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 너머의 울림은 묵직했다. 차가운 쇠사슬이 벽돌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발소리는 셋. 앞선 발걸음은 보폭이 넓고 뒤꿈치에 힘이 실려 있었고, 뒤따르는 둘은 보폭이 좁고 일정했다.
신전의 걸음걸이였다. 제국 전역의 대성당에서 복사 시절부터 발끝을 바르게 펴도록 훈련받은 사제들의 전형적인 보행법이었다.
"단열 결계 올려."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손가락이 허리춤의 양장본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펠릭스, 반작용 흡수 장치의 배출구를 환기구로 돌려. 증기가 차면 즉시 실습실 전체가 불법 연금술 연구 구역으로 등록돼. 수색 영장 발부 사유야."
"알았어요, 젠장. 방금 갈비뼈 금 간 게 아직 붙지도 않았는데."
펠릭스가 툴툴거리며 벽면으로 달려갔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팔뚝의 방어 룬에서 연기가 치익 뿜어져 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황동 밸브를 잡아 비틀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 아래로 유황 냄새를 품은 푸른 수증기가 빨려 들어갔다.
로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석판을 보았다.
주황색으로 잦아든 글자들은 얌전했다. 하지만 획의 끝자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어 하나의 모음을 깎아냈을 뿐이지만, 언어가 가진 본래의 무게가 허공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석판 둘레를 맴돌고 있었다. 신성 언어는 살아 있는 물질이었다. 문맥을 비틀어놓으면 그 문맥이 안착할 때까지 주변의 법칙을 갉아먹는다.
"저 석판은 어떻게 숨깁니까?"
로간이 물었다. 목소리는 고요했다. 계단 밑으로 시험관을 굴려 떨어뜨렸을 때와 똑같은 높낮이였다.
"숨기지 않아."
베로니카가 책갈피를 넘기며 말했다.
"신전 감사관의 눈을 속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형태로 눈앞에 던져주는 거야. 은폐 마법을 거는 순간 마나 감지봉이 울려. 펠릭스, 삼각 받침대 가져와."
펠릭스가 둔탁한 참나무 받침대를 끌고 와 테이블 정중앙에 쿵 내려놓았다. 베로니카는 수정된 석판을 받침대 위에 비스듬히 세웠다. 그리고는 허리춤의 은색 깃펜을 뽑아 석판 모서리에 새겨진 일련번호를 잉크로 덧칠했다.
"병-104가 아니라 정-012다. 이제 이건 남부 카르단의 대화재 신탁이 아니라, 수도 외곽 쓰레기 소각장의 화기 관리 점검용 모의 예언문이야."
"서류 조작은 중죄입니다."
"원래 있던 신탁의 글자를 바꾼 시점에서 우린 이미 사형감이야. 분류 번호 세 자리 고치는 건 경범죄 축에도 못 껴."
철문의 빗장이 덜컹거리며 거칠게 밀려났다.
끼이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차가운 밤공기, 그리고 짙은 백리향 향수 냄새였다. 신전 사제들이 피비린내와 유황 냄새를 가리기 위해 겉옷에 듬뿍 뿌리는 특유의 방취 향이었다.
세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선두에 선 남자는 순백의 예복 위에 은색 자수로 휘감긴 흉갑을 덧대고 있었다. 뺨이 홀쭉하고 입꼬리가 아래로 깊게 패인 중년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끝부분에 성은 구슬이 달린 감식봉이 들려 있었다.
그 뒤의 두 사람은 허리에 두꺼운 쇠사슬을 감은 이단 심문소의 호위 사제들이었다.
"지하 예배당으로 등록된 구역 치고는 공기가 대단히 탁하군."
감사관이 코를 찡그리며 감식봉을 바닥에 가볍게 내리쳤다. 맑은 금속음이 실내를 울렸다. 성은 구슬에서 희미한 백색 파동이 퍼져 나가며 바닥의 석판 틈새를 훑었다.
