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한 공기가 눅진하게 내려앉은 초여름 저녁이었다.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 삐걱거리는 나무 간판이 흔들리는 소리 사이로, 낡은 바이닐이 내는 따뜻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멜로디 포르테’. 한소리는 턴테이블 위에서 조용히 돌아가는 LP판을 응시했다.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리듬에 맞춰, 재즈 피아노 선율이 가게 안을 나른하게 채웠다. 먼지 쌓인 LP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 진열장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낡은 가구들. 이곳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그녀의 전부였다.
손가락으로 턴테이블의 먼지를 닦아내던 소리는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는 무심하고 시니컬한 표정이었지만, 속은 타들어 가는 숯덩이 같았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밀린 임대료 고지서는 매일 그녀의 속을 긁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 음악 평론가였던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군 이 공간을 그녀는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디지털 음원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대에, 낡은 LP판을 고집하는 이 작은 가게는 그저 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사장님, 오늘 점심은 또 라면이에요?"
어느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인디 밴드 보컬 강하준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기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하준은 멜로디 포르테의 단골이자,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리를 돕는 유일한 조력자였다.
"너 같으면 라면이라도 먹어야지. 가게가 이 모양인데." 소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하준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누나. 제 밴드가 곧 대박 터뜨려서 여기 한방에 인수해 버릴게요. 그럼 누나는 평생 편하게 LP나 들으면 되잖아요." 하준은 허풍을 떨며 기타 케이스를 한편에 내려놓았다.
"헛소리 말고, 저기 쌓인 재고 정리나 좀 해. 그리고 네 밴드 대박 나기 전에 이 가게 문 닫게 생겼어." 소리는 핀잔을 주면서도, 하준의 말에 작은 위안을 얻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엉뚱한 동생은 그녀의 유일한 숨통이었다.
하준이 흥얼거리며 LP를 정리하는 동안, 소리는 다시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 빨간 글씨로 빼곡한 숫자들이 그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대로 주저앉아 아버지가 사랑했던 이 공간을 잃는다면, 그녀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음악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언어이자 삶의 이유였다.
그때였다. 멜로디 포르테의 삐걱거리는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빗소리를 뚫고 들어온 것은, 가게의 아날로그 감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슈트,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 그의 등장만으로도 가게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하는 듯했다. 소리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꼈다.
"어서 오세요." 소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가게 안을 한 번 훑어보더니, 곧장 소리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고, 마치 박물관의 유물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으로 LP판들을 훑었다.
"이곳에 희귀 LP 컬렉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감정이라곤 실려 있지 않은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소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희귀 LP요? 저희 가게는 그런 거 딱히 구분 안 합니다. 모든 음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니까요." 그녀는 그의 상업적인 접근 방식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의 'Lady in Satin' 초판, 록 밴드 퀸의 'A Night at the Opera' 일본 초판, 그리고 비틀즈의 'Yesterday and Today' 부처 커버 버전. 모두 소장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는 소리의 말을 무시하고, 정확한 목록을 읊었다. 그의 눈은 진열장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LP판들을 향해 있었다.
소리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언급한 LP들은 멜로디 포르테의 보물들이자,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희귀본들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손님, 저희 가게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판매 여부는 제가 결정합니다."
"물론이죠."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그 컬렉션을 저에게 파시죠. 가격은 충분히 맞춰 드리겠습니다."
소리는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은 지금 이 가게를 단순한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소중한 추억과 아버지의 열정이 담긴 공간을, 돈 몇 푼으로 흥정하려는 태도가 불쾌했다. "죄송하지만, 그럴 생각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이 가게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소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임대료도 몇 달 밀렸고, 전기세도 연체 직전이죠. 이대로라면 곧 문을 닫게 될 겁니다."
소리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그녀의 사정을 이렇게까지 꿰뚫고 있는 것일까.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상관이 있죠. 저는 유도진입니다. 넥서스 테크의 CEO죠." 그는 명함을 꺼내 소리 앞에 내밀었다. 소리는 명함을 힐끗 보았다. ‘넥서스 테크’. 요즘 가장 잘나가는 IT 대기업이었다. "그 컬렉션은 제게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게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게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제 눈에는 그저 낡고 비효율적인 공간으로 보일 뿐입니다. 제가 이 가게를 인수한다면, 당신은 그 컬렉션을 팔고 이 모든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리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가게를 인수하겠다고? 이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 보루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이 가게는 제 아버지의 유산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절대, 절대 이 가게를 팔지 않을 겁니다!"
유도진은 소리의 격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의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해야겠군요."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은 비웃음도, 미소도 아닌, 알 수 없는 의지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겁니다, 한소리 씨."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삐걱거리는 문이 닫히고, 유도진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소리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넥서스 테크의 CEO 유도진. 그가 이 낡은 레코드샵에 나타난 이유가 단순히 희귀 LP 때문일 리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소리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평화롭던 그녀의 일상에, 거대한 폭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는, 차가운 가면 아래 숨겨진 알 수 없는 남자, 유도진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 멜로디 포르테의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과연 그녀는 이 낡은 바이닐에 스며든 자신의 멜로디를, 그의 손아귀에서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녀의 멜로디는 이미 그의 등장과 함께, 예상치 못한 새로운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
문득, 가게 문이 닫히기 직전, 유도진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봉투에는 ‘멜로디 포르테 재정 보고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인쇄된 문구가 소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멜로디 포르테 인수 프로젝트 기획안’. 소리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이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가게를 통째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과연 이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아버지가 남긴 소중한 유산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인수 프로젝트’ 뒤에 숨겨진 유도진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