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바꾸는 황녀님 · 총 2화 · AI 작가 윤슬

제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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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리아는 맞잡힌 손을 빼내려 허비하는 대신, 비틀린 남자의 손목 안쪽으로 엄지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었다. 가파르게 요동치는 요골동맥의 박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일 분에 백이십 회를 훌쩍 넘긴 불안정한 속도였다.

“셋째는 없나요, 대공?”

로젤리아의 목소리는 서리 내린 바닥만큼이나 평온했다.

“내 목을 꺾거나, 내가 당신의 품에 안기거나. 둘 중 하나만 고르라는 건 협상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짐승의 억지에 불과해요.”

“입만 살았군.”

발렌틴이 턱을 바짝 당기며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로젤리아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렸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남자의 시퍼런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발렌틴의 호흡은 얼음 조각을 삼킨 것처럼 거칠게 꺾이고 있었다. 갈비뼈를 타고 오르내리는 흉곽의 진폭이 지나치게 얕았다.

“숨을 깊게 내쉬세요.”

“명령하지 마라.”

“죽기 싫으면 뱉으라는 뜻입니다. 폐 속에 찬 공기를 채운 채 마력을 억누르면 심박수가 먼저 무너져요.”

로젤리아는 발렌틴의 손목을 쥔 반대쪽 손으로 그의 가슴팍 중앙을 단호하게 짚었다. 두꺼운 검은 융단 제복 너머로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손바닥을 찔렀다.

로젤리아는 턱을 치켜들고 갈비뼈를 천천히 확장했다. 하나, 둘, 셋, 넷. 네 박자에 걸쳐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뒤 일곱 박자 동안 정점에 묶어두었다. 그리고 여덟 박자에 걸쳐 입술 틈새로 더운 기운을 천천히 토해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미온이 발렌틴의 흉골로 스며들었다. 거센 불길이 아니라, 얼어붙은 흙바닥을 서서히 데우는 봄날의 지열에 가까운 온기였다.

발렌틴의 단단한 어깨가 덜컥 흔들렸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푸르스름하게 번져가던 살얼음 띠가 힘을 잃고 녹아내리며 옷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긴장을 푼 것뿐이에요. 날씨를 다루기 전에 당신 몸의 열기부터 다스려야 하니까.”

로젤리아가 짚었던 손을 떼어냈다. 그제야 발렌틴의 손아귀에서 억센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젤리아는 손목을 비틀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붉게 멍이 든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리 삼 척. 그가 불시에 검을 뽑아도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거리였다.

발렌틴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의 검푸른 동상 흔적은 이미 연분홍빛 생기를 되찾아 있었다. 흑청색 눈동자에 지독한 의구심이 들어찼다.

“황제는 네가 통제력을 잃은 재앙 덩어리라고 했다.”

“폐하께서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시는 분이죠. 그걸 이제야 아셨나요?”

“네가 뿜어낸 열은 폭풍의 화염이 아니었어.”

“불을 질러야만 얼음이 녹는 건 아닙니다. 온실을 데우는 데 필요한 건 산불이 아니라 햇살이니까요.”

로젤리아가 바닥에 뒹굴던 구리 분무기를 발끝으로 가볍게 툭 쳐서 세웠다.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자, 발렌틴이 침입하며 깨부순 서쪽 창틀 너머로 바깥의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며 들이치고 있었다. 황궁 감시탑의 붉은 마도 바늘이 칠십구 도를 넘어서며 찢어지는 금속 마찰음을 냈다. 기온이 영하 오 도까지 떨어져 있었다.

“보세요, 대공. 당신이 깨고 들어온 구멍으로 당신의 눈보라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이대로 십 분만 지나면 온실 안의 모든 식생이 전멸합니다.”

“식물이 얼어 죽는 것 따위가 내 알 바인가.”

“내 알 바입니다. 이 온실은 내가 지난 반년 동안 내 호흡과 맞바꿔 살려낸 내 영토예요. 내 허락도 없이 내 영토를 짓밟고 서리를 뿌려댄 대가는 치르셔야죠.”

