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2화 · AI 작가 서가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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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밀랍이 떨어진 통지서에는 정갈한 신성 언어가 적혀 있었다.

마나 적성 불합격. 즉시 퇴학.

로간 바르도는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안경테를 슬쩍 밀어 올렸다.

건너편에 앉은 학사과 시험관은 찻잔을 덜컥 내려놓으며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짐은 해 질 녘 전까지 빼시오. 하급 필경사 집안 출신을 특별 전형으로 받아줬더니, 3년 내내 불씨 하나 못 피우다니."

시험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련도 묻어 있지 않았다.

루미나리스 아카데미는 제국에서 가장 순도 높은 마법사를 길러내는 요람이었다. 그곳에서 마나 총량이 일반인 수준에 불과한 결함자는 존재 자체가 오점이었다.

로간은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왼쪽 눈꺼풀 안쪽이 팽팽하게 죄어왔다. 남들은 그저 평범한 검은빛으로 보겠지만, 신성 언어로 적힌 글귀를 똑바로 응시할 때마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짙은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그의 시선이 통지서의 세 번째 줄에 멎었다.

신탁의 법률에 따라 작성된 퇴학 사유서. 문장 하나하나에 신전이 공인한 인과율의 주술이 깃들어 있었다.

"신탁 제4조 2항. 마법의 불꽃을 피우지 못한 자는 아카데미의 경계 밖으로 추방당하며, 그의 발걸음은 탑의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져 사지가 꺾이리라."

로간이 문장을 나지막이 읊조리자 시험관이 코웃음을 쳤다.

"신탁을 읽을 줄은 아는군. 그래, 정해진 운명이다. 얌전히 나가서 계단이나 조심하게. 쓸데없이 발버둥 치다 진짜 목뼈라도 부러지지 말고."

"시험관님."

로간이 책상 위의 깃펜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마나는 전혀 감돌지 않았지만, 펜촉을 쥐는 손아귀는 단단했다.

"이 문장에서 탑의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주어가 누구로 지정되어 있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당연히 퇴학당하는 너지."

"아닙니다."

로간의 왼쪽 눈이 서늘한 자줏빛으로 번뜩였다.

그의 시야 속에서 양피지 위의 금색 활자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신들이 남겼다는 완전무결한 문장 속에서 숨겨진 틈새가 또렷한 균열의 형태로 떠올랐다.

"고대 신성어의 격변화 규칙에 따르면, 수동태 분사구 뒤에 붙은 한정 대명사는 바로 앞의 명사구를 수식합니다. 여기서 바로 앞 명사는 불꽃을 피우지 못한 자가 아니라, 결정을 내린 주체인 아카데미의 경계입니다."

"뭐?"

"즉,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져 사지가 꺾여야 하는 대상은 제가 아니라, 이 결정을 물리적으로 집행하는 당신의 집무실입니다."

로간은 깃펜을 들어 양피지 하단의 쉼표 하나를 톡 찍어 눌렀다.

마나를 주입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문맥의 연결 고리를 논리적으로 끊어내는 위치에 정확한 비문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순간, 묵직한 공기가 집무실 안을 짓눌렀다.

콰지직!

시험관의 뒤편에 놓여 있던 거대한 대리석 책장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기울었다.

바닥의 석판들이 톱니바퀴처럼 엇갈리며 요동쳤고, 시험관이 앉아 있던 고급 가죽 의자의 다리 하나가 갑작스럽게 바스러졌다.

"으악! 이게 무슨!"

비명을 지른 시험관은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때마침 열려 있던 집무실 문을 향해 석재 파편과 서류 뭉치가 쏟아져 내렸다. 시험관은 그대로 문밖의 복도 계단을 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우당탕탕!

"커헉! 내 허리, 내 팔!"

계단 밑바닥에서 처절한 신음이 메아리쳤다. 사지가 꺾이리라는 신탁의 구절이 시험관의 몸을 통해 글자 그대로 성립된 순간이었다.

정작 문장의 주어에서 벗어난 로간은 흠집 하나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간은 손에 쥐었던 깃펜을 내려놓고 옷깃을 가볍게 털어냈다.

"문법 검수는 늘 꼼꼼히 하셨어야죠."

