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만, 한때 잘나가던 채널이었다. 지금은 폐지 직전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텅 빈 스튜디오, 낡은 조명 아래 앉은 주지아는 푹 꺼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아의 연애 실험실’이라는 채널명이 붉은 글씨로 깜빡이는 노트북 화면이 있었다. 조회수는 바닥을 쳤고, 댓글 창은 ‘뻔하다’, ‘지겹다’, ‘이제 그만해라’는 비난으로 가득했다.
"이게 다 내가 꿈꾸던 연애가 아니어서 그래."
지아는 중얼거렸다. 한때는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전하겠다며 이상적인 연애 콘텐츠를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사람들은 진짜보다 더 자극적이고, 가짜여도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야기에 열광했다. 진정성을 외치던 그녀의 채널은 시대착오적인 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망할 수는 없어. 절대로."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다가 이내 단단하게 굳었다. 그래, 마지막이다. 모든 걸 걸어야 한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가짜 연애 리얼리티’. 제목만으로도 파격적인 기획안이 화면에 채워졌다. 진짜 사랑을 꿈꾸는 내가, 가짜 연애를 만들어야 한다니. 아이러니했지만, 이 방법만이 살 길이었다.
며칠 뒤, 지아는 서울의 한 고급스러운 루프탑 바에서 ‘관계 컨설팅 에이전시’라는 곳의 대표를 만났다. 그녀의 기획안을 들은 에이전시 측은 한 명의 파트너를 제안했다. 이름은 이안. 지아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적인 외모, 날렵한 턱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완벽이라는 단어가 인간으로 형상화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터였다.
"이안 씨는 '가짜 연애 전문가'입니다. 고객의 니즈에 맞춰 최적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죠."
에이전시 대표의 설명은 마치 차가운 비즈니스 협상 같았다. 전문가? 가짜 연애에 전문가가 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사진 속 남자의 무심한 표정은 그가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지아는 왠지 모를 위화감과 동시에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느꼈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채널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살려야 했다.
그렇게 이안과의 첫 만남이 성사된 날. 약속 시간 정각에 나타난 그는 사진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훤칠한 키에 모델 같은 비율, 무심한 듯 시크한 블랙 수트는 그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지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주지아 씨."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계약에 의거해서요."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지아는 그의 완벽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남자는 진짜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의 진짜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
"계약 조건은 간단합니다. 제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따르세요. 그리고 그 어떤 사적인 감정도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안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사적인 감정 개입 금지라니. 가짜 연애를 기획했지만, 그녀는 결국 진짜 사랑을 꿈꾸는 몽상가였다. 그에게는 그저 완벽한 ‘연기’일 뿐이겠지만, 지아는 벌써부터 이 프로젝트가 그녀의 감정을 어떻게 뒤흔들지 예측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지아의 연애 실험실’ 스튜디오는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가짜 연애 리얼리티’ 프로젝트의 첫 촬영 날이었다. 지아는 잔뜩 긴장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대본보다 더 완벽한 ‘남친’ 연기를 선보이는 이안이 있었다.
"지아 씨, 오늘 정말 예쁘네요."
그의 시선이 지아의 눈에 닿았다.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보였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다. 지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분명 연기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그녀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 고마워요."
지아는 겨우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완벽하게 계산된 듯 보였지만, 동시에 지아의 심장을 꿰뚫는 듯한 묘한 매력이 있었다.
첫 번째 가짜 데이트 촬영은 성공적이었다. 아니,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영상은 업로드되자마자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고, 댓글 창은 ‘이 커플 진짜다’, ‘케미 미쳤다’, ‘이안 존잘 미쳤네’ 등의 찬사로 도배되었다. 지아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은.
"이안 씨 덕분이에요."
촬영이 끝난 후, 지아는 이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눈에만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계약에 의거한 결과입니다."
그의 대답은 차가웠지만, 지아는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빈틈을 발견한 듯한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날 이후, 가짜 데이트는 계속되었다. 한강 공원에서의 피크닉, 감성적인 갤러리 카페,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루프탑 바. 모든 순간이 대본대로 흘러갔지만, 이안의 연기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지아는 점점 현실과 대본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촬영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안은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때, 지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최수현 선배’였다.
"지아, 너 요즘 영상 봤는데 진짜 대박이더라! 역시 내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어!"
수현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다정했다. 그는 지아의 대학 선배이자, 그녀의 채널 초창기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리고 지아는 알았다. 그가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는 것을.
"선배, 고마워요. 다 선배 덕분이죠."
지아는 애써 밝게 대답하며 백미러를 통해 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차가운 기운이 차 안을 감돌았다. 통화가 끝나자, 이안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친한 사이인가 보네요."
"네? 아, 네. 대학 선배예요. 방송국 PD고요."
이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아는 그의 시선이 잠시 수현 선배의 번호가 찍힌 화면에 머물렀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가짜 연애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그녀의 삶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며칠 뒤, 다음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대본을 검토하던 중, 이안이 지아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다음 데이트 장소는 이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내민 종이에는 지아가 평소 가보고 싶었던, 하지만 너무 외진 곳이라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작은 숲속 카페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제가 가보고 싶다고 혼잣말했던 곳인데..."
이안은 아무 대답 없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는 찰나의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건 다정함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녀의 취향을 분석한 전문가의 면모일까. 지아는 혼란스러웠다. 완벽한 전문가라고만 생각했던 이안에게서, 자꾸만 예상치 못한 빈틈과 다정함이 엿보였다.
그의 완벽한 연기 속에서, 지아의 심장은 진짜 같은 설렘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설렘은 동시에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그녀는 잊어서는 안 되었다.
"주지아 씨."
이안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잊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계약'일 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아는 이미 그의 말 속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가짜 연애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그녀는 이안의 진짜 진심을 알아낼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이 가짜 연기 속에서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지아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앞에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가짜 연애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뒤흔들 위험한 게임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이 게임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안은, 대체 어떤 패를 숨기고 있는 걸까. 그녀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이안이 건넨 종이, 숲속 카페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것은 가짜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옥죄는 작은 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