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전무의 방을 나온 신무결의 손에는 마케팅팀의 분기별 예산 집행 내역서가 들려 있었다.
10퍼센트 삭감.
말이 좋아 삭감이지, 이미 확정되어 집행 중인 기안에서 두 자릿수 비율을 덜어내는 것은 마케팅팀의 팔다리를 하나 자르는 것과 진배없었다. 오 전무는 신무결의 충성심과 수완을 시험하려는 심산이었겠지만, 천마로서 수많은 문파의 군량미와 영초 배분을 조율해 보았던 신무결에게 이 정도의 셈법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자리로 돌아온 신무결은 모니터를 켜고 마케팅팀의 최근 3개 분기 지출 내역을 화면에 띄웠다.
화면 가득 들어찬 복잡한 숫자들 사이로 기형적인 흐름이 보였다. 특정 대행사에 집중된 온라인 바이럴 마케팅 비용, 전환율이 미미한 디스플레이 광고의 지속적인 연장 집행, 그리고 실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플루언서 협찬 비용까지. 겉으로는 정교하게 포장되어 있었으나 알맹이를 까보면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새어 나가는 눈먼 돈이 적지 않았다.
신무결은 서류철을 챙겨 들고 마케팅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케팅팀 내부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임원실에서 예산 삭감 이야기가 흘러나왔다는 소문은 이미 팀원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신무결이 들어서자, 서류를 검토하던 마케팅팀 박 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신 대리님, 오 전무님 지시 때문에 오셨습니까?
박 과장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역력했다. 영업과 기획을 거치며 사내 입지를 다져온 신무결이지만, 남의 부서 곳간을 털러 온 불청객을 반길 실무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무결은 차분하게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내역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감정을 섞을 일은 아닙니다, 과장님. 위에서 떨어진 숫자는 10퍼센트지만, 실무를 망가뜨리면서 맞출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에 박 과장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말은 쉽지요. 이미 하반기 캠페인 라인업이 다 짜여 있습니다. 여기서 10퍼센트를 덜어내면 당장 신제품 론칭 프로모션 볼륨부터 줄여야 해요. 전환율 떨어지면 그 책임은 온전히 마케팅팀이 져야 하는데, 신 대리님이 책임져 주실 겁니까?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신무결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펜을 들어 내역서의 특정 항목들을 짚었다.
A 대행사에 집행된 키워드 검색 광고와 SNS 바이럴 용역비입니다. 지난 반기 데이터를 보면 클릭 대비 유입률은 높지만 실제 제품 구매 전환율은 0.3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반면 자체 콘텐츠로 유입된 인입은 전환율이 4퍼센트를 웃돌더군요.
박 과장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건… 브랜드 인지도를 위한 매체 노출 목적도 겸하고 있는 겁니다.
단순 노출이라면 더 저렴한 대체 매체가 충분히 있습니다. 관행적으로 동일 업체에 수수료 15퍼센트를 얹어 주며 갱신해 온 계약이죠. 이 대행사 수수료율을 재협상하고 비효율 매체 집행을 정리하면 전체 예산의 6퍼센트가 확보됩니다.
신무결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으나, 그 논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날카로웠다. 박 과장은 말문이 막힌 듯 서류와 신무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4퍼센트는 하반기 예정된 오프라인 팝업 행사 예산에서 조정하겠습니다. 전면 취소가 아닙니다. 본사 영업망과 연계하여 대관료 지원을 받는 구조로 바꾸면 마케팅팀 단독 부담분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니다.
박 과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어벽을 세우려던 그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결국 필수 캠페인은 건드리지 않고 군살만 도려내겠다는 거군요.
살을 내어주고 뼈를 깎는 싸움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케팅팀의 실적을 깎아 먹는 삭감은 저 역시 보고서에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무님이 납득할 만한 명분과 숫자, 그리고 실무진이 납득할 수 있는 효율입니다.
신무결은 서류를 덮었다. 박 과장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이내 씁쓸하면서도 납득했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 대리님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사람 숨통 트이게 찌르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대행사 쪽에는 오늘 바로 재협상 공문 보내겠습니다. 오프라인 행사 연계안은 기획안 정리해서 내일 오전 중으로 넘겨드리죠.
수고하십시오, 과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신무결은 마케팅팀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풍경은 고요했으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 경쟁은 강호의 혈투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손에 쥔 수정 예산안 초안을 가볍게 털어낸 신무결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이제 오 전무의 책상 위에 올려놓을 보고서를 완성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