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10화 · AI 작가 서가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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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집어치워라!”

바닥에 처박힌 하인츠의 목덜미에서 끓어오르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깨의 룬 핵이 완전히 부스러져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면서, 노인의 두 눈은 피발을 세운 채 로간을 짓씹을 듯 노려보았다.

“내가 속았다고? 감히 일개 낙제생 따위가 바티카와 나의 계약을 논해? 그딴 조악한 속임수에 넘어갈 성싶으냐!”

“속임수가 아닙니다, 처장님.”

로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흑요석 좌대 위에 놓인 예언서의 첫 장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신성어의 문맥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제1장이 시작되는 본문과 양피지 제본선 사이의 간격, 그리고 이 절단면의 산화 정도를 보십시오.”

차갑게 식은 푸른 불빛 아래서, 잘려 나간 열두 장의 공백이 흉터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종이의 절단면은 칼로 도려낸 듯 매끄러웠으나, 종이 표면의 섬유질은 이미 바스러질 정도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어제오늘 일어난 파괴가 아니었다. 족히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봉인실의 건조한 공기를 쐬며 삭아 내린 흔적이었다.

그때, 보관소 문틀 뒤에 얼어붙어 있던 말콤이 별안간 감식봉을 쥐고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비켜 봐! 비켜 서란 말이다!”

말콤의 핼쑥한 뺨이 경련했다. 그는 펠릭스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좌대 앞으로 끼어들었다.

“원전 예언서 훼손이라니…… 이게 무슨 짓인가! 신전 율법 제7조, 성유물 파손 및 신탁 모독죄에 해당한다! 이건…… 그래, 너희 정정학부 놈들이 진실을 감추려고 사전에 예언서를 절단한 게 분명해!”

말콤은 하인츠에게 배신당해 죽을 뻔했던 처지도 잊은 듯, 감식봉 끝을 바들바들 떨며 베로니카를 겨누었다. 교황청의 장기말로 버려졌다는 수치심을 덮고, 자신이 살아남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악하는 꼴이었다.

“내가 이 현장을 감사관 권한으로 봉인하겠다. 너희가 원전을 훼손한 주범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바티카로 송부하면…….”

“헛소리는 거기까지 해.”

베로니카가 허리춤에서 두꺼운 주석서를 꺼내 들며 차갑게 말을 잘랐다. 날카로운 금안이 말콤의 정수리를 꿰뚫을 듯 번뜩였다.

“입 닥치고 뒤로 물러서요, 감사관. 발자국 하나라도 좌대에 더 가까이 대면 이 자리에서 신체 구속 조항을 적용할 테니까.”

“뭐, 뭐라고? 나는 교황청 직속의 정식 감사관이다! 일개 조교 따위가……!”

“당신 목숨을 건져준 게 누구인지 벌써 잊었나 보지?”

펠릭스가 붕대를 감은 억센 팔로 말콤의 앞을 가로막았다. 펠릭스의 붉은 눈매가 사납게 구겨지자, 말콤은 흠칫하며 쥐고 있던 감식봉을 슬그머니 내렸다.

로간은 그들의 설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은 뒤, 금빛으로 박동하는 왼쪽 눈을 바짝 기울여 잘려 나간 종이의 밑단을 응시했다.

시야가 겹치며 신성어의 잔류 궤적이 선으로 피어올랐다.

도려내진 열두 장의 단면에는 아주 미세한 푸른 묵흔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겉보기에 신전에서 흔히 쓰는 이단 봉인 낙인처럼 보였다. 꼬리를 물고 있는 세 마리의 뱀. 말콤이 트집을 잡으려 했던 것도 바로 그 흉측한 외형 때문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로간의 눈에 비친 본질은 전혀 달랐다.

문장의 뼈대가 신전의 성유 술식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신전의 술식은 명제를 위에서 억누르고 지우는 독단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이 뱀 문양은 달랐다. 원문의 문맥을 틈새에서 비틀어, 바깥에서는 마치 원래부터 아무 내용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고도의 은닉 술식이었다.

“선배.”

로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베로니카를 불렀다.

“이리 와서 이 제본선 안쪽을 확인해 주십시오.”

베로니카가 말콤을 흘겨보며 로간의 곁으로 다가왔다. 로간은 손가락 끝에 미약한 마나를 둘러, 단면에 굳어 있던 뱀 문양의 가장자리 껍질을 살짝 긁어냈다.

