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낡은 원룸의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선 한아름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방 안은 종일 환기되지 않은 눅눅한 공기가 가득했고,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쌓여 있는 고지서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무 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했다.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현관에 던져두고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텅 빈 선반은 그녀의 지갑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야, 오늘 하루가 비로소 끝났음을 실감했다.
오전 8시부터 시작된 그녀의 하루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오전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동네 카페에서 밝은 미소로 손님을 맞았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네, 맛있게 드세요!”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치고, 커피 머신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때도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진상 손님의 황당한 컴플레인에도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인내심과, 쟁반에 가득 담긴 컵들을 나르느라 후들거리는 팔의 통증이 숨어 있었다. 한 번은 컵을 나르다 발을 삐끗해 쟁반을 통째로 엎지를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재빨리 몸의 균형을 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미소 지었다.
카페 아르바이트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허겁지겁 유니폼을 갈아입고 배달 가방을 메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등과 어깨에 묵직한 가방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좁은 골목길을 누비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음식들을 배달했다. 한 번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탄 아이와 부딪힐 뻔했지만,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아이를 피하고 자신은 넘어지는 대신 무릎에 시퍼런 멍을 얻었다. 아려오는 통증에도 그녀는 무사한 아이에게 괜찮냐고 먼저 물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이어진 배달 일을 마치고 나면, 온몸의 근육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새벽, 마지막 아르바이트는 편의점이었다. 늦은 시간, 취객들의 시비와 졸음을 쫓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는 곳. “아가씨, 담배나 빨리 줘 봐!” 무례한 반말에도 그녀는 꾹 참으며 계산을 했다. 텅 빈 편의점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볼 때면,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잠은 사치였다.
샤워를 마치고 축 늘어진 몸으로 냉골 같은 방바닥에 앉았다. 낡은 통장을 펼쳐 들자, 눈에 들어온 잔고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숫자들이 마치 그녀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이달 말까지 내야 할 월세 청구서가 통장 옆에 놓여 있었고, 어머니의 병원비 영수증과 동생의 학자금 대출 상환 독촉장이 그 위에 불안하게 겹쳐 있었다. 눅눅한 공기마저 그녀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아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날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평범했던 그녀의 가정은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를 겪으면서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어서 어머니마저 지병으로 쓰러지시자,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대학 진학의 꿈은 사치가 되었고, 그녀는 스무 살의 나이에 일찍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밤낮없이 일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현실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 같았다. 그 바위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듯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손가락 끝이 시려왔다. 눈을 떴을 때, 낡은 방 벽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앳된 얼굴의 동생. 그들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마음속에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작게 타올랐다.
아름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괜찮아, 한아름. 이번 달만 버티면 다음 달엔 나아질 거야. 그래, 늘 그래왔잖아.’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긍정의 주문을 외웠다. 그래, 이번 달만 잘 넘기면 된다. 다음 달에는 분명 더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야. 그녀의 눈빛에 희미하지만 단단한 의지가 깃들었다.
아픔을 잊으려는 듯, 그녀는 낡은 노트북을 켰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느리게 켜졌다. 내일의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다시 확인하고, 인터넷 창을 열어 취업 공고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정규직… 월급… 안정적인…’ 그녀가 꿈꾸는 단어들이 화면에 줄지어 나타났다. 현실은 잔혹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새벽 두 시, 노트북 화면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그녀의 지친 얼굴을 비췄다. 오늘 밤도 잠들기는 글렀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밤을 넘기고 나면, 또다시 아침이 오고, 자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밝은 미소로 집을 나설 준비를 할 것이다. 그녀의 작은 소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다음 날의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며 낡은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때, 낡은 휴대폰이 진동했다. 늦은 시간, 모르는 번호였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액정을 들여다봤다. 순간, 화면에 ‘발신자 제한 없음’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누굴까? 이 시간에.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망설이던 아름은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낮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한아름 씨 되십니까? 저희는 강태준 씨 소속사, J&K 엔터테인먼트입니다.”
강태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 탑스타 강태준. 그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다름이 아니라, 한아름 씨께 특별한 제안을 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강태준 씨의… 가짜 여자친구 제안입니다.”
‘가짜… 여자친구?’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심장이 발작하듯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짓누르던 모든 현실의 무게가, 이 터무니없는 말 한마디로 인해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녀의 작은 방은 순식간에 차가운 정적에 휩싸였다.