"루미나리스 아카데미의 지하 시설 관리가 이토록 엉망일 줄이야. 헤르츠 양, 자네가 아직도 이 음침한 곳에 틀어박혀 있다는 보고는 받았다만."
"오랜만입니다, 말콤 감사관님."
베로니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목례를 건넸다. 공손함 속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저희 연구실은 학장 직속의 신학 언어 주석 편찬실입니다. 감사관님께서 직접 지하 4층까지 왕림하실 사안은 없었을 텐데요."
"주석 편찬실이라."
말콤 감사관의 차가운 눈동자가 천장에 떠다니는 수백 개의 석판을 천천히 훑었다. 석판들 사이에서 미약하게 일렁이는 붉은빛들이 감식봉의 백색 파동과 부딪히며 자잘한 파열음을 냈다.
"대성당의 주석실은 높은 첨탑 꼭대기, 태양 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있지. 쥐새끼처럼 땅바닥을 파고들어 썩은 유황 냄새를 풍기는 곳에 있지 않네."
말콤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세워진 석판, 그리고 그 옆에 선 로간에게 멎었다.
"새로운 얼굴이군. 낯선 마나 파동인데. 아니, 마나라고 부를 만한 것조차 느껴지지 않는군. 껍데기만 인간인 실패작인가?"
로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말콤의 옷자락과 지팡이 끝을 관찰했다.
감식봉의 성은 구슬 안쪽에는 신성 언어로 정밀하게 새겨진 십자가 문양이 회전하고 있었다. 저것은 주변의 인과 왜곡을 감지하는 계측기였다. 문맥이 물리 법칙을 비틀어버렸을 때 발생하는 미세한 공간의 틈을 찾아내는 도구.
현재 석판에서 흘러나오는 왜곡의 찌꺼기는 로간이 바닥의 차폐 룬으로 밀어 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았다. 바닥 석판의 이음매 사이로 더운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번 학기 보조 필경사로 채용된 신입생입니다."
베로니카가 로간의 앞을 가로막듯 반 걸음 나섰다.
"지상 학부의 마나 적성 시험에서 결함 판정을 받아, 언어 해독 전담 인력으로 배치받았습니다. 학칙 제12조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한 학적 이동입니다."
"학칙 따위는 대성당의 율법 아래에 있다."
말콤이 감식봉을 들어 올려 테이블 위의 석판을 가리켰다.
"조금 전, 제2성소의 대예언석에서 균열 반응이 계측되었다. 남부 카르단 곡창 지대의 정화 신탁에 지정되어 있던 인과율의 축이 흔들렸지. 그 파동의 종착지가 바로 이 루미나리스 아카데미의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펠릭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펠릭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감사관 뒤에 선 호위 사제 둘이 즉시 허리춤의 사슬로 손을 뻗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신탁이 여기에 있나?"
말콤이 석판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의 눈이 좁아졌다.
"정-012? 쓰레기 소각장 모의 예언문이라고?"
말콤이 감식봉 끝을 석판 표면에 갖다 대려 했다. 성은 구슬이 석판의 획에 닿는 순간, 덧칠된 잉크 밑의 본래 문맥이 드러날 터였다. 잉크 아래 숨겨진 고대 신성어의 접미사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감사관님."
로간이 입을 열었다.
건조하고 평이한 목소리였다. 위기감도,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은 사무적인 어조.
말콤의 지팡이가 공중에서 멈췄다. 감사관의 불쾌한 눈길이 로간에게로 쏠렸다.
"낙제생 주제에 어디서 끼어드는 건가?"
"그 감식봉의 룬 배열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로간은 안경테를 가운데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왼쪽 눈동자가 짙은 자줏빛을 품고 가늘게 흔들렸다.
"뭐라고?"
"끝부분의 성은 구슬에 새겨진 정화 문구 말입니다. 빛은 어둠을 가르고, 계시된 진실은 허상을 태우리라. 맞습니까?"