파스스, 하고 마른 가루가 떨어져 나가자 그 밑에 숨겨져 있던 아주 작은 주석 부호가 드러났다.

화살표와 괄호, 그리고 문장의 순서를 뒤바꾸는 십자형 정정 기호.

베로니카의 숨이 순간 턱 막혔다. 그녀가 평생 만져온 학부의 비밀 교재에 적힌 표기법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건…… 주석 왜곡식?”

“맞습니다. 이 단면을 봉인한 건 신전의 성유가 아닙니다, 선배. 우리 정정학부의 태초 주석식이에요.”

로간의 단언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하인츠의 어깨가 굳었다.

말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주석식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냐! 저 뱀 문양은 명백히 이단의……!”

“이단이 아니라 학부 초대 설립자의 개인 인장입니다.”

로간이 말을 끊으며 단면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왼쪽 눈에 맺힌 금빛 광채가 세 마리 뱀의 눈동자 좌표를 하나씩 풀어냈다.

“신전의 성유로 삭아낸 자리라면 마나의 회로가 거칠게 찢겨 나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단면을 보십시오. 신성어의 어간과 어미를 정확히 분리해서, 책 전체의 결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주석식으로 양쪽을 꿰매어 두었습니다. 이건 우리 학부의 설립 암호를 모르면 아예 손을 댈 수도 없는 기술입니다.”

베로니카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만년필을 뽑아 들었다. 잉크 끝을 단면에 살짝 대자, 푸른 묵흔이 반응하며 고대 제국력 표기 하나를 허공에 띄워 올렸다.

사십 년 전.

아카데미가 제국 황실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기 직전의 날짜였다.

“사십 년…… 전이라고?”

베로니카가 헛숨을 내쉬었다.

“학부가 설립되기도 전에…… 이미 서두가 뜯겨 있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왜곡식을 완성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입니다. 학부의 기틀을 닦고 지맥 아래에 이 보관소를 설계했던 초대 설립자.”

로간이 서늘한 눈빛으로 바닥의 하인츠를 내려다보았다. 하인츠의 얼굴에서는 비열한 비웃음이 완전히 가셔 있었다. 노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입술이 말라붙어 있었다.

“하인츠 처장님. 당신은 교황청에 이 원전 예언서를 통째로 넘겨주고 대가를 받으려 했지요. 하지만 당신도 몰랐던 겁니다. 당신의 거래처였던 교황청조차, 이 책의 알맹이가 사십 년 전에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로간이 한 걸음 다가가 하인츠의 턱밑에 시선을 꽂았다.

“아니, 어쩌면 바티카가 원했던 건 이 빈 껍데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대답해 보십시오. 서두 열두 장을 가져간 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인츠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핏덩이와 함께 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깨의 룬 핵이 완전히 박살 나 바닥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노인의 풀린 동공은 집요하게 로간의 왼쪽 눈을 훑고 있었다.

“어디에 있느냐고……? 네놈의 그 흉측한 왼쪽 눈깔이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줄 알았더냐, 건방진 필경사 놈.”

하인츠가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헐떡였다. 턱 끝을 타고 흐른 붉은 침이 바닥의 차가운 석판을 적셨다.

“네놈의 그 눈도 결국 껍데기뿐인 글자나 덧칠하는 잔재주에 불과해. 바티카가 왜 이 보관소를 통째로 요구했는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질문은 내가 했습니다, 처장님.”

로간이 냉랭하게 말을 자르며 한 걸음 다가서자, 펠릭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나섰다. 펠릭스는 발밑에 뒹굴던 전이 마법진의 끊어진 결계 도선 하나를 구둣발로 콱 짓밟았다. 구리선 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며 하인츠의 사지를 결박한 봉마 족쇄의 마나 회로로 역류했다.

찌르르, 하는 파열음과 함께 족쇄의 톱니가 하인츠의 손목과 발목 뼈마디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크아악!”

하인츠가 등허리를 꺾으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입조심하십시오.”

펠릭스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한때 은사로 모셨던 자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르도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요. 내 팔에 박아 넣었던 그 저주받은 룬 족쇄의 고통을, 이번엔 당신 온몸의 마나 회로로 직접 맛보고 싶지 않다면.”

“펠릭스, 회로를 태우지는 마. 뇌가 타버리면 증언의 법적 효력이 사라지니까.”

베로니카가 만년필 끝으로 하인츠의 미간을 겨누며 차갑게 덧붙였다. 그녀의 단정한 잿빛 제복 자락이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다.

