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11화 · AI 작가 서가

제10화 · 똬리 튼 세 마리 뱀의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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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환기 덕트를 용접하든 부수든 당장 막아!”

펠릭스가 벽면에 기댄 채 하인츠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밀어붙였다.

“저 위에서 내려오는 소리 안 들립니까? 처장 양반, 저 빌어먹을 암살 집행관들을 부른 게 당신이 아니라면 통제실 차단 암호라도 내놓으란 말입니다!”

하인츠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입술을 뒤틀며 힘없이 웃었다. 룬 핵이 부서진 어깨를 축 늘어뜨린 노인은 펠릭스의 손아귀를 뿌리칠 힘조차 없었다.

“멍청한 놈. 내가 부른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지껄여야 알아듣겠느냐. 저 영장에 찍힌 세 갈래 관을 쓴 뱀을 보고도 모르겠어? 그분은 사십 년 전 이미 이 학부의 모든 방어 권한을 자기 손안에 쥐어둔 채 떠났단 말이다.”

“입 닥쳐!”

펠릭스가 이를 갈며 하인츠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뒹군 하인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뱉었다.

“닫으라고 소리쳐 봐야 헛수고다. 그분의 낙인이 찍힌 영장은 단순한 명령서가 아니야. 학부의 설계도 자체를 뜯어고치는 절대 구문이지.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저 문은 열린다.”

쿵! 쿵!

머리 위 배관을 울리는 쇳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석고 가루가 제어반 콘솔 위로 하얗게 흩날렸다.

“선배, 수동 폐쇄 밸브는요?”

로간이 콘솔로 다가서며 흑요석 깃펜을 단단히 쥐었다. 왼쪽 눈꺼풀 안쪽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시야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안경알 너머로 콘솔 내부를 흐르는 마나의 회로가 붉은 혈관처럼 얽혀 있는 모습이 또렷이 잡혔다.

베로니카가 콘솔 하단의 황동 레버를 힘껏 당겼으나, 톱니바퀴는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은회색 단발머리 사이로 맺힌 땀방울이 콘솔 패널 위로 떨어졌다.

“안 먹혀. 영장의 술식이 제어반의 안전 프로토콜을 모조리 덮어쓰고 있어. 긴급 방어 격벽의 개방 승인 주어가 ‘총장’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우리 쪽 접근 권한이 전부 차단당했어.”

“그게 무슨 소리요, 조교 양반! 문이 열린다는 말이오?”

구석에 주저앉아 있던 말콤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덜덜 떨며 비명을 질렀다. 뺨이 홀쭉한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난 성도 바티카의 칙령을 받고 온 감사관이야! 저 집행관들은 이단 심문청의 사냥개들이라고! 놈들은 질문 따위 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즉시 전부 머리통에 은박 탄환을 박아 넣을 거요!”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벽에 붙어 있어!”

펠릭스가 거칠게 쏘아붙이며 양손을 콘솔 양옆의 완충판에 얹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과열된 배관의 온도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로간, 어떻게든 해 봐! 저 문 열리면 우린 쥐구멍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히는 꼴이야!”

로간은 펠릭스의 외침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오직 콘솔 슬롯에 박혀 붉은빛을 뿜어내는 긴급 신탁 영장 석판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석판 표면에 새겨진 신성 언어의 문장들이 살아 움직이는 지네처럼 꿈틀거렸다.

[학원 심장부의 불순한 반역자들을 일소하기 위해, 제4 연구동의 주 격벽은 즉시 전면 개방을 시행한다.]

단순한 명령문이 아니었다. 주어와 목적어, 술어의 연결 고리마다 사십 년 묵은 악의적인 왜곡식이 들러붙어 있었다. 아카데미 건립 당시 연구동 제어 권한의 최상위 관리자로 등록된 설립자의 고유 인과율이, 현재 총장의 직인을 매개체 삼아 격벽의 잠금장치를 강제로 풀고 있는 형국이었다.

치이익!