말콤의 눈썹이 꿈틀했다.
"성소의 공인 장인이 새긴 성구다. 감히 하급 필경사 따위가 입에 담을 문장이 아니다."
"공인 장인이 문법을 틀렸습니다."
로간은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몽당 흑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빛은 어둠을 가르고에서 사용된 가르다라는 동사는 삼격 지배 동사입니다. 그런데 뒤따르는 계시된 진실은 허상을 태우리라의 태우다는 대격 지배 동사죠. 두 절을 대등 접속사로 묶으려면 가운데에 인과 보정 불변화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감식봉에는 그게 빠져 있습니다."
말콤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신성한 감식봉의 결함을 운운하며 시간을 벌려는 수작인가?"
"수작이 아닙니다. 인과 보정사가 빠진 성구는 외부의 미세한 마찰열을 모두 악의적인 왜곡 파동으로 오인합니다."
로간이 바닥의 돌 표면에 빠르게 구문 분석 기호를 그려 나갔다.
"감사관님께서 카르단 마을의 파동을 쫓아 이곳으로 오신 게 아닙니다. 이 감식봉이, 방금 펠릭스 선배가 환기구를 통해 뿜어낸 소각용 배출 증기의 단순 마찰열을 왜곡 신호로 잘못 번역한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호위 사제 한 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콤은 섣불리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쥐고 있는 감식봉의 둥근 구슬을 향했다.
구슬 안쪽의 십자가 문양이 불규칙하게 덜컥거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본래 푸른빛을 유지해야 할 은구슬의 표면에 엷은 붉은 기가 번져 있었다.
"그 증거로."
로간이 일어서며 바닥에 그린 도식을 툭 쳤다.
"지금 감식봉을 저 석판에 대시면, 석판에 적힌 젖은 장작더미라는 단어의 수분 성분 때문에 감식봉 내부의 룬이 과부하를 일으켜 성은 구슬이 깨질 겁니다. 삼격 지배 구문이 수격 명사와 충돌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반발 현상이죠. 장인에게 다시 수리를 맡기려면 대성당 재정관실에 최소 사백 골드의 손료 청구서를 올리셔야 할 텐데요."
실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로니카는 팔짱을 낀 채 입술 끝을 미세하게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펠릭스는 로간의 등 뒤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말콤의 턱 근육이 잘게 떨렸다.
그는 감식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석판을 찔러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이 정체불명의 학생이 지적한 문법적 오류를 경계할 것인가. 대성당의 감식 장비는 극도로 예민했고, 파손 시 책임은 고스란히 현장 감사관의 몫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법률과 문법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으로 악명 높은 헤르츠 가문의 영애와 그 수하들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말콤이 지팡이를 거두어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구슬은 더 이상 석판을 향하지 않았다.
"로간 바르도입니다."
"바르도. 제국 남부의 필경사 가문이군. 대대로 양피지에 코를 박고 글자나 베끼던 미천한 핏줄이, 감히 신전의 신성 언어를 분석하려 드는가."
"글자를 베끼는 일을 삼대째 하다 보면, 글자가 어디서 틀렸는지는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보입니다."
로간이 담담하게 받아쳤다.
말콤은 로간의 눈을 쏘아보았다. 로간의 왼쪽 눈동자는 이미 차분한 검은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전의 자줏빛 안광은 흔적조차 없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는 영락없는 마나 결핍자의 그것이었다.
"헤르츠 양."
말콤이 몸을 돌렸다.
"이번 분기 감사 보고서에 이 연구동의 불온한 공기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겠다. 카르단 마을의 신탁 문제는 본국 성소에서 다시 계측할 것이다. 만에 하나, 단 한 글자라도 이곳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말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로간에게 닿았다.
"자네의 그 잘난 혓바닥부터 뽑아 성소의 제단에 바치게 될 거다."