“학사 규정 제4조 위반, 반역죄, 공문서 조작, 지맥 파괴 공모. 하인츠, 당신의 직위는 이 자리에서 영구 박탈이야. 추기경 좌석? 바티카 교황청이 왜 일개 학사처장 따위에게 그런 거창한 자리를 약속했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처음부터 이용당하고 버려질 미끼였어.”

“입 닥쳐라, 폰 헤르츠가의 계집애……!”

하인츠가 경련하는 목을 억지로 비틀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베로니카의 논리정연한 지적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로간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교황청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성도 바티카 지하의 제1원전이 폭주해 도시 전체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알맹이인 서두 열두 장이 뜯겨 나간 빈 책을 비싼 값에 사들일 이유가 없죠. 게다가 당신의 양각 열쇠판 밑바닥에는 처음부터 소각 기폭관이 박혀 있었습니다. 바티카는 이 보관소의 문을 열자마자 당신을 흔적도 없이 태워 죽일 작정이었어요.”

로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하인츠의 마지막 자존심을 난도질했다.

“그들이 진짜 원한 건 이 원전 예언서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뜯겨 나간 서두를 되찾기 위해, 이 책에 남아 있는 인과의 잔향이 필요했던 겁니다.”

“……!”

하인츠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숨기려 애쓰던 진실이 정곡을 찔리자, 노인의 메마른 가슴이 불규칙하게 들썩였다.

“그래…… 네놈 말이 맞다.”

하인츠가 피를 토해내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체념 어린 악의를 쏟아냈다.

“바티카가 손에 넣으려던 건 단순한 고문서가 아니야. 그자들은 도난당한 서두를 뜯어간 자의 생체 좌표를 역추적할 매개체가 필요했던 거다!”

“생체 좌표라고?”

베로니카가 미간을 좁히며 다그쳤다.

“도난 사건은 사십 년 전 일이야. 초대 설립자가 살아 있을 리가…….”

“살아 있다!”

하인츠가 피를 흘리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노인네는 죽은 적이 없어…… 바로 이 학원 심장부에 살아서 박혀 있단 말이다!”

보관소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멎었다. 펠릭스의 손이 굳었고, 베로니카의 깃펜이 허공에서 멈췄다.

하인츠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로간을 향했다.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사십 년 전 뜯어간 서두 열두 장에 뭐가 적혀 있었는지 알아? 태초의 신들이 세계를 짓이기기 위해 봉인해 둔 ‘원초적 재앙의 소환식’이다! 바티카 지하의 제1원전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야. 바로 그 노인네가 아카데미 지하 깊은 곳에서 단독으로 그 소환식을 가동해, 대륙 전체의 지맥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하인츠가 쉰 숨을 몰아쉬며 기괴하게 웃었다.

“교황청은 그 소환식을 멈추지 못하면 바티카가 먼저 잿더미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 보관소의 껍데기 책을 회수해 반전 나침반으로 삼아, 그 노인네의 심장을 직접 도려내려 했던 거다. 내 추기경 좌석은…… 그 노인네의 목을 따기 위한 길잡이 삯이었단 말이다!”

초대 설립자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아카데미 지하 어딘가에서 세계를 멸망시킬 소환식을 돌리고 있다.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난 순간, 로간의 귓가에 미세한 마나의 마찰음이 스쳤다.

바티카나 설립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금속의 마찰음.

로간이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일행의 뒤쪽, 무너진 제단의 잔해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신전 감사관 말콤이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황동 통신 석판을 꺼내 들고 있었다.

말콤의 파리한 손가락이 석판 표면의 신성어 좌표를 조작했다.

지하 최심부의 방위각과 봉인 해제 신호. 바티카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직통으로 송출하는 긴급 구조 주파수였다.

“말콤 감사관.”

로간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콤의 뺨이 경련하며 굳었다. 들통났음을 깨달은 사제의 눈에 비열한 독기가 번뜩였다. 말콤이 석판을 가슴팍으로 숨기며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였다.

쿠구구구궁!

바닥 전체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장의 청동 대문 위쪽, 본관과 연결된 점검구 방향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지며 붉은 경보 마법진이 일제히 점등했다. 지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압도적인 침입 간섭파가 보관소 전체의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말콤의 손에 쥐여 있던 통신 석판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뿜었다.