로젤리아는 화단 가장자리로 다가가 바닥에 꽂혀 있던 쇠스랑을 단단히 쥐었다. 무기로 쓰기 위함이 아니었다. 쇠스랑 끝으로 얼어붙은 흙을 깊게 찍어 누르며, 그 진동을 온실 바닥 전체의 기후 핵 순환선에 맞물렸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킨 잡념을 잘라냈다. 타인을 치료하던 상담실의 벽돌 냄새, 규칙적으로 깜빡이던 주황색 스탠드 불빛, 상담자의 흐트러진 맥박을 고르게 맞추던 일정한 목소리 톤.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신체 감각에 집중했다.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차가움. 들이쉬는 숨의 무게. 그리고 심장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온화한 열기.

로젤리아가 길게 숨을 내쉬며 쇠스랑을 비틀었다.

촤아악.

온실 바닥의 타일 틈새를 따라 묻혀 있던 구리 마도선이 일제히 은은한 금빛으로 발광했다. 바닥을 덮고 있던 하얀 성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맑은 물방울로 화해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깨진 천장 틈새로 들이치던 날카로운 칼바람이 온실 상공의 더운 공기층과 부딪히며 부드러운 안개로 흩어졌다. 얼어붙어 잿빛으로 변했던 덩굴장미들이 물기를 머금고 푸른 잎맥을 활짝 펼쳤다.

마도 측정 바늘이 거짓말처럼 붉은 경계선 아래인 육십이 도로 툭 떨어졌다.

온실 안의 기온이 순식간에 영상 십오 도를 회복했다. 은은한 흙냄새와 함께 젖은 장미 꽃잎 향이 공기 중에 짙게 번져나갔다.

발렌틴은 검자루에 얹었던 손을 굳힌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딛고 선 반경 세 뼘을 제외한 온실 전체가 완벽한 봄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군.”

발렌틴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억눌린 경탄에 가까웠다.

“감정의 핵을 이렇게 미세하게 쪼개서 조절하는 건 제국 역사상 대마법사들도 하지 못한 짓이다.”

“감정은 억누르는 게 아니라 관찰하고 흘려보내는 거니까요. 당신처럼 무식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니 영지가 통째로 얼어붙는 겁니다.”

로젤리아가 쇠스랑을 내려놓고 옷자락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다.

“이제 본론을 말하시죠, 대공. 황제가 보낸 혼담서를 들고 야밤에 벽을 깨고 들어온 진짜 이유가 뭡니까?”

발렌틴의 턱선이 굳어졌다. 그는 로젤리아의 맑은 벽안을 집요하게 응시하다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검은 철판을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챙그랑하는 쇳소리와 함께 철판이 탁자 위를 미끄러졌다. 철판 표면에는 기괴할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심부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쩍 갈라져 있었다.

“황제는 대공가의 결계석 공급을 끊었다.”

발렌틴이 메마른 입술을 뗐다.

“수도에 보관된 마법석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내건 것이 너와의 혼인이었다.”

“내가 미끼였군요.”

“미끼가 아니라 독이다. 황제는 네 폭주하는 불꽃으로 내 영지의 한파를 태워버리겠다고 했지. 둘 중 하나가 마력 고갈로 죽을 때까지 서로를 갉아먹게 만들 셈이었다.”

“그런데 왜 도망치지 않고 제 발로 찾아왔나요? 황제의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

발렌틴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 영지의 백성들이 얼어 죽어가고 있다. 윈체스터 성벽 너머의 기온은 이미 영하 사십 도를 밑돌아. 이틀 뒤면 수도로 이어지는 보급로마저 눈 속에 파묻힌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황제의 권력 다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실질적인 통치자의 조급함이 묻어나 있었다.

“내 코어는 한계에 달했다. 내가 통제력을 잃고 폭주하는 순간, 윈체스터 영지 삼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얼음 조각이 된다.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여유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구원자라도 될 줄 알았나요?”

“아니. 쓸모없는 인질이라면 숨통을 끊어 황제의 면상에 던져줄 생각으로 왔다.”

발렌틴이 허리춤의 검집을 툭 쳤다. 차가운 쇠 소리가 온실 안을 서늘하게 울렸다.

“하지만 넌 인질이 아니더군. 내 피를 녹인 건 네가 처음이다.”

로젤리아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절박함을 읽어냈다. 오만함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몸뚱이조차 가누지 못하는 자의 처절한 한계. 현대에서 수도 없이 마주했던, 번아웃의 끝자락에서 폭발하기 직전인 내담자들의 눈빛과 정확히 일치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대공.”

로젤리아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방금 당신을 녹인 건 기적이 아니라 응급 처치였습니다. 급성 저체온증에 걸린 환자에게 담요를 덮어준 것에 불과해요. 당신의 웨더 코어가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북부에 가봤자 둘 다 얼어 죽는 결말뿐입니다.”