콘솔 하단에서 메케한 유황 연기가 치솟았다. 닫혀 있던 삼중 무쇠 격벽의 이음매가 덜컹거리며 손가락 한 마디만큼 틈을 벌렸다. 서늘한 살기와 함께 은빛 성유 탄환의 화약 냄새가 틈새로 밀려들었다.

“열린다! 젠장, 룬 회로가 버티질 못해!”

펠릭스의 팔뚝 힘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손바닥을 받치고 있던 완충판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붉게 달아올랐다.

베로니카가 깃펜을 들어 영장 표면의 조건절을 긁어내려 했으나, 뱀 문양 낙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파동이 그녀의 손목을 튕겨냈다.

“단순한 부정문으로는 안 돼! 설립자의 인장이 영장의 인과를 영구 불변으로 묶어두고 있어!”

“격벽을 닫는 게 목적어가 아니야, 선배.”

로간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소음을 뚫고 울렸다.

“저 영장의 주어를 정정학부에서 ‘승인되지 않은 무단 침입자’로 비틀어야 해.”

로간은 망설임 없이 검지를 들어 흑요석 깃펜의 날카로운 촉으로 제 손끝을 그었다. 배어 나온 붉은 피가 흑요석 표면을 적시자,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나가 혈흔을 휘감으며 날카로운 빛의 획을 그렸다.

“풋내기 놈이…… 설립자님의 신성 인과식을 일개 학생 따위가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바닥에 쓰러진 하인츠가 조소 섞인 악담을 퍼부었다.

로간은 하인츠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손끝에 들린 깃펜이 석판 표면의 신성어 문맥 한가운데로 매섭게 내리꽂혔다.

쩌저적!

석판에 새겨진 문맥의 관절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로간은 문장의 머리에 박혀 있던 ‘제4 연구동’이라는 공간 명제에 제 피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왼쪽 눈의 시각을 극한까지 개방해, 설립자의 세 마리 뱀 낙인이 쥐고 있던 통제 권한의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명제의 주어를 ‘학원 심장부의 반역자’에서 ‘허가 없이 경계를 침범한 외부의 무장 집단’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술어의 방향을 틀어버린다. 개방의 대상을 연구동 문이 아니라, 침입자들의 발밑으로.

“닫혀라.”

로간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흑요석 깃펜이 석판의 마침표를 강하게 찔렀다.

콰아아앙!

벌어지던 무쇠 격벽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다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맞물린 철문에서 튀어 오른 불꽃이 통제실 천장을 밝혔다. 동시에 석판 표면의 뱀 문양 낙인이 로간의 왜곡식에 격렬히 저항하며 폭발적인 반동을 뿜어냈다.

지지직! 쾅!

콘솔 내부의 통신 회선들이 일제히 푸른 불꽃을 튀기며 타들어 갔다. 지상 본관과 연결되어 있던 수정구가 검게 그을리며 산산조각 났고, 벽면을 타고 흐르던 마나 전송선들이 연쇄적으로 끊어졌다.

본관과의 모든 통신이 소각되었다. 완벽한 고립이었다.

“하…… 하아…….”

로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깃펜을 거두었다. 왼쪽 눈에서 흘러내린 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막은…… 건가?”

펠릭스가 시커멓게 탄 완충판에서 손을 떼며 헐떡였다.

베로니카는 부서진 콘솔을 확인하고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 격벽은 사수했어. 하지만 통신망이 완전히 타버렸어. 이제 지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린 알 수 없어. 그리고…….”

베로니카의 금빛 눈동자가 천장 배관을 향했다.

“적들은 문으로만 들어오는 게 아니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 중앙의 거대한 환기구 덮개가 묵직한 충격과 함께 우그러졌다.

쾅! 콰르릉!

암살 집행관들이 쏘아 올린 신전제 파쇄 탄환이 환기 덕트의 무쇠 장갑을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연구동 바닥을 사정없이 짓찧었다.

“산개해! 바닥 충격점 밖으로 피해!”

베로니카가 외치며 로간의 멱살을 잡고 옆쪽 서가 뒤편으로 내던지듯 밀쳐냈다.

