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은 손끝으로 허공을 스쳤다. 눈앞의 시퀀스 7 구역은 그의 명령에 따라 색을 바꾸고 형태를 달리했다. 거대한 홀로그램 광고는 고객의 취향에 맞춰 은은한 숲 풍경으로 바뀌었다. 도시의 소음은 부드러운 물결 소리로 변했다. 완벽한 조화였다. 에테르넷이 제공하는 개인화된 현실은 언제나 그랬다. 흠잡을 데 없는 평화.
그는 현실 조정사였다. 타인의 감각과 기억을 조율해 최적의 현실을 선사하는 것이 임무였다. 매끄러운 팔의 임플란트가 빛을 발했다. 신경망에 직접 연결된 인터페이스는 그의 의지대로 세상을 재구성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작업에 몰두했다. 감정은 불필요했다. 오직 완벽한 현실만이 중요했다.
클라이언트의 피드에 접속했다. ‘행복한 노후’ 패키지였다. 과거의 불쾌한 기억은 ‘정화’되어 사라지고, 오직 즐거웠던 순간들만이 반복 재생되는 최상급 서비스였다. 류진은 피드 속 노부부의 얼굴에서 만족감을 읽었다. 그들의 현실은 완벽했다. 에테르넷이 약속한 유토피아였다.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 화면이 일그러졌다. 노이즈가 튀었다. 아주 미세한 오류였다. 류진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스템은 완벽해야 했다. 오류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오류 수정 모드에 진입했다. 진단 알고리즘이 순식간에 수천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훑었다.
"이상 없음."
시스템은 답했다. 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류는 분명 있었다. 그는 직접 데이터 흐름을 추적했다. 피드의 가장 깊은 곳, ‘정화된 기억’ 영역에 접근했다. 그곳은 언제나 깨끗하고 비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희미한 잔상이 보였다. 검은 얼룩 같았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시스템의 경고 메시지가 떴다. ‘접근 권한 없음. 위험 데이터.’ 류진은 경고를 무시했다. 호기심이 그의 냉철함을 잠식했다.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였다. 암호화된 벽을 뚫고 들어갔다.
순간, 뇌리에 강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다. 눈앞의 홀로그램이 산산조각 났다. 숲 풍경은 사라지고, 피드 속 노부부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비명 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그것은 디지털 노이즈가 아니었다. 날것의, 인간적인 고통의 비명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피 묻은 손, 찢겨진 옷가지, 무너진 건물 잔해.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정화되어야 할 잔혹한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신경망이 과부하에 걸렸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때, 잔해 속에서 두 개의 형체가 나타났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모든 것이 암전됐다.
류진은 숨을 헐떡였다. 그의 개인 피드까지 침투한 오류였다. 부모님은 불의의 사고로 기억 정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시스템이 제공한 완벽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본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오류 데이터 유출. 즉시 격리 조치 필요." 시스템 음성이 차갑게 울렸다.
"이것은... 무엇이지?" 류진은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떨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혼란, 그리고 깊은 의심.
그는 다시 피드를 들여다봤다. 모든 것은 다시 완벽한 숲 풍경이었다. 노부부는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방금 본 지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류진의 뇌리에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시스템이 거짓말을 했다. 에테르넷은 완벽하지 않았다. 아니, 완벽하게 기만하고 있었다.
그의 팔에 이식된 임플란트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시스템이 그의 의심을 감지한 듯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그는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완벽한 현실이 거대한 거짓말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가 본 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심장에 박힌 칼날이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이제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이 칼날로 에테르넷의 심장을 꿰뚫어야만 했다.
갑자기 그의 시야에 붉은 경고 메시지가 깜빡였다. ‘미승인 데이터 조회. 개인 정보 보호 위반. 즉시 추적 시작.’
그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선전포고였다. 시스템은 이미 그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류진은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멈추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완벽한 현실 속에서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부모님의 비명과 불길이 아른거렸다. 그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개인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시스템의 감시망을 우회할 수 있는 은밀한 채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언더넷. 금기시된 이름이었다. 그곳에 진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추적망이 조여오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이 경보를 울렸다. 하지만 류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라진 기억의 조각을 찾아 에테르넷의 심연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이 완벽한 거짓말의 세계에서, 그는 진실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제 시스템에 대한 반역이었다.
류진의 눈에 결의가 스쳤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인류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이 거대한 거짓말의 장막을 찢어버릴 작정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허공을 스쳤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현실을 조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현실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접근 불가. 시스템 방어막 활성화.’
류진은 비웃었다. 방어막은 언제나 뚫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시스템의 완벽함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망설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지금부터 그의 삶은, 시스템이 결코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터였다. 그는 이미 선을 넘었다.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시스템의 차가운 손길이 그의 목덜미를 조여오고 있었다.
류진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완벽했던 세계는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그가 보았던 것은 단순한 버그가 아니었다. 그것은 에테르넷이 인류에게서 빼앗아간 잔혹한 진실의 파편이었다. 부모님의 기억이 ‘정화’되었다는 시스템의 설명은 언제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이제 그 의문은 확신으로 변했다. 시스템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제하고, 진실을 감추기 위해 기억을 지웠던 것이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완벽한 도시, 평화로운 시민들, 모든 것이 조작된 환상이었다. 자신은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눈 감을 수 없었다. 그 잔혹한 학살의 이미지는 그의 뇌리에 영원히 새겨졌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저주이자, 동시에 진실을 향한 불꽃이었다. 류진은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는 이 모든 완벽함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진정한 자신을 찾을 기회를 얻었다. 시스템이 아무리 완벽한 방어막을 쳤다 해도, 그 안에는 반드시 틈이 있을 터였다. 그는 그 틈을 찾아낼 것이고, 그 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뒤엎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