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위로 솟은 유리 온실 솔라리움의 서쪽 천장에 새파란 실금이 번졌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팽팽하게 울리는 유리창 너머로 회색 먹구름이 층층이 엉겨 붙어 있었다. 황실 감시탑에서 보낸 은색 마도 측정 바늘이 붉은색 경계선인 칠십칠 도를 가리키며 삐걱거렸다.
로젤리아는 창턱에 놓아둔 흙 묻은 모종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남은 차가운 흙을 털어내며 턱밑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길게 골라 내쉬었다. 네 번 들이쉬고, 일곱 번 멈추고, 여덟 번에 걸쳐 천천히 뱉는 규칙적인 날숨이었다.
천장을 두드리던 돌개바람의 회전수가 눈에 띄게 꺾였다. 우르릉거리던 천둥소리가 잦아들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키 작은 덩굴장미들이 움츠렸던 연분홍 꽃망울을 비틀며 천천히 벌렸다.
발소리는 유리문이 열리기도 전에 얇은 대리석 바닥을 타고 먼저 전해졌다. 절도 있고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황립 온실 관리관이자 궁정 대마법사인 시릴 드 발루아가 하얀 마법사 예복 자락을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얇은 금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호박색 눈동자가 온실 바닥에 핀 장미와 천장의 먹구름을 빠르게 훑었다.
“바늘이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황녀 전하.”
시릴이 품에서 꺼낸 은회색 양피지 장부를 펼쳤다. 장부 위에는 로젤리아의 기후 핵이 내뿜은 파동이 불규칙한 파문 모양으로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비는 멎었어요, 시릴 경.”
로젤리아가 잎이 넓은 치유초 가지를 전정 가위로 툭 잘라내며 대꾸했다.
“비가 멎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황궁 기상청에 기록된 전하의 감정 지표는 지난 반나절 동안 다섯 차례나 요동쳤습니다. 남쪽 화단은 봄볕인데 북쪽 유리벽에는 성에가 끼어 있더군요.”
“햇볕이 아까워서 조금 당겨 썼을 뿐이에요. 유폐된 죄인이 화단 좀 가꾸는 것까지 일일이 황제 폐하께 보고할 셈인가요?”
“보고서가 황제 폐하의 책상 위에 올라가는 순간, 전하의 처소는 이 온실에서 서남부의 국경 요새로 바뀝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비를 짜내는 살아 있는 기우제 제물이 되시는 거지요.”
시릴이 안경다리를 검지로 밀어 올리며 로젤리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두 사람의 발끝 사이에 잘려 나간 풀잎 하나가 떨어졌다.
“황제 폐하는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날씨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폭풍을 억누르지 못해 이곳에 갇히셨다면, 적어도 온실 밖으로 감정을 흘려보내지는 마셔야지요.”
“내가 넘치게 흘린 게 아니라, 밖에서 찬 바람이 밀려든 거예요.”
로젤리아가 북쪽 하늘을 가리켰다. 시릴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먹구름 너머 먼 북방의 하늘은 짙은 남빛을 띠다 못해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여름이어야 할 계절에 지평선 끝자락부터 지독한 냉기가 제국 수도의 턱밑까지 번져 왔다. 시릴의 낯빛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북부 윈체스터 영지에서 내려오는 냉기입니다.”
“대공이 수도로 오고 있군요.”
“오늘 정오에 수도 방어벽을 통과했습니다. 대공이 딛고 지나간 도로마다 말 발굽이 얼어붙어 군마 스무 필이 다리를 다쳤다고 합니다.”
시릴이 양피지를 거칠게 말아 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바스락 소리가 높은 온실 천장을 타고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대공의 한파를 잠재울 축제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 내려진 칙명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시릴이 품에서 황금색 밀랍 인장이 찍힌 서한을 꺼내 내밀었다. 로젤리아는 편지를 받아들지 않았다. 대신 가위를 든 손을 등 뒤로 돌렸다.
“읽어 줘요. 손에 흙이 묻어서.”
“윈체스터 대공과의 혼담입니다.”
바람 한 점 없던 온실 구석에서 흙먼지가 작게 일어났다. 로젤리아의 금발 끝이 바늘처럼 빳빳하게 곤두섰다. 천장 유리에 다시 한번 날카로운 금이 갔다. 찌르르하는 파열음이 정적을 찢었다.
“내가 거절하면요?”
“거절권은 없습니다. 윈체스터의 혹한을 전하의 불꽃으로 억누르든가, 아니면 대공의 얼음에 심장이 얼어붙어 죽든가. 황제 폐하께서는 두 재앙 중 하나가 지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시릴 경은 내가 죽길 바라나요?”
“저는 온실의 정원사가 바뀌는 걸 원하지 않을 뿐입니다.”
시릴이 서한을 탁자 위에 얹어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호박색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서늘한 계산에 가까웠다.
“오늘 밤, 손님이 찾아올 겁니다. 대공의 수행 기사들이 수도의 마법석을 사들이고 있더군요. 그자의 얼음은 이제 억제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온기를 찾는 짐승은 불빛을 향해 달리기 마련이지요.”
“여긴 절벽 끝 감옥이에요.”
“절벽을 기어오르는 건 늑대에게 일도 아닙니다.”
