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온은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가득 들어찬 공기에는 세계수의 흙냄새와 오래된 나뭇잎의 축축한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마력 측정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세계수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진동은, 그러나 그의 손에서는 너무나도 미약하게 느껴졌다. 화면에 떠오른 숫자는 언제나처럼 차갑고 무자비했다. 기준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 낙제. 그 두 글자가 그의 존재를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또 낙제야? 저 정도면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 아니냐?”
“쉿, 세레나 학생회장님 오신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엘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바닥에 박힌 뿌리 마루를 응시했다. 아카데미의 표준 마법사복은 그의 몸에 헐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왔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반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법을 발현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세계수의 생명력에서 비롯된 ‘생명수 마법’을 갈고닦을 때, 그는 그저 미약한 마력만을 휘두르다 실패하기 일쑤였다.
베리디안 아카데미는 세계수의 줄기와 가지 속에 건설된 거대한 도시였다. 속이 빈 가지는 교실이 되었고, 뿌리 틈새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다. 대강당은 거대한 잎사귀 캐노피 아래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교실 벽을 이루던 잎사귀 캐노피는 군데군데 찢겨 있었고, 뿌리 통로의 벽면은 껍질이 벗겨져 흉한 상처를 드러냈다. 아카데미의 심장이라 불리던 ‘생명수 핵’은 한때 찬란한 빛을 내뿜었지만, 이제는 희미한 잔광만을 내뿜으며 서서히 꺼져가는 심장처럼 맥동했다.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아카데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엘리온, 괜찮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은빛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세레나였다. 그녀는 항상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최고급 마법사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서는 미약하지만 강렬한 마력이 맴돌았다. 세계수 마법 연구에 깊은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이자, 아카데미 최고의 천재. 그녀는 모든 학생들의 존경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녀의 시선은 연민보다는 차가운 분석에 가까웠다.
“괜찮습니다, 세레나 학생회장님.”
엘리온은 겨우 대답했다. 그의 손에는 늘 흙먼지가 묻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릴 적부터 식물과 미약하게 교감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아카데미에서는 그것을 ‘마력 부족’으로 치부했다. 그는 누구보다 세계수의 쇠약을 피부로 느끼며 자랐다. 대지가 황폐해지고, 마법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자신이 낙제생이라는 사실이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엘리온은 아카데미의 외곽, 버려진 가지들 사이를 헤맸다. 이곳은 마력이 희박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메마른 가지들은 거대한 뼈대처럼 뻗어 있었고, 잎사귀는 이미 오래전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의 발걸음은 텅 빈 가지의 속을 울렸다. 이곳은 아카데미의 죽어가는 부분이었다.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 자신과 같은 곳이라고 엘리온은 생각했다.
그는 가장 굵고 오래된 가지의 끝에 닿았다. 껍질은 거칠고 갈라져 있었다. 마력이 완전히 끊긴 듯, 어떤 생명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온은 조용히 손을 뻗어 차갑고 메마른 가지의 껍질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아주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희미해서 착각이라고 생각할 법한 떨림이었다. 하지만 엘리온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마력이 아니었다. 생명수 마법의 강렬한 흐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잊힌 노래처럼, 희미하고 슬픈 울림이었다. 가지의 깊은 곳에서, 세계수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다른 무엇인가였다. 엘리온은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죽어가던 가지의 표면에 아주 미세한 초록빛이 번져나갔다. 그것은 빛이라기보다는, 아주 희미한 기운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미약한 파동이 가지의 껍질 아래로 스며들었다.
죽어가던 가지가,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엘리온은 숨을 멈췄다.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이것은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마법과는 달랐다. 기존의 마법사들이 세계수의 생명력을 ‘끌어내어’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것은 ‘교감’이었다. ‘연결’이었다. 세계수의 슬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그 안에 잠든 다른 무언가를 깨우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 세계를 구원할 열쇠는, 모두가 외면했던 바로 이 죽어가는 가지 속에 숨어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열쇠를 쥘 수 있는 사람은, 기존의 마법에 서툴러 낙제생 취급을 받던 자신, 엘리온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하고도 희망적인 예감이 그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그의 손끝에서, 죽어가던 가지의 미약한 초록빛이 조금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엘리온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흙먼지가 늘 묻어있는 듯한, 평범하고도 보잘것없는 손. 이 손이, 이 보잘것없는 마력의 소유자가, 지금 방금 세계수의 죽어가는 일부와 교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모든 이론을 부정하는 현상이었다. 마력이란 세계수의 생명력에서 직접 끌어내어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 양과 질에 따라 마법사의 능력이 결정되었다. 자신은 그 마력의 양이 극도로 적어 낙제생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마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계수와 소통했다. 그것은 마치 세계수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원초적이고도 깊은 연결감이었다.
어릴 적,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그는 종종 시들어가는 꽃잎이나 병든 나무에 손을 대곤 했다. 그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그 식물들의 슬픔이나 고통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드물게, 그의 손길이 닿은 식물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는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그의 그런 능력은 ‘마력 부족으로 인한 망상’으로 치부되었다.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에 깃든 연민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점점 더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지금, 이 죽어가는 가지와의 교감은 그때의 희미한 감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깊은 곳, 모든 마법의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인 거대한 뿌리로부터 솟아나는 듯한, 잊혀진 힘의 흔적이었다. 만약 이것이 정말 고대 마법의 일부라면, 아카데미가 수십 년간 매달려 온 ‘생명수 마법’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세계수가 서서히 죽어가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과 동시에 거대한 혼란이 휘몰아쳤다. 낙제생이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닐 것이고, 그의 이런 주장은 분명 이단으로 매도될 터였다. 세레나 학생회장처럼 뛰어난 천재들은 그의 말을 비웃을 것이고, 카이 교수와 같은 괴짜 학자들만이 어쩌면 귀를 기울여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온은 이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가지의 초록빛은 그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자, 그에게 주어진 무거운 사명이었다. 이 세계수의 슬픔을 이해하고, 이 잊혀진 마법을 통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거대한 운명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강하게 울렸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