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연애, 우리 집을 부탁해 · 총 2화

제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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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의 햇살이 서울 마포구의 낡은 상가 2층, ‘소담 디자인’ 사무실 안으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가 쌓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은 활기찼지만, 사무실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쓸쓸했다. ‘소담’이라는 이름처럼 아늑하고 정감 있는 공간을 꿈꿨던 한소연의 바람과는 달리, 이곳은 폐업을 앞둔 작은 상점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그녀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의 스프링이 삐걱이는 소리는 그녀의 지친 마음을 더욱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빨간 글씨로 ‘최종 독촉장’이라고 적힌 고지서가 들려 있었다. 지난 몇 달간 밤샘 작업과 발품을 팔아 얻어낸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규모가 작거나, 계약 단계에서 무산되기 일쑤였다. 유명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거대한 건축물 대신 사람의 온기가 담긴 아늑한 공간, 즉 ‘집’을 ‘가정’으로 만드는 디자인을 꿈꿨던 그녀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했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독촉장의 차가운 종이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하아..."

소연의 눈은 침침한 사무실 구석에 놓인,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던 작은 스케치 모형들을 향했다. 따뜻한 색감의 패브릭, 자연 소재의 가구, 그리고 공간마다 이야기가 담긴 듯한 배치. 그녀의 디자인은 분명 특별했고, 감성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신입 디자이너’라는 꼬리표와 ‘소담 디자인’이라는 무명의 사무실은 그 빛을 세상에 드러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애정을 쏟아 만들었던 나무 모형의 작은 집이 먼지 속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그녀의 희망처럼,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정말... 여기까지인 걸까?"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 목소리가 떨렸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였지만, 쌓여가는 독촉장과 텅 빈 통장 잔고는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소담 디자인’을 성공시키고 싶다는 고집이 그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듯했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사무실의 덩치 큰 책상과 의자들 사이에서 더욱 왜소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은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낡은 책상 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찢어질 듯한 벨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을 가르며 그녀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앉게 했다. 발신자는 대학 선배이자 현 ‘ARTISAN’ 인테리어 디자인팀 팀장인 유은찬이었다. 그의 이름이 액정에 뜨자마자 소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유은찬은 늘 그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그의 이름만 봐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선배..."

"소연아, 잘 지내? 요즘 통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유쾌했다. 그 목소리가 짓누르던 어깨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네... 그냥 좀 바빴어요."

소연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피로감은 숨길 수 없었다. 은찬은 그녀의 거짓말을 눈치챈 듯했다.

"바쁘긴. 또 밤새 고민만 하고 있었겠지. 너희 사무실, 아직도 그 모양이냐?"

장난스러운 비난 속에서도 걱정이 묻어나는 은찬의 말에 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선배..."

"농담이야. 근데 진지하게, 네 디자인은 정말 아깝단 말이야. 사람들이 알아주기만 하면 대박 날 텐데."

은찬의 따뜻한 격려에 소연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누군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메마른 마음에 따뜻한 물 한 방울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선배,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요? 제가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소연아, 아직 포기하긴 일러. 네 디자인은 빛을 볼 거야. 나도 계속 괜찮은 프로젝트 있으면 너한테 연결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좌절하지 마."

은찬의 단단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박혔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은찬과의 통화는 그녀의 마음에 작은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야. 나는 할 수 있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쥐고 있던 독촉장이 구겨질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자신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는 듯한 결연한 의지였다.