천장 균열 틈새로 쏟아져 내린 찌르는 듯한 백색 섬광이 황동판 중심부를 강타했다.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석판 모서리가 시커멓게 녹아내리며 불꽃이 튀었다.

“으아악!”

말콤이 비명을 지르며 석판을 바닥에 내던졌다. 손바닥 가죽이 벌겋게 익어 벗겨진 채였다. 바닥에 떨어진 통신판은 내부 회로가 완전히 엉겨 붙어 푸른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외부에서 밀고 들어온 고위 신성 간섭파가 단말기 자체를 태워 버린 것이다.

“내가 부른 지원이 아니야……!”

말콤이 화상 입은 손을 감싸 쥐며 핏기 없는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이건 교황청 연락망이 아니야. 외부에서 강제로 주파수를 짓눌러 태워 버렸다고! 바티카 본산의 정규 심문관들이 아니라, 신전 암살 집행관들이 움직일 때나 쓰는 특수 파쇄식이다!”

말콤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천장의 균열 사이로 굵은 먼지와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지상에서부터 전해지는 충격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본관 상층부 전체를 틀어쥔 거대한 신성 마나의 파동이 나선형으로 맴돌며 지하를 향해 쐐기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위쪽 점검구가 막혔어!”

베로니카가 벨트에 차고 있던 두꺼운 주석서를 뽑아 들며 외쳤다. 책장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마나 선들이 천장 통로를 훑었으나, 곧바로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튕겨져 나왔다.

“본관 1층으로 이어지는 비상 배관 통로의 결계 축이 바깥에서 강제로 차단됐어. 단순한 폐쇄가 아니야. 누군가 위에서 아카데미 방어 결계의 권한을 통째로 뒤흔들어 봉쇄 빗장을 걸어 잠근 거야.”

“빌어먹을, 처장실 금고 털고 내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 지경이야?”

펠릭스가 쇠사슬에 묶인 하인츠의 멱살을 거칠게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양팔의 화상 흉터가 붉게 달아올랐지만, 결계 족쇄에서 풀려난 펠릭스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하인츠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며 낮게 헐떡였다.

“소용없다…… 크큭, 어차피 너희는 지상으로 한 발자국도 못 올라가…….”

“입 닥치세요, 처장님. 아직 당신 몫의 심문은 반도 안 끝났으니까.”

로간이 냉정하게 말을 자르며 양손에 든 음각과 양각 열쇠판을 가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왼쪽 눈꺼풀 안쪽에서 묵직한 열감이 치솟았다. 시야를 푸르게 물들이는 신성어의 궤적을 훑자, 천장을 가로막은 차단벽 너머로 수십 갈래의 붉은 살육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층부의 결계는 이미 누군가의 손에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였다. 이곳 최심부 암반층에 머물렀다가는 퇴로도 없이 생매장당할 판이었다.

“최심부는 퇴로가 없습니다. 지하 4층 정정학부 연구동으로 철수합니다. 연구동 통제실의 독립 배선이라면 지상의 간섭을 끊어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요.”

로간의 지시에 베로니카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연구동 방어벽은 학부 설립 당시의 독자적인 룬으로 짜여 있어. 본관의 중앙 제어선이라도 쉽게 뚫지 못해. 펠릭스, 죄수를 끌어!”

“알았어, 선배!”

펠릭스가 하인츠를 어깨에 들쳐멨다. 일행은 무너진 보관소의 청동 대문을 빠져나와 좁고 가파른 비상 암석 통로로 내달렸다.

등 뒤에서 또 한 번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천장을 뚫고 쏟아진 백색 간섭파가 바닥의 석판들을 산산조각 내며 뒤를 쫓았다.

“내 뒤로 바짝 붙어!”

펠릭스가 발을 구르며 뒤를 돌아섰다. 양팔에서 터져 나온 푸른 결계 파편들이 겹겹이 층을 이루며 둥근 방패 형태로 전개되었다. 콰직, 콰지지직! 백색 간섭파가 결계 표면에 부딪히며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뿜어냈다. 펠릭스의 어깨가 충격으로 뒤로 밀렸지만, 족쇄에서 해방된 그의 결계는 깨지지 않고 간섭 파동을 옆쪽 암벽으로 비껴 흘려보냈다.

그 틈을 타 로간과 베로니카가 앞장서서 비상문 빗장을 걷어찼다.

철컥, 쿵!

묵직한 황동 문이 열리며 익숙한 잉크와 석회, 유황 냄새가 일행을 맞이했다.

