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12화 · AI 작가 서가

제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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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로간! 네 왼쪽 눈에서 붉은 피가 넘쳐흐르고 있단 말이야!”

베로니카가 로간의 멱살을 잡아채 거칠게 흔들었다.

로간은 답하지 못했다. 귓구멍 안쪽까지 뜨겁게 끓어오르는 쇳물이 차오른 듯 숨이 턱 막혔다. 파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잉크 자국은 단순한 마력 찌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막을 뚫고 들어가 시신경을 한 올씩 짓이기며 뇌수에 직접 룬을 새겨 넣고 있었다. 시야의 절반이 핏빛 격자로 쪼개졌다. 연구동 벽면의 석재 이음매마다 핏빛 주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로간의 귓가에 쉰 목소리를 쏟아냈다.

바르도의 혈맥. 열두 장의 서두를 비틀 유일한 그릇.

귓전을 긁어대는 묵직한 이명에 로간은 무릎을 꺾었다. 왼쪽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터져 나온 것처럼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끝이 덜덜 떨리며 바닥의 차가운 돌판을 긁었다. 파편은 이미 잿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눈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지만, 그 문맥의 무게는 두개골을 부숴버릴 듯 팽창했다.

탕! 탕!

천장 배관을 찢어발기며 굵직한 은박 철갑 탄환들이 쏟아졌다. 파열된 석회 가루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사이로 집행관들의 검은 군화가 환기구 철망을 짓밟고 내려앉았다.

“사살 대상 확인. 바르도의 혈통을 확보하거나 불능화하라!”

지휘관의 짓이겨진 목소리가 연구동 울림통을 타고 퍼졌다. 그 뒤를 이어 세 명의 집행관이 은박 탄창을 갈아 끼우며 총구를 아래로 겨누었다.

“로간, 일어서! 여기서 굳어버리면 다 죽어!”

베로니카가 로간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메어 올리며 바닥에 뚫린 비밀 통로로 끌어당겼다.

“펠릭스! 차단판 내려!”

“막고 있습니다! 젠장, 놈들이 쏘는 탄환에 성유가 실려 있어서 방벽이 갈라집니다!”

펠릭스는 양팔의 힘줄을 바짝 곤두세운 채 강철 방패를 통로 덮개 틈새에 비스듬히 박아 넣고 있었다. 상부에서 쏟아지는 탄환들이 방패 표면을 강타할 때마다 푸른 룬 불꽃이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챙, 채쟁!

한 발이 펠릭스의 견갑을 스치며 거친 쇳소리를 냈다. 피가 번졌지만 펠릭스는 발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족쇄에서 풀려난 마력을 방패 중앙에 욱여넣었다.

“하인츠 처장 놈이랑 저 감사관 놈은 이미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선배, 로간 데리고 먼저 떨어지십시오!”

“펠릭스, 너 혼자선 저 화망을 못 뚫어!”

“혼자 안 죽습니다! 빨리요!”

펠릭스가 방패를 쥔 팔을 비틀며 덮개의 경첩을 발로 걷어찼다. 무거운 석제 상판이 쿵 소리를 내며 절반쯤 닫혔다.

로간은 번쩍이는 붉은 시야 속에서 펠릭스의 방패에 새겨진 방어 명제를 보았다. 그 룬은 지맥의 충격을 버티기 위한 형태였으나, 상부에서 내리꽂히는 신전의 은박 탄환은 결계의 연결 마디를 날카롭게 쪼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덮개가 완전히 닫히기 전에 방패가 부서지고 펠릭스의 심장에 탄환이 박힐 터였다.

말을 해야 했다. 신성어의 연결을 끊어야 했다.

하지만 턱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각성된 왼쪽 눈은 원전 서두 열두 장이 품고 있던 근원적인 조작 권능을 강제로 개방하며 로간의 온몸을 짓눌렀다. 온몸의 피가 역류해 눈으로 몰려드는 감각이었다.