쾅, 콰과광!

천장 철판을 찢고 떨어진 성유 탄환 세 발이 연구동 바닥의 석판들을 연쇄적으로 터뜨렸다. 하얀 성유 연기와 함께 튀어 오른 파편이 벽면의 관찰창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그 자욱한 분진을 뚫고, 은박 갑주를 두른 암살 집행관 셋이 묵직한 군화 소리를 울리며 내려앉았다. 그들의 손에는 신전 특유의 은빛 연발 쇠뇌와 살상용 처형 단검이 들려 있었다.

“전원 즉각 사살. 주동자 생포 명령은 없다.”

선두에 선 집행관의 차가운 음성과 함께, 세 자루의 쇠뇌가 일제히 서가 쪽을 겨누었다.

“어림없는 소리!”

펠릭스가 이를 악물고 튀어나왔다. 양팔을 앞으로 뻗자 손목의 흉터 자국을 따라 붉은 마력이 용솟음쳤다.

“견고의 명제, 셋째 격자 전개!”

지하 바닥에서 솟구친 단단한 암갈색 룬 방벽이 세 겹으로 겹쳐지며 집행관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타타타탕!

은박 탄환들이 룬 방벽에 무수히 틀어박히며 불꽃을 뿜었다. 하인츠의 저주 룬에서 벗어난 펠릭스의 결계는 단단했으나, 신전 성유를 머금은 탄환의 파쇄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방벽 표면에 순식간에 거미줄 같은 금이 번져 나갔다.

“로간! 바닥 비밀 통로는 어디야? 이 방벽으로 오래 못 버텨!”

펠릭스가 턱을 바짝 당기며 버텼다. 어깨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로간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바닥에 새겨진 마모된 문양들을 왼쪽 눈으로 훑었다. 붉은 동공 너머로 흐릿한 금빛 인과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제어반 바로 아래, 세 번째 배수구 덮개 밑에 인과 단층이 숨겨져 있어. 40년 전 설립자가 연구동을 폐쇄할 때 파놓은 비밀 보관고 통로야. 하지만 조건절이 걸려 있어. 학부 인장과 성유 반응이 동시에 맞물려야 풀려.”

“인장은 내 목걸이에 있어. 하지만 성유는…….”

베로니카가 허리춤에서 학부 조교 인장을 뽑아 들며 말을 잇던 찰나였다.

“성유라면…… 여기 있다!”

등 뒤에서 떨리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연구동 구석 기둥 뒤에 웅크리고 있던 말콤이었다.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던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품 안에서 은박 보자기에 싸인 두툼한 양피지 조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을 은은하게 뿜어내는 그 파편은 조금 전 최심부 보관소에서 하인츠가 버려두었던 태초 원전 예언서의 찢겨진 잔류 파편이었다.

“말콤, 너 그게 어디서 났어?”

로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처장실 금고에서…… 아니, 최심부 좌대 밑바닥에서 주웠다! 바티카 제1원전의 폭주를 증명할 유일한 원전 파편이야! 이단 심문청 놈들도 이 파편 앞에서는 나를 함부로 죽이지 못해!”

말콤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비틀며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너희 같은 반역자 버러지들과 함께 개죽음당할 것 같으냐? 난 신전의 공인 감사관이다!”

“미쳤어? 당장 안으로 들어와! 결계 밖으로 나가면 벌집이 돼!”

베로니카가 팔을 뻗었지만, 말콤은 이미 이성을 잃고 방어선 측면의 틈새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는 양피지 파편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집행관들을 향해 악을 썼다.

“사격 중지! 쏘지 마라! 난 감사관이야! 이 성유 파편을 넘길 테니 내 면책특권을 보장하라고, 이 미친 살인귀들아!”

집행관들의 총구가 멎은 것은 결코 말콤의 신분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바이저 너머 시선이 말콤의 손에 들린 양피지 파편에 맺힌 원초적인 신성어 문장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행관들의 반응은 말콤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목표물 확인. 현장 오염원 및 기밀 유출자, 예외 없이 처단한다.”