그때,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익숙하지 않은 번호였다. 발신자 표시에는 ‘ARCHI-K’라고 찍혀 있었다. ‘ARCHI-K’는 강태준 건축가가 운영하는 국내 최고 수준의 건축사무소였다. 소연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혹시 스팸 전화일까, 아니면 잘못 걸려온 전화일까 하는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소연 디자이너님 되십니까? 저는 ARCHI-K 강태준 건축가 비서실입니다. 저희 강태준 건축가님께서 한소연 디자이너님의 포트폴리오를 보시고, 개인 펜트하우스 인테리어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침착하고 전문적인 목소리에 소연은 잠시 멍해졌다. 강태준 건축가라니. 국내 건축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그가, 폐업 위기에 처한 자신의 사무실에, 그것도 개인 펜트하우스 인테리어를 제안하다니. 믿기지 않는 소식에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절망의 끝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다시금 타오르는 희망의 불꽃이 교차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네... 네! 감사합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소연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의 피로도, 마음의 좌절감도 한순간에 잊어버린 듯했다. 그녀의 눈은 다시 생기로 가득 찼다. 침침했던 사무실의 공기가 갑자기 맑아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 프로젝트가 ‘소담 디자인’을 살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동시에, 왜 강태준 건축가 같은 거물이 무명의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희망의 빛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일 있을 강태준과의 만남을 위해, 낡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하기 시작했다. 펜과 종이를 찾아 책상을 뒤적이는 손길이 다급했다. 이 만남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는 예감은 아직 그녀의 의식 속에 분명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 그저, 꿈에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다는 기쁨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그녀를 감쌌을 뿐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낡은 사무실 안을 부산하게 오갔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단단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다음 날 오전, 한소연은 서울 강남의 최고급 빌딩에 위치한 ‘ARCHI-K’ 사옥 로비에 들어섰다. 전날 밤, 강태준과의 만남을 위해 밤늦게까지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시뮬레이션하며 잠 못 이루던 그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어젯밤의 결의는 여전했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압도적이었다. 대리석과 유리로 꾸며진 로비는 마치 거대한 얼음 궁전처럼 차갑고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 너머로 강남의 빌딩 숲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고, 반짝이는 크롬 장식들은 빛을 반사하며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그녀가 늘 작업하던 낡고 정감 있는 ‘소담 디자인’ 사무실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자동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그 정적 속에서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소연은 어색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폐업 위기 속에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아껴 입던 정장을 꺼내 입었지만, 이곳의 압도적인 분위기 앞에서는 마치 초라한 연습생처럼 느껴졌다. 어깨에 멘 낡은 가죽 가방이 유난히 돋보이는 것 같아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손에는 며칠 밤을 새워 정리한 포트폴리오가 든 서류 가방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동시에, 너무나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듯한 위화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낯선 공간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마치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소연 디자이너님 되십니까?"

단정하게 차려입은 비서가 다가와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녀를 안내했다.

"강태준 건축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강태준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길고 고요했다. 복도 양옆으로는 강태준이 설계한 건축물들의 모형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차갑고 이성적인,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거대한 콘크리트와 날카로운 직선, 최소한의 장식으로 이루어진 공간들은 기능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소연은 그 작품들을 보며 자신의 디자인 철학과 강태준의 그것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따뜻함과 온기를 추구하는 자신과는 달리, 강태준은 철저하게 기능과 미학적 완벽함을 지향하는 듯했다. ‘과연 이런 그가 왜 자신의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을까?’ 하는 의문이 더욱 커졌다.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소연은 숨을 들이켰다. 창밖으로 강남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압도적인 공간.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통유리창 앞에는 거대한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뒤로 강태준이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이 공간의 일부인 양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 얼음장 같은 차가운 눈빛, 187cm의 훤칠한 키에 최고급 맞춤 슈트를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의 완벽한 외모는 보는 이를 압도했고, 소연은 저절로 목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손바닥에 다시금 땀이 배어났다.

"안녕하세요, 한소연입니다."

소연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그녀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강태준은 그녀의 인사에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볼 뿐이었다. 마치 상품을 평가하듯,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그녀를 관통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워서, 마치 몸속의 모든 온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앉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마치 얼음 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소연은 그가 가리킨, 유리 테이블 건너편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의자의 차가운 가죽 감촉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강태준은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펼쳐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연의 심장은 더욱 격렬하게 뛰었다. 종이 스치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리는 듯한 적막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거슬렸다.

"한소연 씨의 포트폴리오는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따뜻한 감성'이라는 점에서는 나름의 개성이 엿보이더군요."

칭찬인 듯했지만, 그의 어조에는 비꼬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소연은 불쾌했지만, 이 중요한 자리에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제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저는 '집'을 '가정'으로 만드는 디자인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 펜트하우스는 완벽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효율적이고, 미학적이며, 어떤 감정도 개입되지 않은."

강태준의 직설적인 비난에 소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말은 그녀의 디자인 철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폐업 위기에 놓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오랜 좌절감과 함께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소담 디자인’을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만, 자신의 신념까지 짓밟히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연은 떨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또렷하게 밝혔다. 그녀는 강태준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집은 단순히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물리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고, 추억을 쌓고, 감정을 나누는 곳입니다. 제 디자인은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춥니다. 완벽하고 차가운 공간이 아니라, 사용자의 삶을 품어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저의 철학입니다."

그의 눈에는 한순간 흥미로운 빛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강태준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응시했다.