“술어…….”

로간의 입술 사이로 피거품 섞인 쉰 소리가 간신히 비어져 나왔다.

“뭐라고? 로간, 말하지 마! 출혈이 멎질 않아!”

베로니카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로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수직 강하구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공중에 붕 뜨는 감각과 함께 거친 쇠사슬이 살갗을 스쳤다.

로간은 떨어져 내리는 찰나에도 왼쪽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감을 수 없었다. 눈꺼풀 안쪽에서 타오르는 붉은 인과선이 허공에 매달린 덮개의 축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로간은 베로니카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려, 피 묻은 손가락 끝으로 허공의 글자를 그었다.

“고정…… 결속.”

단 두 단어였다.

그 순간 로간의 왼쪽 눈동자 안에서 똬리를 튼 세 마리 뱀의 붉은 룬이 섬광처럼 회전했다.

철컥!

펠릭스가 버티고 있던 통로 덮개의 경첩부가 기괴한 금속성을 내며 뒤틀렸다. 쏟아지던 은박 탄환들이 덮개 표면에 닿는 순간, 튕겨 나가지도 뚫고 들어오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정지했다. 탄환의 운동 에너지 자체가 ‘영구 결속’이라는 명제에 묶여 석판 틈새를 메우는 용접재로 변질된 것이다.

“어……?”

펠릭스가 멍하니 두 손을 바라보았다. 방패를 짓누르던 무지막지한 반작용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상부 덮개와 바닥 석재가 하나로 녹아붙으며 단단한 암반처럼 굳어버렸다.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뛰어내려, 펠릭스!”

지하 배관로 바닥에서 베로니카의 날 선 외침이 메아리쳐 올라왔다.

펠릭스는 방패를 거두고 망설임 없이 수직 구멍 안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바로 그 직후, 머리 위 완전히 봉인된 석판 위로 집행관들의 성유 폭약이 작렬했다. 거센 진동이 좁은 통로를 뒤흔들며 먼지와 파편을 쏟아냈지만, 로간의 붉은 신성어로 굳어진 상판은 손톱만 한 균열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쿵, 쿠구궁!

펠릭스는 바닥에 깔린 오수와 젖은 모래 위로 구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의 찰과상에서 번진 피가 차가운 오수와 뒤섞였다.

“쿨럭, 젠장…… 방금 그건 대체 무슨 마법이었습니까? 탄환이 바닥에 달라붙어서 굳어버리던데.”

펠릭스가 몸을 일으키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축축한 석벽에 등을 기댄 채 주석서에서 뜯어낸 정화 양피지를 로간의 왼쪽 눈가에 짓누르고 있었다.

“압박해! 지혈이 안 돼. 로간, 내 목소리 들려? 눈에 힘 풀어!”

로간은 젖은 돌바닥 위에서 사지를 떨었다.

오한이 뼈마디 속까지 스며들었다. 분명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지만, 왼쪽 안구는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박혀 있는 것처럼 극심한 열기를 뿜어냈다. 각막에 새겨진 붉은 문자들이 끊임없이 망막을 긁어대며 시야를 뒤흔들었다. 벽면의 금 하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의 궤적까지 문장으로 나뉘어 뇌리에 꽂혔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 과부하가 아니었다.

파편에 깃들어 있던 붉은 인장은 로간의 육신을 태우려는 독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바르도의 핏줄을 강제로 깨우기 위한 열쇠였다. 억지로 비틀려 열린 인과율의 틈새로 신성어의 근원적인 힘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 으…….”

로간의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샜다. 전신을 옥죄는 근육 경련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정신줄 놓지 마. 혀 깨물라.”

베로니카가 자신의 장갑을 벗어 로간의 입가에 물려주려던 찰나, 어둠 저편에서 거친 헛기침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조소가 들려왔다.

“소용없다, 폰 헤르츠 조교.”