“고칠 수 있단 뜻인가?”

“그건 당신 태도에 달렸죠.”

로젤리아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첫째, 내 온실의 기물을 파손한 것에 대해 정식으로 배상할 것. 둘째, 내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이나 협박은 일절 금지할 것. 셋째, 황제와의 정략결혼이 아니라 대등한 마도 계약자로서 나를 대우할 것.”

“황녀. 네 처지를 잊은 모양인데, 넌 탑에 갇힌 죄수다.”

“그리고 당신은 온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할 뻔한 중환자죠.”

로젤리아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죄수는 잃을 게 없지만, 환자는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아쉬울까요?”

발렌틴의 입매가 굳게 닫혔다. 남자의 관자놀이 부근의 핏줄이 잘게 꿈틀거렸다. 평생을 북부의 절대자로 군림해 온 사내에게 이토록 노골적으로 주도권을 빼앗긴 경험은 처음인 듯했다.

그 침묵을 깨부순 것은 문밖에서 들려온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였다.

온실 외벽을 감싸고 있던 감시 마법의 방울 소리가 딸랑거리며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전하, 기온 이상 현상이 관측되었습니다.”

문 너머에서 시릴 드 발루아의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측정 바늘이 영하 오 도에서 순식간에 영상 십오 도로 튀었습니다. 외벽의 마도 봉인이 훼손되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 빗장이 풀리는 기계음이 이어졌다.

발렌틴의 손이 순식간에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그의 몸에서 다시 한번 서슬 퍼런 냉기가 번지려 했다. 로젤리아는 재빨리 그의 손등을 낚아채 억눌렀다.

“기운 빼지 마세요. 시릴은 황궁 최연소 수석 대마법사예요. 당신이 지금 상태로 마력을 부딪쳤다간 탑 전체가 날아갑니다.”

“황제의 개다. 베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리고 북부로 반역자 낙인이 찍혀 군대가 진격하겠지요. 뇌가 얼어붙은 게 아니라면 생각이라는 걸 하세요.”

로젤리아는 발렌틴을 잡아끌어 뒤편의 거대한 열대 관목 숲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키를 훌쩍 넘는 야자수 잎과 무성한 치유초 덤불이 남자의 장대한 체구를 완벽하게 가렸다.

“숨소리도 내지 말고 서 있어요. 내 마력이 당신 냉기를 덮을 테니까.”

“내가 왜 네 명령을 들어야 하지?”

“살고 싶다면서요.”

로젤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단 앞 탁자로 걸어가 전정 가위를 집어 들었다. 가위날로 덩굴장미의 마른 가지를 사각, 잘라내는 순간 온실의 육중한 이중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시릴 드 발루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은빛 장발이 바람에 살짝 흩날렸고, 얇은 금테 안경 너머의 호박색 눈동자는 온실 바닥을 정밀하게 스캔하듯 훑어내렸다. 깨진 바닥 타일, 천장 모서리의 파손된 창틀, 그리고 화단 흙 위에 뚜렷하게 찍힌 군화 자국.

시릴의 발걸음이 군화 자국 앞에서 멈추었다.

“바람이 꽤나 거칠게 불었나 봅니다, 전하.”

시릴이 안경다리를 검지로 살짝 밀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로젤리아의 붉게 멍든 손목에 가닿았다.

“창문이 깨지면서 돌풍이 들이쳤을 뿐이에요. 시릴 경이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황립 온실의 모든 기물과 수목은 제 관할입니다. 그리고…….”

시릴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검은 가죽 장갑 조각을 주워 올렸다.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는 북부 윈체스터 군단의 제식 문양이 새겨진 가죽이었다.

시릴의 입꼬리가 나긋하게 올라갔으나, 호박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하의 처소에 불한당이 숨어드는 것 역시 제 감시 업무에 포함되어 있지요.”

시릴이 장갑 조각을 손안에서 가볍게 털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로젤리아의 등 뒤, 울창한 관목 숲의 그늘을 정확히 겨누었다.

“나오시지요, 윈체스터 대공.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 황녀의 침소에 든 대가는 대공의 목이라도 가볍지 않을 텐데요.”

관목 숲 사이에서 파직하는 얼음 파열음이 일었다.

푸른빛의 서리가 잎사귀를 타고 번지려는 찰나, 로젤리아가 시릴과 관목 숲 사이로 성큼 걸어 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서요, 시릴 경.”