"흥미롭군요. 하지만 저는 감정적인 공간보다는 이성적인 공간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한소연 씨의 디자인은... 너무 미숙합니다. 당신의 사무실이 폐업 직전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소연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치부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강태준의 태도에 모멸감마저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뒤섞여 그녀의 마음을 휘저었다. 심장이 발밑까지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에게 이 프로젝트를 제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왜 저를 부르신 거죠?"

소연은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목이 메어왔다. 강태준은 그녀의 질문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승자의 미소였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건 지금부터 설명해드리죠. 한소연 씨에게는 '인테리어 계약' 외에, 또 다른 '계약'이 필요할 겁니다."

그의 말에 소연의 심장이 다시 한번 철렁 내려앉았다. 인테리어 계약 외에 또 다른 계약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만남은 단순한 프로젝트 제안이 아니었다. 강태준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그녀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다음 말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분명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강태준의 집무실은 여전히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그의 마지막 말, "또 다른 '계약'이 필요할 겁니다"는 한소연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강태준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기울며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우는 듯했다. 그의 완벽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잘 짜인 각본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그는 다음 대사를 읊조렸다.

"저는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이 필요합니다. 완벽하지만 차갑고, 인간미가 없다는 평가는 저의 사업 확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필요한 건… 저의 차가운 펜트하우스에 '따뜻함'을 불어넣어 줄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동시에 대외적으로 저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가짜 약혼녀'입니다."

강태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연의 귀가 멍해졌다. ‘가짜 약혼녀’. 그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탄처럼 터졌다. 인테리어 계약이 아니라, 가짜 연애라니. 그녀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폐업 위기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이런 황당하고 모욕적인 제안을 하다니. 분노와 함께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리며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듯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입니다! 제가 왜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까? 건축가님은 지금 저를 모욕하고 있는 겁니다!"

소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지만, 강태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모욕이라뇨. 저는 엄연히 '계약'을 제안하는 겁니다. 한소연 씨의 사무실은 폐업 직전이고, 당신의 디자인 철학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힐 위기에 처해있죠. 이 제안은 당신에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기회입니다. 당신의 사무실을 살리고, 당신의 디자인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강태준은 차분하게 그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의 말은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맞다. 그녀는 지금 절박하다. ‘소담 디자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짜 약혼녀’라니.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과 신념을 송두리째 짓밟는 일이었다. 그녀의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연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과, 사랑하는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 현실적인 책임감 사이에서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뜨거운 액체가 눈시울을 적셨지만, 강태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의 작은 두 손은 무릎 위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당신의 사무실 부채는 물론, 앞으로의 운영 자금까지. 그리고 제 펜트하우스 인테리어는 당신의 포트폴리오에 가장 빛나는 한 줄이 될 겁니다. 물론, '가짜 약혼녀' 역할에 대한 보상도 아낌없이 드리죠. 이 계약은 당신의 사무실을 살릴 유일한 기회입니다."

강태준은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된 듯한 계약서 한 부를 밀어 넣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표지에는 ‘ARCHI-K’ 로고가 선명했고, 그 아래 ‘인테리어 프로젝트 계약서’와 ‘가짜 연애 계약서’라는 문구가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절망과 혼란, 그리고 한 줄기 희망이 뒤섞여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눈을 감자 어두운 사무실에 홀로 앉아 독촉장을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과, 유은찬 선배의 따뜻한 목소리가 번갈아 떠올랐다.

‘선배는… 포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유은찬 선배의 격려가 귓가에 맴돌았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이런 식으로라도 기회를 잡으라는 뜻이었을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태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그는 이미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소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존심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소담 디자인’이라는 이름만은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열정과 꿈이 담긴 그 작은 공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차가운 건축가의 펜트하우스에 자신의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는 것이, 디자이너로서의 또 다른 도전이자 성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목울대가 서너 번 울렁였다.

"알겠습니다… 계약하겠습니다."

결국 소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영혼을 팔아넘기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강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만족스러운 미소였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차갑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죠. 계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비서가 다시 안내할 겁니다. 그리고… 한소연 씨는 오늘부터 제 약혼녀입니다."

강태준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폐업 위기에 놓인 사무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는 ‘가짜 연애’라는 거대한 계약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자존심의 상처,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알 수 없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미약한 기대감. 늦은 오후의 햇살이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집무실 안은 어둠이 짙게 깔렸다. 한소연은 차가운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비장한 모습으로,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