선두의 집행관이 쇠뇌를 거두고 허리에서 눈이 시리도록 차가운 은빛 장검을 뽑아 들었다. 처형 집행관 지휘관이었다.

“뭐…… 뭐라고? 난 성도의……!”

말콤이 경악해 뒷걸음질 치는 순간, 지휘관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서걱!

말콤의 어깨 가죽이 길게 찢기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끄아아악!”

말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가 쥐고 있던 예언서 파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돌발 행동이 불러온 파장은 치명적이었다. 말콤이 튀어나가며 뚫어버린 동선 탓에, 펠릭스가 유지하던 룬 방벽의 남서쪽 측면 좌표가 강제로 흐트러진 것이다.

“안 돼! 결계 축이 틀어졌어!”

펠릭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피를 한 바가지 토해냈다.

우르릉! 콰아앙!

측면 방벽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방어선이 무너진 틈을 타 뒤따르던 집행관 둘이 성유 유탄을 들이부었다.

폭음과 함께 파편들이 방어선 안쪽으로 사정없이 들이쳤다. 바닥에 결박된 채 쓰러져 있던 하인츠의 허벅지와 옆구리에 굵직한 쇠조각들이 틀어박혔다.

“크흑…… 멍청한 신전 개자식들이……!”

하인츠가 거품을 물며 바닥을 뒹굴었다.

“펠릭스, 뒤로 물러서! 내가 받아칠게!”

베로니카가 주석서의 페이지들을 허공에 흩뿌리며 억제 결계를 펼쳤지만, 이미 지휘관의 그림자가 방벽의 잔해를 짓밟고 중앙 실험실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든 뒤였다.

지휘관의 은빛 처형검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그의 서늘한 칼끝은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말콤이 아니라, 흑요석 깃펜을 쥐고 바닥의 탈출구를 계산하고 있던 로간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은빛 검날이 공기를 찢으며 짓쳐들었다. 서릿발 같은 살기가 목덜미를 스치기 직전, 로간은 바닥을 구르며 품에서 흑요석 깃펜을 뽑아 들었다.

채앵!

지휘관의 칼끝이 로간이 방금 전까지 웅크리고 있던 석제 바닥판을 파고들며 불꽃을 뿜었다. 바닥에 박힌 칼날을 비틀어 뺀 지휘관의 시선이 공중에 떠오른 양피지 파편으로 향했다. 말콤의 손에서 튕겨 나간 그 종이쪽지는 허공에서 붉은빛을 뿜으며 거칠게 맥동했다.

“더러운 이단자 놈들. 쥐새끼처럼 숨어들 바에야 흔적도 없이 묻어버리겠다.”

지휘관의 왼손 건틀릿에서 백색 성유 마력이 뿜어져 나와 양피지 파편을 옭아맸다. 파편에 새겨진 미완의 신성어가 강제로 과열되며 주변의 마나를 닥치는 대로 빨아들였다. 원전의 찢겨진 문맥이 연쇄 붕괴를 일으키며 연구동 전체를 집어삼킬 폭발로 번지려는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저 자식이 성유로 파편을 폭파시키려 해!”

펠릭스가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지만, 뒤틀린 룬 회로의 반동 탓에 무릎이 꺾였다.

“로간, 피해! 저 파편의 문장엔 자폭 술식이 얽혀 있어!”

베로니카가 주석서 낱장들을 허공에 던지며 소리쳤다. 종이들이 장벽을 형성하려 했으나 성유의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는 덧없이 타들어 갔다.

바닥에 나뒹굴던 말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처절하게 기었다.

“살려 줘! 제발, 난 그냥 지시를 따랐을 뿐이야!”

지휘관은 턱 끝으로 칼끝을 내리누르며 말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사면은 없다. 바티카의 계율에 따라 소각한다.”

말콤의 목을 베어 넘기려던 검날이 내리꽂히는 찰나, 로간의 왼쪽 눈이 시리도록 차가운 자줏빛으로 타올랐다.