"대단하네. 신탁의 종속절을 비틀어서 주어를 치환하다니."

열린 문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간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단정하게 자른 은회색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금빛 눈동자를 지닌 여학생이 서 있었다. 허리춤에는 두꺼운 양장 주석서와 은색 깃펜이 가죽 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카데미의 상급생 제복이었지만, 옷깃에 달린 문장이 기이했다.

마법학부의 지팡이도, 연금술학부의 플라스크도 아니었다. 부러진 펜과 지워진 비문이 교차하는 불길한 낙인이었다.

"베로니카 폰 헤르츠 선배."

로간이 그녀를 알아보자, 베로니카는 계단 밑에서 끙끙 앓고 있는 시험관을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저 멍청한 집행관에게 네 퇴학 처분 취소 서류를 받아내러 왔는데, 수고를 덜었네. 이미 네 손으로 합법적인 사고를 위장해 버렸으니."

"퇴학 취소라고요?"

"정확히는 전과 조치지."

베로니카가 품에서 칠흑 같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판을 꺼내 로간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 위에는 붉은빛의 활자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듯 맥동하고 있었다.

"루미나리스 아카데미 지하 4층. 예언 정정학부. 오늘부로 네 소속이다, 로간 바르도."

로간은 석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왼쪽 눈이 전례 없이 강하게 욱신거렸다. 석판에 새겨진 문장은 단순한 아카데미의 학칙이 아니었다. 제국 어딘가에서 일어날 미래의 참극을 기록한 원전 예언의 파편이었다.

"신전에서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부르지. 절대적인 신의 뜻을 말장난으로 훼손하는 불경한 자들이라고."

베로니카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신들은 글을 너무 못 써. 허점이 넘쳐나고, 비문투성이에, 논리적 인과마저 엉망이지. 우리는 그 난잡한 문장을 교정할 뿐이야.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제가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부? 넌 방금 제국 공인 4급 신탁의 집행 대상을 멋대로 조작했어. 저 시험관이 정신을 차리고 이단 심문관을 부르면 넌 화형대행이야. 하지만 우리 학과로 오면 그 모든 게 공식 연구 실습으로 처리되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제안이었다.

로간은 책상 위의 흑요석 판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돌 표면을 만지는 순간, 손가락 끝을 통해 낯선 문장의 무게가 흘러들어왔다.

"학점은 잘 줍니까?"

로간의 덤덤한 질문에 베로니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살아남는다면 A를 주지. 따라와."

두 사람은 어두운 나선 계단을 타고 아카데미의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햇빛이 닿지 않는 지하 통로는 두꺼운 차폐 결계로 덮여 있어, 지상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잉크 냄새와 오래된 석회 냄새, 그리고 타는 듯한 유황 냄새가 뒤섞여 감돌았다.

철컥, 하는 육중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여기가 우리 강의실 겸 연구동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로간은 숨을 멈췄다.

수백 개의 거대한 석판들이 중력을 무시한 채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석판마다 새겨진 신성 언어들은 핏빛으로 빛나며 끊임없이 문장의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강의실 한구석에서는 붉은 머리를 짧게 깎은 거구의 남학생이 거대한 결계석을 온몸으로 짓누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베로니카 누님! 주석 수정 언제 끝납니까? 인과율 반동 때문에 방어 룬이 터지기 직전이라고요!"

남학생의 양팔에 새겨진 고대 방어 문신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입 닥치고 30초만 더 버텨, 펠릭스. 반작용 흡수 장치 출력 올린다."

베로니카가 벽면에 설치된 황동 레버를 거칠게 내렸다.

쿠웅 하는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천장에서 푸른 냉기가 쏟아져 내리며 결계석의 열기를 억눌렀다.

펠릭스라 불린 남학생은 그제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결계 마법 낙제했다고 이런 지옥으로 보낼 줄은 몰랐다고."

투덜거리던 펠릭스가 로간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구야? 새로 온 신입? 삐쩍 꼴아서 책장 하나도 못 넘기게 생겼는데."

"필경사 가문 출신이다. 눈으로 구문 오류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

베로니카는 짧게 대답하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둥둥 떠다니던 수십 개의 석판 중 가장 작고 붉은빛이 옅은 석판 하나가 그녀의 손짓을 따라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탁.

