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이노베이션 본사, 30층 AI 비서 서비스 개발팀 사무실은 언제나 활기로 넘쳤다. 하지만 그 활기는 이하은 팀장에게는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밤샘 작업으로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루나’ 프로젝트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팀장님, ‘루나’의 감성 인터페이스 모듈에서 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사용자 만족도 테스트 결과, 감정 인식률이 70%를 넘지 못하고 있어요.”
막내 김대리가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하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서른 번도 넘게 마주한 문제였다. ‘루나’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AI를 넘어, 사용자의 감정을 이해하고 교감하는 차세대 AI 비서 서비스였다. 그러나 가장 핵심인 감성 인식 기술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혔다.
“구체적인 오류 패턴은요?”
이하은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165센티미터의 날씬한 몸매에 완벽하게 재단된 블랙 슈트, 단정하게 정돈된 단발머리는 그녀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인지 보여주었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박힌 이목구비는 지적이고 냉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정 부정적인 감정, 특히 ‘불안’과 ‘좌절’에 대한 인식률이 현저히 낮습니다. 긍정적인 감정은 거의 완벽하게 인식하는데 말이죠.”
김대리의 보고에 이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몇 달간 매달려 온 프로젝트였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오직 실력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녀에게 ‘루나’의 성공은 단순히 팀의 성과를 넘어 자신의 존재 이유와도 같았다. 하지만 번아웃 직전의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힘이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코드와 알고리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들어섰다. 187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슬림하면서도 탄탄해 보이는 체격. 흐트러진 듯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에 편안해 보이는 니트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보통 넥스트 이노베이션 직원들이라면 칼같이 차려입었을 텐데, 그는 마치 주말 나들이라도 나온 사람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이 사무실을 한 번 스캔하더니, 이내 이하은의 자리로 향했다.
“저… 이하은 팀장님 맞으시죠?”
남자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이하은은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오늘부터 AI 비서 서비스 개발팀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 강우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진. 이름은 들어봤다. 회장님의 조카라는 소문이 파다한 낙하산 인턴.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판에, 쓸데없는 짐만 늘었다는 생각에 이하은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저런 옷차림으로 첫 출근이라니, 기본도 안 되어 있었다.
“강우진 씨. 여긴 회사입니다. 복장 규정은 숙지하셨나요?”
이하은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강우진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저는 편한 복장이 창의적인 사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요. 혹시 규정에 어긋났나요?”
그의 엉뚱한 대답에 이하은은 어이가 없었다. 창의적인 사고?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창의적인 사고가 아니라 당장 ‘루나’의 오류를 해결할 실질적인 능력과 시간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규정은 규정입니다. 그리고 강우진 씨는 인턴입니다. 인턴은 시키는 일을 배우는 자리이지, 본인의 철학을 펼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명심하세요.”
이하은의 말에 강우진의 눈빛이 살짝 변하는 듯했다.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빛나는 눈동자. 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팀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아까 말씀하신 ‘루나’의 감성 인터페이스 모듈 오류 말인데요.”
강우진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자 이하은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아는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강우진 씨는 이제 막 온 인턴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건 좋지 않은 태도이고, 업무에 대한 이해도 없이 섣불리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하은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강우진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좌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훨씬 복합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키워드 매칭이나 표정 인식을 넘어, 사용자의 상황과 과거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만 정확한 감정 인식이 가능할 텐데요. 혹시 ‘루나’의 알고리즘이 그런 심층적인 데이터 학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강우진의 말에 이하은은 순간 멍해졌다. 그건 바로 그녀의 팀이 몇 주째 고민하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였다. ‘루나’는 긍정적인 감정은 쉽게 학습했지만, 인간의 복잡한 부정적인 감정, 특히 그 미묘한 맥락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수많은 데이터셋을 뒤엎고 알고리즘을 수정했지만, 강우진이 방금 던진 질문처럼 명확하게 문제의 본질을 짚어낸 사람은 없었다.
이하은은 강우진을 다시 바라봤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저 엉뚱하고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인턴이, 어떻게 단 몇 분 만에 자신들이 몇 주간 헤매던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본 걸까? 단순한 우연일 리 없었다. 혹시 그가 정말 회장님 조카라서 미리 정보를 들었나? 아니면…
그때, 사무실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팀장, ‘루나’ 프로젝트는 잘 되어가고 있나? 내가 듣기론 감성 인식 모듈에서 문제가 좀 있다고 하던데.”
최지훈 팀장이었다. 183센티미터의 균형 잡힌 몸매에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슈트핏, 부드러운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은 모든 여성 직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명문대 출신에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그는 언제나 여유롭고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이하은은 그의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야망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하은의 ‘루나’ 프로젝트를 탐내고 있었다.
“최 팀장님. 저희 팀의 일입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하은은 딱딱하게 대답하며 강우진을 향해 눈짓했다.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강우진은 그 눈치를 알아챘는지 못 알아챘는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최지훈 팀장을 바라봤다.
최지훈은 강우진을 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
“아, 이분이 새로 오신 강 인턴이신가? 반갑습니다. 최지훈입니다.”
최지훈은 능숙하게 악수를 청했고, 강우진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남자의 눈빛이 짧게 교차하는 순간, 이하은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마치 두 개의 거대한 파도가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것 같았다.
“이 팀장, ‘루나’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의 핵심이죠.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우리 팀원들이 기술 지원을 해줄 수도 있으니.”
최지훈의 말은 마치 친절한 제안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는 ‘내가 너의 프로젝트를 언제든 가져갈 수 있다’는 은근한 압력이 담겨 있었다. 이하은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특히 최지훈의 도움은 더더욱.
“괜찮습니다. 저희 팀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하은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최지훈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그가 떠나자 이하은은 강우진을 노려봤다.
“강우진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턴은 인턴입니다. 본인의 주제를 파악하고 행동하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김대리에게 가서 기본적인 업무 시스템부터 배우세요. 쓸데없는 참견은 사양합니다.”
이하은의 차가운 말에도 강우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팀장님. 알겠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루나’의 감성 인식 모듈에 필요한 핵심 데이터는 아마… 팀장님 본인의 감정일 겁니다.”
강우진의 마지막 말은 이하은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충격이었다. 그녀의 감정?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이하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강우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긴 채 김대리를 따라 사라졌다.
이하은은 다시 홀로그램 스크린을 바라봤다. ‘루나’의 복잡한 알고리즘이 그녀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강우진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팀장님 본인의 감정일 겁니다.’ 그 말은 마치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번아웃 직전의 이하은, 그리고 회사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잠입한 미스터리한 인턴 강우진. 이들의 만남은 과연 ‘루나’ 프로젝트와 넥스트 이노베이션에 어떤 거대한 파장을 불러올까? 이하은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엉뚱한 인턴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