안경 렌즈 너머로 세계가 잘게 쪼개졌다. 허공에서 폭발하려는 양피지의 문장이 투명한 실선으로 분해되어 로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폭발의 주어는 ‘성스러운 정화’, 술어는 ‘모든 존재의 영구 소각’이었다.

“감히 주석을 달 자격도 없는 것들이.”

로간은 흑요석 깃펜의 펜촉을 자신의 손바닥에 찍어 피를 묻혔다.

피로 물든 펜촉이 공중의 인과선을 단번에 가로질렀다.

“술어 격하. ‘소각’을 ‘무해한 섬광’으로 치환한다.”

지휘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라고……?”

콰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 대신, 눈을 멀게 할 만큼 거대하고 눈부신 백색 빛무리가 연구동 안을 가득 메웠다.

살을 찢고 뼈를 녹여야 할 성유 폭발이 그저 눈앞을 새하얗게 지워버리는 빛 덩어리로 변질된 것이다. 투구를 쓴 채 섬광을 직격으로 받아낸 집행관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크아악! 눈이…… 시야가 차단됐다!”

지휘관 역시 검을 헛손질하며 허공을 갈랐다.

“펠릭스, 지금이야!”

로간의 날카로운 외침에 펠릭스가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시야가 막힌 틈을 타, 펠릭스는 어깨에 남은 결계 마력을 몽땅 실은 채 강철 방패로 지휘관의 몸통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쿵!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지휘관의 갑주가 우그러지며 뒤편의 석제 격벽으로 처박혔다. 뒤따라 진입하려던 두 명의 암살 집행관까지 연쇄적으로 휩쓸려 나가떨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로니카가 움직였다. 그녀는 피를 흘리며 뒹굴던 말콤의 멱살과 결박된 하인츠의 뒷덜미를 양손으로 사납게 낚아챘다.

“정신 차려, 이 쓰레기들아!”

베로니카는 두 사람을 바닥에 드러난 비밀 통로 입구로 가차 없이 내던졌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비명이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로간은 바닥으로 떨어지던 양피지 파편을 허공에서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은 파편은 여전히 불씨처럼 뜨거웠다. 지휘관이 억지로 주입했던 성유의 그을음이 로간의 피와 맞닿자 스르르 벗겨져 나갔다. 검게 그을린 표면 아래에서 사십 년 전 누군가가 직접 눌러쓴 오래된 잉크 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부 초대 설립자의 고유한 주석 필체였다.

“로간! 빨리 뛰어내려! 뒤쪽 환기구에서 증원군이 내려오고 있어!”

펠릭스가 방패를 던져 부서진 격벽 틈새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베로니카 역시 주석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태워 통로 입구에 임시 차단막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로간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왼쪽 눈의 동공이 극도로 확장되며 양피지 파편에 적힌 감춰진 문장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성도 바티카가 두려워한 것은 지맥을 타고 번지는 파멸의 재앙 따위가 아니었다.

서두 열두 장을 도려낸 초대 설립자의 진정한 목적 역시 세상을 불태울 재앙의 소환이 아니었다.

‘완전한 문맥의 지배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오직 찢겨진 원전의 제물 위에서만 잉태될 뿐이다. 신의 언어를 읽고 비틀어 인과를 조작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눈동자, 그 결실을 기다린다.’

주석의 마지막 줄에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르도의 핏줄이 눈을 뜰 때, 원전의 열두 페이지는 주인을 맞이하리라.’

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전율이 번개처럼 내달렸다.

하인츠의 밀약도, 바티카 제1원전의 폭주도, 학원의 붕괴조차도 거대한 제단에 불과했다.

“초대 설립자가 노린 건 학원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내 왼쪽 눈이었어.”

로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을 증명하듯, 손바닥에 쥐고 있던 양피지 파편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 문양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불길한 붉은빛은 로간의 왼쪽 눈동자로 매섭게 빨려 들어갔고, 그의 시야 전체를 붉은 예언의 문장들이 남김없이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