"언제든 환영합니다. 단, 소환장의 격변화 표기나 제대로 맞춰서 보내주십시오."
로간의 대꾸에 말콤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으나,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망토를 거칠게 휘감으며 철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두 명의 호위 사제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철문이 쾅 닫히고, 쇠사슬이 채워지는 육중한 소리가 복도를 타고 멀어졌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실내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셋. 둘. 하나.
베로니카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숫자를 셱 뒤,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갔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펠릭스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바닥을 주먹으로 쾅 쳤다.
"으아아! 진짜 모가지 달아나는 줄 알았네! 야, 신입! 너 진짜 제정신이냐? 감식봉의 문법이 틀렸다는 게 진짜였어? 구슬이 진짜 깨지는 거였냐고!"
"아닙니다."
로간이 테이블 위의 몽당 흑연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거짓말이었어?"
펠릭스가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되물었다.
"감식봉의 룬 배열은 완벽했습니다. 공인 장인이 만든 물건인데 문법 오류가 있을 리 없죠."
"그런데 왜 저 영감이 물러섰는데?"
"원래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에서 그럴싸한 학술 용어를 들이대면, 확신이 없는 권력자는 일단 의심부터 피하고 봅니다. 게다가 저 감사관의 옷깃을 보니 최근 대성당 감사부 내에서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있더군요. 장비 파손으로 감점을 받을 위험을 감수할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로간이 말콤의 예복 깃에 달린 세 개의 은색 단추를 눈여겨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마지막 단추의 실밥이 헐거워져 있었고, 그것은 최근 급하게 직급장을 교체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시기에는 누구나 보신주의에 빠진다.
"배짱 하나는 합격점이네."
베로니카가 다가와 로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로간의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문법이 완벽했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사기를 쳤단 말이지. 필경사 가문에서 자란 범생이인 줄 알았더니, 타고난 협박범이었어."
"사기가 아닙니다. 신성 언어의 다의성을 이용한 심리적 유도였을 뿐입니다."
"그걸 세상에서는 사기라고 부른다."
베로니카가 픽 웃으며 석판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깃펜 끝으로 주황색 글자들을 가볍게 긁어내자, 표면에 맺혀 있던 불안정한 마찰열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쨌든 카르단 마을의 대화재는 이걸로 막았어. 사흘 뒤 정오가 되면, 그곳 광장의 젖은 장작더미에서 연기가 좀 피어오르고 끝날 거다. 사상자 제로. 재산 피해는 땔나무 서너 단."
"실습 과제는 이걸로 끝난 겁니까?"
로간이 묻자, 베로니카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싹 걷혔다.
그녀는 말없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백 개의 석판들. 그것들은 여전히 핏빛으로 번뜩이며 불규칙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어떤 석판은 얼음처럼 푸른빛을 뿜었고, 어떤 석판은 흙먼지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발생할 지진, 역병, 가뭄, 폭풍의 각본들이었다.
"우리가 바꾼 건 모래 한 알에 불과해."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들이 쓴 멸망의 시나리오는 끝없이 갱신돼. 하나를 지우면 두 개가 생겨나지. 로간, 네가 방금 겪은 건 이 학과의 가장 시시한 일상일 뿐이야."
베로니카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장 높은 천장 구석, 어둠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거대한 석판 하나가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아래로 내려왔다.
다른 석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어른 세 명이 나란히 누워도 남을 만한 크기였다. 석판 표면은 온통 검게 그을려 있었고, 그 위에 새겨진 활자들은 단순한 붉은빛이 아니라 타오르는 불씨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석판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는 순간,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이건 뭡니까?"
로간이 왼쪽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왼쪽 눈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망막 안쪽에서 혈관이 터질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글자를 똑바로 바라보기도 전에, 문맥이 뿜어내는 거대한 살의가 온몸의 피부를 찌르르하게 긁어댔다.
"특급 신탁. 제국 멸망 편."
