 두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스마트폰 화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넘겼다. 익숙한 앱 아이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삶에 찾아온 5분 전의 기적.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수많은 의문들을 품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 또 어떤 변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