석판에는 단 세 줄의 신성 언어가 음각되어 있었다.

"신탁 분류 번호 병-104. 사흘 뒤 정오, 제국 남부의 카르단 마을에 하늘의 진노가 떨어져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화염이 마을 중심부를 삼키리라."

베로니카가 깃펜을 로간에게 내밀었다.

"이게 네 입학 시험이자 첫 실습 과제다."

"카르단 마을이라면 인구가 삼천 명은 되는 곡창 지대입니다."

로간이 담담하게 덧붙이자, 펠릭스가 질색하며 끼어들었다.

"그래! 신전 놈들이 발표한 진짜 멸망 신탁이라고! 저 빌어먹을 화염을 결계로 막으려다 내 팔이 타들어 갈 뻔했단 말이다!"

"결계로 막는 건 무식한 짓이지."

로간이 안경을 고쳐 쓰며 석판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왼쪽 눈이 짙은 자줏빛으로 번뜩이자, 석판 위의 문맥 구조가 뼈대만 남아 해체되기 시작했다.

"진노, 화염, 삼키다. 인과율의 핵심 단어는 화염입니다. 하지만 신성 언어에서 화염을 뜻하는 '이그니스'는 두 가지 어원을 가집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연의 파괴, 그리고 난방을 위해 제단에 피워 올리는 의식의 불꽃."

로간의 손가락이 석판의 두 번째 줄, 화염이라는 단어의 접미사를 짚었다.

"접미사의 모음을 장음에서 단음으로 미세하게 깎아내면, 이 문장은 국지적 대화재가 아니라 모닥불 소동으로 격하됩니다. 하늘의 진노 역시 신의 분노가 아닌, 가벼운 대기의 마찰열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말이 쉽지!"

펠릭스가 소리쳤다.

"그 단어 하나 바꾸는 순간 인과율의 반작용이 터져 나온다고! 현실이 문장을 거부하면서 생기는 그 반동을 네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버틸 필요 없습니다."

로간이 주머니에서 작은 흑연 펜을 꺼냈다.

"흘려보내면 됩니다. 인과의 충격을 흡수할 새로운 대상을 문장에 덧붙이면 되니까요."

로간은 거침없이 펜을 움직여 석판의 빈 여백에 아주 작은 보조 구문을 덧붙여 새겼다.

화염이 마을 중심부를 삼키는 대신, 마을 광장 한가운데에 버려진 젖은 장작더미만을 태우고 꺼지도록.

지직, 찌르르!

석판에서 맹렬한 불꽃이 튀었다.

인과의 법칙이 뒤틀리며 발생하는 거대한 척력이 로간의 손목을 강타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마나 회로가 뒤틀려 피를 토했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로간은 손목의 각도를 비틀며 충격의 궤도를 강의실 바닥의 차폐 룬으로 흘려보냈다.

파앙!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석판에 새겨진 붉은빛 활자가 온화한 주황색으로 변했다.

석판의 문장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사흘 뒤 정오, 카르단 마을 광장의 젖은 장작더미에 작은 불씨가 떨어져 연기 소동을 일으키리라.’

정적이 강의실을 감돌았다.

펠릭스는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채 로간과 석판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베로니카의 금빛 눈동자에는 짙은 흥미가 어렸다.

"합격이다."

베로니카가 펜을 돌려 꽂으며 말했다.

"하지만 안도하긴 일러. 문장을 수정했다는 건 신전의 감시망을 건드렸다는 뜻이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의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청동 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땡! 땡! 땡!

경고음과 함께 벽면의 결계가 푸른빛에서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신전 감사관이다."

펠릭스가 낯빛을 굳히며 허리춤의 방패를 움켜쥐었다.

"제길, 벌써 냄새를 맡고 지하로 내려온 건가?"

로간은 품에 흑연 펜을 갈무리하며 허공에 떠 있는 수백 개의 석판들을 올려다보았다.

새롭게 시작된 학과는 퇴학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프고, 피곤하며,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던 그의 뒤틀린 눈이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로간이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문 너머에서 차가운 성스러운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