펠릭스가 진저리를 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양팔에 새겨진 방어 문신들이 일제히 푸른빛을 발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우리 학과가 지하로 쫓겨난 진짜 이유지. 지상의 대성당 놈들은 이 석판의 존재조차 몰라. 아니, 알아도 해석을 못 해."
베로니카가 석판의 첫머리를 가리켰다.
"읽어봐, 로간. 네 그 저주받은 눈으로."
로간은 안경을 벗었다.
시야가 흐려지는 대신, 문장의 윤곽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왼쪽 눈동자가 깊은 자줏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보통의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영혼이 타버렸을 신성 언어의 원형.
문장은 기괴하게 꼬여 있었다. 주어와 목적어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물고 뜯고 있었고, 술어는 존재하지 않는 시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들이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작정하고 설계한 논리적 독극물이었다.
"황력 842년 겨울."
로간의 입술 사이로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의 세 번째 별이 루미나리스의 대탑으로 떨어질 때, 잠든 심연이 눈을 뜨고 제국의 심장을 반으로 가르리라."
"황력 842년 겨울이면."
베로니카가 로간의 말을 이어받았다.
"바로 이번 학기 기말고사 기간이다. 두 달도 남지 않았어."
"대탑이라면,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로 이 아카데미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이 석판의 예언이 실현되면 루미나리스 아카데미는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제국 수도의 절반이 땅 밑으로 가라앉아."
베로니카의 금빛 눈동자가 타오르는 석판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우리의 기말 과제는 이 석판의 문장을 해체하는 거다. 문법적 오류를 찾아내고, 인과의 고리를 끊어내서, 멸망을 취소시키는 것."
로간은 석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문장의 구조는 끔찍할 정도로 견고했다. 방금 전에 손보았던 카르단 마을의 신탁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접속사 하나, 모음 하나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그 반작용이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로간의 눈동자가 문장의 한가운데, 세 번째 줄의 불규칙한 공백에 멎었다.
"베로니카 선배."
"왜."
"이 문장, 누군가 이미 한 번 손을 댔습니다."
베로니카와 펠릭스의 시선이 동시에 로간에게 꽂혔다.
"무슨 소리야? 이 석판은 결계로 봉인되어 있었어. 학장님과 나 외에는 아무도 손을 댄 적이 없다고."
"아닙니다."
로간이 손가락을 뻗어 석판의 갈라진 틈을 가리켰다.
"하늘의 세 번째 별이라는 단어 뒤에, 아주 미세하게 깎여 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고대 성어의 삭제 부호입니다. 누군가 원래 적혀 있던 진짜 주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세 번째 별이라는 가짜 주어를 덮어씌웠습니다."
베로니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어를 바꿔치기했다고? 멸망의 원인을 조작했다는 뜻이야?"
"누군가 이 아카데미를 의도적으로 파멸의 표적으로 지정했다는 뜻입니다. 신들의 각본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정적이 다시 한번 연구실을 짓눌렀다. 허공에 떠 있던 수백 개의 석판들이 일제히 낮은 비명을 지르듯 웅웅거리며 흔들렸다.
로간은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왼쪽 눈의 보랏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퇴학을 피하려 들어온 곳이었다. 조용히 학점이나 채우고 한적한 시골 영지로 내려가 안락하게 늙어 죽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양피지의 판도는 이미 평온한 여생 따위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신탁은 조작되었고, 그 조작된 파멸의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었다.
"선배."
로간이 석판의 모서리를 툭툭 쳤다.
"이 과제, 학점 인정 배점이 어떻게 됩니까?"
베로니카가 멍하니 로간을 바라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공 필수 6학점이다. 낙제하면 우리 셋 다 관짝으로 들어가는 절대 평가고."
"나쁘지 않군요."
로간은 주머니에서 흑연 펜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돌렸다.
"일단 강의 계획서부터 다시 작성해야겠습니다. 가짜 주어를 지운 놈의 필적부터 찾아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