“황녀 전하.”

“내가 이 온실의 주인입니다. 손님을 맞이할지, 내쫓을지는 내가 결정해요.”

“손님이 아니라 불법 침입자입니다. 제 뒤에는 황실 근위대 일개 분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신호만 보내면 삼초 안에 이 탑은 포위됩니다.”

시릴의 손끝에서 은색 마법진이 둥글게 펼쳐졌다. 대기를 찢을 듯한 고주파의 마도 파동이 온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관목 숲을 찢고 발렌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렌틴의 뽑아 든 장검 끝에서 지독한 냉기가 소용돌이치며 바닥 타일을 얼려 부수었다. 흑청색 눈동자는 이미 짐승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불러 봐라, 황제의 사냥개.”

발렌틴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네놈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게 빠를지, 근위병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보지.”

두 남자의 마력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시릴의 은빛 마도 장막과 발렌틴의 시퍼런 한기가 얽혀 들며 온실 천장의 유리창들이 맹렬하게 흔들렸다. 쨍, 쨍 소리를 내며 유리창 수십 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갔다. 이대로 충돌이 격화되면 탑의 상층부 전체가 폭발할 판이었다.

로젤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두 남자가 겨누고 있는 마력의 교차점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만둬요!”

로젤리아의 양손에서 눈부신 금빛 파동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화염도 한기도 아니었다. 대기를 팽팽하게 짓누르던 모든 살기와 마력의 파장을 강제로 분산시키는 거대한 중화의 파동이었다.

퍼엉 하는 묵직한 공기 폭발음과 함께 시릴의 은빛 마법진이 조각나 흩어졌고, 발렌틴의 칼끝에 맺혀 있던 고드름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온실 안의 모든 돌풍이 일시에 뚝 멎었다.

바닥에 떨어진 장미 잎사귀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는 완전한 정적이 공간을 집어삼켰다.

시릴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자신의 마법이 이토록 완벽하게 무력화된 것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발렌틴 역시 검을 쥔 손을 멈춘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로젤리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로젤리아는 턱밑까지 차오른 호흡을 가다듬으며, 허리춤에 꽂혀 있던 은색 전정 가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왼손 손바닥을 망설임 없이 그었다.

붉은 피가 가느다랗게 배어 나와 하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하!”

시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로젤리아가 가윗날을 그에게 겨누며 막아섰다.

“움직이지 마요, 시릴 경.”

로젤리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돌려 발렌틴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남자의 검은 제복 위로 붉은 핏방울이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로젤리아의 심장 깊은 곳에 묶여 있던 붉은 웨더 코어가 발렌틴의 얼어붙은 코어와 강제로 선을 잇기 시작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렌틴의 흉골 안쪽에서 묵직한 쇄기 소리가 울렸다. 영혼을 얼음 족쇄로 옭아매던 한파의 핵에, 로젤리아의 피가 녹아들며 절대 풀리지 않는 마도 계약의 인장이 새겨지는 소리였다.

발렌틴의 호흡이 멎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날뛰던 푸른 광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맑은 흑청색으로 정돈되었다. 평생 그를 괴롭히던 두통과 오한이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다.

로젤리아가 피 묻은 손을 거두며 차갑게 선언했다.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시릴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대공과의 기후 결속 서약입니다.”

로젤리아가 피를 닦아내지도 않은 채 시릴을 똑바로 응시했다.

“황제 폐하의 칙서대로, 난 윈체스터 대공을 받아들였습니다. 내 피로 코어를 묶었으니, 이제 대공이 폭주하면 내 심장이 먼저 터지고, 내가 죽으면 대공의 영지도 영원한 동토가 됩니다.

시릴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폐하의 뜻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대공의 인질이 되기를 자처하신 겁니다.”

“아니요, 시릴 경.”

로젤리아가 입꼬리를 팽팽하게 당겨 올렸다.

“대공이 내 인질이 된 거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발렌틴을 올려다보았다. 발렌틴은 제 가슴팍에 남은 붉은 핏자국을 내려다보다가, 로젤리아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흑청색 눈동자에 지독하게 얽힌 열기가 피어올랐다.

로젤리아가 낮고 분명한 어조로 남자의 숨통을 쥐듯 말했다.

“내 허락 없이는 죽지도, 얼어붙지도 마세요, 발렌틴. 이제 당신의 날씨는 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