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닫히고 빗소리가 다시 가게를 채웠지만, 한소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에 쥐여 있던 유도진의 명함은 이미 구겨져 있었다. ‘멜로디 포르테 인수 프로젝트 기획안.’ 그 문구가 그녀의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단순한 희귀 LP 구매자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가게를 통째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누나, 왜 그래? 얼굴이 새파래."
하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소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서류 봉투가 사라진 문 쪽을 응시했다. 유도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리고 넥서스 테크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멜로디 포르테의 아늑한 공간을 집어삼키려는 듯 느껴졌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그녀의 유일한 보금자리. 그것이 지금, 돈과 권력을 앞세운 한 남자의 먹잇감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날 밤, 소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빗소리는 밤새도록 창문을 두드렸고, 그 소리는 마치 그녀의 불안한 심장 박동처럼 들렸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눈을 감으면 유도진의 차가운 눈빛과 ‘인수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가 그랬듯, 이 가게는 그녀의 삶이었다. 절대 내어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멜로디 포르테는 평소와 다름없이 문을 열었다. 낡은 턴테이블에서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재즈 선율이 흘러나왔다. 소리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카운터에 앉아 장부를 펼쳤다. 어젯밤의 충격은 그녀를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 몰아넣었다. 밀린 임대료, 전기세, 수도세. 빨간 글씨로 가득한 숫자들은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족쇄 같았다. 유도진이 알고 있던 그녀의 재정 상황은 정확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대체 어디까지 캐낸 걸까.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LP판을 팔아치우는 건 그녀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는 일과 같았다. 특히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희귀 컬렉션은 더더욱 그랬다. 그것들을 팔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굶어 죽는 게 나았다.
그때,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강하준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낡은 기타 케이스는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누나, 좋은 아침! 오늘 왠지 대박 예감인데?"
"헛소리 말고, 저기 먼지나 좀 닦아."
소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하준은 그녀의 기분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능숙하게 행주를 찾아 진열장의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가게 안에 퍼졌다. 그 소리가 잠시나마 소리의 찌뿌린 미간을 풀어주었다.
"누나, 어제 그 넥서스 테크 사장님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 진짜 재벌이었어?"
하준의 말에 소리의 손이 굳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라니! 누나, 혹시 대박 터진 거 아니야? 그 사람이 누나한테 가게 인수하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럼 우리 빚 다 갚고 부자 되는 건가?"
하준의 눈이 반짝였다. 소리는 그의 천진난만한 말에 한숨을 쉬었다. 하준에게는 유도진의 제안이 그저 ‘대박’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 이면에 숨겨진 차가운 계산과 그녀의 절박함을 그는 알 리 없었다.
"꿈 깨. 그딴 사람한테 이 가게 안 팔아. 절대." 소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누나도 참. 돈이 최고지! 근데 그 사람, LP 보는 눈은 진짜더라. 퀸 일본 초판이랑 빌리 홀리데이 초판은 나도 탐났는데."
하준의 말에 소리는 다시 한번 불쾌해졌다. 모두가 그저 ‘물건’으로만 보는 희귀 LP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들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숨결이 깃든, 살아있는 음악이었다.
오후가 되자, 멜로디 포르테에는 드문드문 손님들이 찾아왔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는 잊혀진 가수의 LP를 찾아 헤맸고, 젊은 연인은 서로에게 어울리는 LP를 골라주며 웃었다. 소리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유도진의 그림자를 잊으려 애썼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LP 관리법을 설명해주고, 각 음반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녀의 시니컬한 겉모습과 달리,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은 손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녀는 결국 정가보다 조금 더 깎아주거나, 덤으로 오래된 잡지를 끼워주기 일쑤였다. 하준은 그런 소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나, 이러다 진짜 망한다고. 적자 사장님."
"닥쳐. 이 정도는 서비스야. 손님들이 좋아하잖아."
소리는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손님들의 미소와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이 그녀에게는 어떤 이득보다도 소중했다. 그것이 그녀가 이 낡은 가게를 지켜야 하는 이유였다.
해가 저물고,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하준은 기타를 들고 인디 밴드 연습을 하러 나섰다. "누나, 내일은 꼭 맛있는 거 사줄게! 밴드 대박 나면!"
"그래, 꿈은 크게 가져라."