새벽 5시, 서울 시내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강태준의 펜트하우스는 이미 완벽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통창 너머로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실내는 최첨단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일정한 온습도와 조도를 유지하며 외부의 변화에 흔들림이 없었다. 태준은 침대에서 미동도 없이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최고급 실크 잠옷이 그의 탄탄한 몸을 미끄러지듯 감싸며 흘러내렸고, 맨발이 닿는 대리석 바닥은 은은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스마트 미러 앞에 섰다. 거울은 그의 신체 데이터와 오늘의 스케줄을 동시에 띄웠다. 체성분 분석, 수면의 질, 심박수 등 모든 수치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켰다. 마치 오차 없는 기계처럼, 그의 삶은 철저히 통제되고 관리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옷들은 색상과 소재, 브랜드별로 칼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스타일리스트가 미리 준비해 둔 오늘의 의상을 집어 들었다. 최고급 수트가 그의 모델 같은 피지컬에 흐트러짐 없이 안착했다. 날카로운 턱선과 짙은 눈썹, 깊이 있는 눈빛은 마치 잘 조각된 그리스 신상 같았다. 시니컬한 표정은 그의 기본값처럼 늘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식탁에는 영양사가 준비한 완벽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저지방 그릭 요거트, 유기농 샐러드, 통곡물 빵, 그리고 각성 효과를 위한 블랙커피. 그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했고, 모든 음식은 정량만큼만 섭취되었다. 맛을 음미하는 대신, 영양소를 섭취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의 옆에는 비서가 오늘의 주요 뉴스와 연예계 동향, 그리고 팬들의 반응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질문을 던질 뿐, 불필요한 감정 표현은 일절 없었다. 그의 주변 공기는 늘 차갑고, 모든 소통은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했다.
“오늘 오전 10시, 이도현 대표님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최근 이미지 관련 보고가 주요 안건입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자, 태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미지 관련?”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네. 자세한 내용은 대표님께서 직접 브리핑하실 예정입니다.”
태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어떤 이미지 문제가 있을지 상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 완벽함은 직업의 본질이자 삶의 전부였다.
*
강태준의 소속사, J&K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이도현은 책상 위에 펼쳐진 수십 장의 보고서와 그래프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강태준, 이젠 인간미를 보여줄 때’, ‘비현실적인 완벽함, 대중과의 괴리감 심화’, ‘신과 같은 존재, 그러나 다가갈 수 없는 스타.’ 헤드라인들은 한결같이 강태준의 현재 상황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아… 이대로는 안 돼.” 이도현은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어 지쳤다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태준은 그의 소꿉친구이자, 그의 손으로 직접 키워낸 최고의 스타였다. 누구보다 태준의 노력을 잘 알았기에, 이런 평가들이 더욱 안타까웠다.
노크 소리와 함께 강태준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흐트러짐 없는 명품 수트와 무표정한 얼굴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으나, 이도현의 눈에는 그 완벽함이 오히려 독으로 보였다.
“왔어, 태준아.” 이도현은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태준은 소파에 앉으며 묻는 대신, 마치 보고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도현은 태준 앞에 태블릿을 밀어주었다. 화면에는 최근 대중 여론 조사 결과와 기사 스크랩, 그리고 전문가 분석 자료들이 빼곡했다.
“봐봐, 태준아. 너의 대중 이미지가 이젠 위험 수준이야. 긍정적인 수치는 여전히 높지만, ‘친근함’이나 ‘인간미’ 같은 항목에서는 바닥을 기고 있어. ‘비현실적’, ‘차가운’, ‘다가갈 수 없는’ 이런 키워드들이 너를 따라다닌다고.”
태준은 화면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데이터와 숫자를 정확히 읽어냈지만, 그 안에서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저는 제 직업에 충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제가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게 문제인 거야. 대중은 이제 너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원해.” 이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완벽주의가 독이 되고 있어. 대중은 신이 아니라,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을 원한다고.”
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는 이도현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완벽하게 준비하고, 완벽하게 연기하며, 완벽하게 노래하는 것이 그의 전부였다. 왜 인간적인 면모를 굳이 만들어내야 하는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태준은 결국 실용적인 질문을 던졌다. 감정적인 설득보다는 해결책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도현은 태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준비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화면에는 ‘가짜 여자친구 프로젝트’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태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가짜 여자친구… 라니요.” 그의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의아함이 섞였다.
“그래, 가짜 여자친구.” 이도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만들어서, 대중에게 너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거야. 데이트하는 모습,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 대중은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평범하게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해.”
이도현은 치밀하게 기획된 프로젝트의 목표와 예상 효과를 설명했다. 가상 인물 설정, 데이트 코스, 미디어 노출 전략, 예상되는 대중의 반응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처음엔 황당할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 어떤 연기나 퍼포먼스로도 만들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이야. 그리고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사랑’이지.”
태준은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도현의 말이 논리적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완벽한 커리어를 위해,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의 감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이성적으로는 이 제안이 자신의 경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완벽주의는 개인적인 만족뿐 아니라, 대중적인 성공을 향한 강박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긴 침묵 끝에 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함께,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냉철한 결단이 담겨 있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적합합니까?”