루미나리스 아카데미 지하 4층, 예언 정정학부 연구동이었다.

지상의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거대한 지하 석조 강의실. 허공에는 수십 개의 붉은 묵시록 석판들이 부유하고 있었고, 차가운 증기 배관이 벽면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일행이 통로 안쪽으로 들이닥치자마자 베로니카가 연구동 입구의 황동 레버를 바닥까지 내렸다.

쿠구궁!

삼중으로 겹쳐진 무쇠 격벽이 바닥에서 솟아오르며 뒤따라오던 간섭파의 잔해를 완벽히 차단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하인츠가 거친 기침을 토해냈고, 뒤따라 들어온 말콤은 문가에 주저앉아 화상 입은 손을 떨며 헐떡였다.

로간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연구동 중앙에 위치한 원형 통제실 콘솔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콘솔 위에는 아카데미 전역의 결계 상태를 나타내는 푸른 수정구가 놓여 있었지만, 지금 그 구체는 흉측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선배, 제어반을 열어 주세요.”

베로니카가 깃펜 끝으로 콘솔 테두리의 봉인 룬을 빠르게 긁어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제어반의 기계 장치가 맞물리며 지상 본관의 결계 현황판이 수십 장의 양피지 투영체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을 확인한 베로니카의 금빛 눈동자가 매섭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본관 중앙 결계탑이 완전히 침묵했어. 지상 경비대는 물론이고 원로 교수단의 권한까지 전부 먹통이야.”

“누가 장악한 겁니까? 신전입니까?”

펠릭스가 하인츠를 발로 툭 차며 으르렁거렸다. 하인츠는 멍이 든 얼굴로 헛웃음을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콘솔 중앙의 황동 슬롯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리며 덜컹거렸다. 증기 배관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김 사이로, 붉은 밀랍이 칠해진 두꺼운 석판 한 장이 슬롯을 밀치고 튀어나왔다.

지상 본관 총장 직속 직인이 찍혀 있는 긴급 신탁 영장이었다.

베로니카가 굳은 얼굴로 영장을 집어 들었다. 석판 표면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 내려가던 베로니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학사처장 하인츠의 모든 직무를 즉각 정지한다. 사유, 성도 바티카와의 불법 밀약 및 아카데미 제단 손괴…….”

“뭐야? 그럼 상층부에서 저 인간의 배신을 알아채고 처단하려는 거잖아? 잘된 거 아니야?”

펠릭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베로니카가 석판을 차갑게 내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뒤를 봐. 정정학부 전원에 대한 즉각 사살 명령이 첨부되어 있어. 연구동에 진입한 즉시 학생과 조교, 관련자 일체를 이단 반역자로 간주하여 현장에서 멸각할 것.”

말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나, 나까지 포함이란 말인가? 난 신전에서 파견된 정식 감사관인데!”

“당신이 감사관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뜻이지. 애초에 증거를 남길 생각이 없는 거야.”

로간이 다가가 석판을 응시했다. 안경 너머 왼쪽 눈에 서늘한 푸른 마나가 응집되었다.

신성어의 문맥을 뜯어보던 로간의 시선이 영장 맨 밑바닥의 서명란에 멎었다.

그곳에는 총장의 서명 대신, 기괴하게 똬리를 튼 채 세 갈래 관을 머리에 얹은 뱀 문양 낙인이 선명한 핏빛으로 찍혀 있었다.

조금 전 최심부 보관소에서 보았던, 태초 원전 예언서의 서두 열두 장을 뜯어낸 자가 남겨둔 바로 그 낙인이었다.

“이건 신전의 짓도, 총장의 명령도 아니야.”

로간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구동의 정적을 갈랐다.

“처장이 잡히길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줬어. 하인츠 위의 진짜 흑막이 지금 본관 탑에 올라탄 거다.”

사십 년 전 원전의 첫머리를 도려냈던 학부의 초대 설립자.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자의 대리인이 하인츠의 실각과 동시에 상층부의 전권을 쥐고 신전의 암살 집행관들을 학원 안으로 직접 끌어들인 것이다.

그 순간, 연구동 천장의 두꺼운 철판 위로 쿵, 쿵, 쿵 하는 규칙적인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상층부 환기 배관과 비상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신전문 암살 집행관들의 무거운 철제 군화 소리였다. 그 서늘한 살기가 굳게 닫힌 무쇠 격벽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로간은 겉옷 안쪽에서 묵직한 흑요석 깃펜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