소리는 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사라지고 가게 안에 다시 정적이 찾아들자, 유도진의 그림자가 다시 그녀를 덮쳤다. 과연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압박해올까. 가게를 팔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결국 당신은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리는 늦은 시간까지 가게에 남아 장부를 다시 들여다봤다. 하지만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천만 원이 넘는 임대료 연체금, 쌓여가는 각종 공과금. 이대로는 한 달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진열장 한쪽의 희귀 LP 컬렉션으로 향했다. 빌리 홀리데이의 ‘Lady in Satin’ 초판.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음반이었다. 그녀는 LP판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이 한 장만 팔아도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건 아버지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닫힌 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에 손님일 리 없었다.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소리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혹시 유도진일까? 그녀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고리에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깔끔하게 재단된 봉투였다. 봉투에는 ‘멜로디 포르테 한소리 사장님께’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낯선 문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넥서스 테크 법무팀.’
소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봉투를 열자, 안에는 단 한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서류의 제목은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멜로디 포르테 매매 계약 이행 촉구 및 내용증명.’
서류의 내용은 간결하고 냉철했다. 어제 유도진이 제시했던 희귀 LP 컬렉션과 가게 인수에 대한 제안을 그녀가 거절했으므로, 넥서스 테크는 법적 절차를 통해 해당 자산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필요시 강제 매각 절차를 진행할 수 있음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소리의 눈에 박혔다.
‘귀사의 재정 상황과 채무 불이행 내역은 이미 충분히 파악되었습니다. 본 서류 송달일로부터 7일 이내에 당사의 제안에 응하지 않을 시, 법적 조치에 착수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소리의 손에서 서류가 스르륵 떨어졌다. 유도진은 그저 빈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다. 7일.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단 7일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다시 주워 들었다. 차가운 종이 한 장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멜로디 포르테. 아버지가 남긴 유산. 그녀의 전부. 그녀는 과연 이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멜로디를 지켜낼 수 있을까? 유도진의 차가운 미소와 함께 던져진 최후통첩은,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절박한 분노와 함께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투쟁심뿐이었다.
차가운 종이 조각이 바닥에 떨어진 채, 소리의 심장은 마치 얼음 송곳에 꿰뚫린 듯 아려왔다. ‘7일 이내에 당사의 제안에 응하지 않을 시, 법적 조치에 착수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유도진은 그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단순한 재벌 3세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약점을 꿰뚫어 보고, 가장 치명적인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었다.
소리는 텅 빈 가게 한가운데 서서 숨을 헐떡였다. 멜로디 포르테. 이 가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숨결이,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의 웃음소리가, 그리고 그녀 자신의 청춘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LP판 하나하나에 깃든 사연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얼마나 이 가게를 사랑했는지, 희귀 음반을 찾아 헤매던 그 설렘 가득한 눈빛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유산을, 고작 ‘넥서스 테크 법무팀’이라는 차가운 이름 석 자가 찍힌 종이 한 장으로 빼앗으려 하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동시에 절망감이 그녀의 발목을 묶었다. 천만 원이 넘는 임대료 연체금, 매달 불어나는 공과금. 현실은 그녀의 투지를 비웃는 듯했다. 그녀는 정말 한 달도 버티기 힘들었다. 유도진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녀가 궁지에 몰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도 안 돼…." 소리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어떻게 지켜냈는데…."
그녀의 눈길이 벽에 걸린 낡은 사진으로 향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린 그녀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멜로디 포르테의 간판이 들려 있었다. ‘음악은 영원한 친구란다, 소리야.’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이 가게는 그녀에게 음악이었고,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유도진, 당신이 뭔데…." 그녀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당신이 뭔데 내 아버지의 유산을, 내 삶을 함부로 하려고 해!"
그녀는 탁자에 놓인 서류를 다시 노려봤다. 넥서스 테크는 법적 절차를 통해 강제 매각을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막강한 자본력과 법률팀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아버지에게도, 자신에게도 평생 후회로 남을 터였다.
‘그래, 해보자. 어디 한번 해보자고.’
소리의 눈빛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시니컬하고 무뚝뚝한 겉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강인한 고집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7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 안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유도진의 차가운 계산과 달리, 이 가게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그녀는 그 가치를, 그리고 자신의 투지를 그에게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멜로디 포르테는 그녀의 멜로디였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장한 각오로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길고 지루한 밤이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