이도현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와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중요하지. 너무 예뻐도 안 되고, 너무 유명해도 안 돼. 평범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가진 사람. 대중이 ‘나도 저런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현실 여친’ 같은 이미지.” 이도현은 태블릿을 닫고 책상 위의 서류철을 뒤적였다. “이미 몇 명 후보를 추려놨어. 평범한 일반인 중에서, 생활력이 강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으로.”
그의 손이 한 서류철 위에서 멈췄다. 서류철 표지에는 ‘한아름’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그럼, 이제 실행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이도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비서, 지금 바로 한아름 씨에게 연락해. 우리 측 제안을 전달하고, 미팅 일정을 잡아줘. 최대한 빨리.”
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대표님. 방금 통화 연결되었습니다. 제안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이도현은 태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태준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알 수 없는 미묘한 파장이 일렁였다. 완벽한 계획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울의 어느 허름한 원룸에서는, 한 여자가 자신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놓칠 뻔하며 충격과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 이 거대한 계획의 소용돌이 속으로 막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아름은 손에 든 휴대폰이 마치 뜨거운 숯덩이라도 되는 양, 황급히 침대 위로 내던졌다. 낡은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이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방금 귀에 박힌 말들이 뇌 속을 헤집고 다니며 혼란스러운 파동을 일으켰다.
“강태준 씨의… 가짜 여자친구 제안입니다.”
가짜 여자친구. 강태준. 이 두 단어가 한 문장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아름은 저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내가 지금 졸고 있나? 아니면 아르바이트 너무 많이 해서 환청이 들리나?’ 그녀는 자신의 두 뺨을 찰싹 때려봤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싸늘한 불안감이었다. 강태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남자.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의 ‘가짜 여자친구’라니. 그녀의 평범한 삶에 이런 엄청난 제안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분명 무슨 사기거나, 아니면 엄청난 함정이 있을 터였다.
아름은 침대에서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서성였다. 낡은 장판이 삐걱거렸다. 방 한구석에 쌓인 청구서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병원비, 동생의 학자금 대출 독촉장, 그리고 이번 달 월세 고지서. 현실의 무게가 훅 하고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설마… 저 사람들이 내 상황을 알고 노린 건가?’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아름은 얇은 점퍼 하나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밤늦은 시간, 집 근처 작은 공원은 적막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그녀의 마음 같았다. 차가운 벤치에 몸을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까만 먹구름만 가득한 듯했다.
‘가짜 여자친구’. 그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언론의 관심, 대중의 시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소박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폭풍이었다. 만약 이 거짓말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절대 안 돼! 이건 너무 위험해!’ 이성이 강하게 외쳤다. 평범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더 이상 짊어질 무게는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앞에는 어머니의 희미한 미소와, 병원 침대에 누워 힘없이 눈을 감고 있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동생이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 애쓰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보다 더 큰 절박함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나는 괜찮아. 나 혼자 힘들면 돼.’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이제 지쳐가고 있었다. 이 제안이 그녀의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한 번에 해결해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의 이성을 잠식해 들어왔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며 목구멍을 칼칼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이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뜨거운 액체가 차가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에는 ‘미확인 번호’라고 찍혀 있었다. 아름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한아름 씨, 이도현입니다. 조금 전에 제 비서가 연락드렸을 텐데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강태준의 소속사 대표. 분명 이도현이었다. 아름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고민 중이신가 보네요.” 이도현은 그녀의 침묵을 망설임으로 읽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아름 씨는 저희가 찾던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평범하지만 사랑스럽고, 꾸밈없는 매력이요. 강태준 씨의 이미지 변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이 아름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웠다.
“물론, 쉽지 않은 제안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도현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계약금은 한아름 씨의 상상 그 이상일 겁니다. 어머니의 병원비, 동생의 학자금, 그리고 밀린 월세…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하고도 남을 금액이라고만 말씀드리죠.”
그의 말이 비수처럼 아름의 심장에 박혔다. 정확하게 그녀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아름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답답했다.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눈앞에 돈다발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지독한 현실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나는 지금도 벼랑 끝이야.’
아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과 함께,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한 의지가 그녀의 마음속에 강하게 피어올랐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나아질 리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간신히 나온 말은, 체념과 결심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고, 혀가 굳어버린 듯했다.
“만나뵙겠습니다.”
이도현은 만족스러운 듯 짧게 웃었다. “좋은 결정입니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 저희 회사로 와주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그때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아름은 휴대폰을 든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삶을 바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래, 한아름. 해보는 거야. 어차피 잃을 것도 없잖아.’
내일,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 강태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평범했던 삶은, 그 만남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뀔 운명이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 선택이 그녀에게 어떤 파란을 가져올지, 그리고 이 가짜 연애가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다만,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그녀의 심장은 미지의 미래를 향해 격렬하게 뛰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