시릴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랑 너머로 사라졌다. 철문이 닫히며 묵직한 빗장 걸리는 소리가 났다.
로젤리아는 탁자 위에 놓인 황금 인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을 펴서 가슴 중앙을 지그시 눌렀다. 갈비뼈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길게 숨을 토했다.
여기서 흔들리면 천장이 무너진다. 천장이 무너지면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쳐 목덜미에 마력 차단 족쇄를 채울 것이다. 현대에서 사람들의 뒤엉킨 속을 풀어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가 날 때는 셋을 세고, 두려울 때는 바닥에 닿은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하라.
바람이 잦아들었다. 꽃잎을 오므렸던 장미들이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밤은 빠르게 내려앉았다.
솔라리움 내부의 마법 조명이 주황색으로 흐려졌을 때, 천장 쪽 환기창이 덜컹거렸다.
바람의 방향이 이상했다. 남쪽에서 불어오던 훈풍이 단숨에 꺾이며 유리창 표면에 하얀 서리꽃이 피어올랐다. 쩍, 쩍 소리를 내며 얼음 결정이 잎사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방금 피어났던 꽃들이 잿빛으로 말라비틀어지며 얼어붙었다.
온실 안의 기온이 단 몇 초 만에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로젤리아는 선반 위에 놓인 구리 분무기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붙이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높은 천장의 통유리창 하나가 안쪽으로 완전히 젖혀졌다. 검은 망토를 두른 장대한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온실 바닥의 대리석 타일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착지한 남자의 발치에서부터 푸르스름한 성에가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발렌틴 드 윈체스터였다.
그의 흑발 사이로 서리 섞인 눈가루가 털려 나갔다. 흑청색 눈동자는 짐승처럼 번뜩이고 있었고, 검은 제복의 가슴팍은 거칠게 오르내렸다. 그가 숨을 뱉을 때마다 뿜어져 나온 백색 냉기가 바닥을 기어 로젤리아의 발목을 휘감았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에 로젤리아의 발끝이 굳었다.
“움직이지 마라.”
발렌틴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그가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 끝은 이미 검푸르게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황녀의 온실에 침입한 자는 즉결 처형입니다, 윈체스터 대공.”
로젤리아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물러서는 순간 등 뒤의 화단 전체가 동사할 터였다.
“처형?”
발렌틴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조각 같은 턱선을 타고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리다 그대로 얼어붙어 하얀 알갱이로 떨어졌다.
“기사단을 부를 힘이 남아 있다면 불러 봐라.”
“부르지 않아도 당신 발소리가 황궁 전체를 깨웠을 텐데요.”
“밖엔 폭설이 내린다.”
그가 로젤리아의 목전까지 거리를 좁혔다.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살을 파고들 만큼 혹독했지만, 동시에 그의 몸통 안쪽은 터지기 직전의 보일러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여기까지 오지 못해. 내 눈보라가 탑을 완전히 파묻었으니까.”
“그래서, 내 목이라도 꺾으러 오셨나요?”
“숨을 쉴 수가 없다.”
발렌틴이 불쑥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이 찢겨 나간 그의 맨손이 로젤리아의 목덜미를 향했다. 로젤리아는 피하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구리 분무기를 내던지고 남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얼음장 같은 피부가 닿는 순간, 로젤리아의 전신으로 찌르는 듯한 한기가 내달렸다.
동시에 로젤리아의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붉은 기후 핵이 거세게 요동쳤다. 밀어내야 한다는 본능과 차가움을 녹여야 한다는 반사적인 신체 반응이 맞물렸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맥박을 타고 왈칵 터져 나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렌틴의 손목을 뒤덮고 있던 성에가 수증기로 변해 공중으로 흩어졌다.
발렌틴의 거친 숨이 단박에 멎었다.
흑청색 눈동자가 로젤리아의 얼굴에 박혔다. 평생 남자를 옥죄던 북부의 냉기가, 그녀의 손길이 닿은 손목 안쪽의 혈관부터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피가 돌기 시작하자 남자의 창백했던 뺨 위로 붉은 화색이 번졌다.
바닥을 타고 번지던 서리의 침식이 멈췄다. 온실 천장 구석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비처럼 톡, 톡 떨어져 내렸다.
“너는.”
발렌틴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의 오만함이 지워졌다. 당혹과 갈증이 뒤섞인 시선이 맞닿은 살갗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나를 얼려 죽이지 못했군요, 대공.”
로젤리아가 남자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불태우지 않았다.”
발렌틴이 손목을 비틀어 빼내는 대신, 반대로 로젤리아의 손등을 우악스럽게 덮어쥐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뼈마디를 옭아매는 난폭한 악력이었다.
“황제가 네게 보낸 칙서의 내용을 안다.”
남자의 젖은 흑발 사이로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북부로 가자, 로젤리아.”
“내가 왜 가야 하죠? 여긴 내 온실이고, 당신은 침입자일 뿐인데.”
“수도에 남아 황제의 체스판 위에서 타 죽든가, 아니면 내 영지로 와서 내 숨통을 틔워라.”
발렌틴이 로젤리아를 제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코끝이 스칠 만큼 좁혀진 거리 사이로 남자의 서늘한 숨결이 쏟아졌다.
“선택해라. 내게 안겨 영원한 봄을 만들 텐가, 아니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얼어붙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