벽면에 묶여 주저앉아 있던 하인츠였다. 한쪽 팔의 룬 핵이 부서져 축 늘어진 노인은, 이마에 튄 오수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핏발 선 눈으로 로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몸은 지금 태초 원전의 서두를 받아들이고 있는 게야. 사십 년 전, 초대 설립자께서 바르도 가문의 마지막 숨통을 끊지 않고 살려둔 유일한 이유지.”

“닥쳐!”

펠릭스가 젖은 주먹을 치켜들며 하인츠의 턱밑까지 다가섰다.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당신 입부터 이 벽에 용접해 버리겠어. 로간이 저 꼴이 된 게 네놈들이 꾸민 수작 때문이라는 걸 지금 자랑하는 거냐?”

“자랑? 크큭…… 멍청한 결투사 놈. 사태의 본질을 전혀 보지 못하는군.”

하인츠는 비틀린 입술을 비웃듯 끌어올리며, 바닥에 웅크린 채 신음하는 로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붉은 눈은 저주가 아니다. 이 썩어빠진 아카데미의 지맥을 한 줌의 재로 뒤바꿀 유일한 기폭제지.”

“닥치라고 했을 텐데!”

펠릭스가 룬 족쇄의 굵은 사슬을 틀어쥔 채 하인츠의 멱살을 돌바닥으로 거칠게 내리박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네놈, 네놈 때문이야!”

어둠침침한 배관 틈새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튀어나온 것은 말콤이었다. 어깨를 관통당한 상처에서 끈적한 선혈을 쏟아내면서도, 감식봉을 잃어버린 감사관은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짐승처럼 하인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추기경 좌석? 총본산의 영구 사면령? 날 속여? 내 어깨를 봐! 성유 탄환에 살점이 다 짓이겨졌다고! 네놈이 나까지 소각 제물로 엮어뒀던 거지? 죽여버리겠어. 같이 죽는 거다, 이 교활한 늙은이 놈아!”

말콤의 성마른 손가락이 하인츠의 주름진 목덜미를 거세게 파고들었다. 상처 입은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하인츠의 은자수 로브를 붉게 물들였다.

“말콤 감사관, 비켜! 상처부터 눌러야 해!”

베로니카가 젖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어 말콤의 팔을 낚아챘다. 주석서에서 뜯어낸 지혈 양피지를 그의 상처 부위에 쑤셔 박듯 밀어 넣었지만, 말콤은 고통에 젖은 비명을 지르며 하인츠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이 자를 살려둘 이유가 없어! 본관 결계는 먹통이고 지상에는 즉결 처형 집행관들이 쫙 깔렸다고! 학부 설립자든 교황청이든, 우린 어차피 이 구덩이에서 산 채로 묻힐 운명이야!”

“그 손 치워라, 더러운 신전의 사냥개 놈.”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하인츠는 기침 섞인 조소를 흘렸다. 입안에서 고인 검붉은 핏덩이를 말콤의 이마에 뱉어낸 노인은, 부서진 어깨를 벽에 지탱하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교황청의 비서관 자리 하나에 침을 흘리며 기어 다니던 버러지 주제에, 이제 와서 억울한 척 발악인가? 넌 처음부터 제단 위의 향로에 불을 붙일 성냥개비에 불과했어. 그 쓸모가 다했을 뿐이지.”

“이 개새끼가……!”

말콤이 남은 손으로 품속의 호신용 은제 송곳을 꺼내들었다.

“그만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침전로 공터를 짓눌렀다.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선 로간이었다. 벽면에 짚은 손가락 끝이 파들거렸지만, 바닥을 딛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베로니카의 정화 양피지를 밀어낸 로간의 왼쪽 눈은, 검붉은 룬 문장들이 각막 둘레를 옥죄며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붉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공기 중에 떠돌던 습기와 먼지마저 명사 형태의 문맥으로 분해되어 보였다.

하인츠의 목덜미와 흉부 위로도 핏줄처럼 얽힌 세 갈래의 신성어 서약 선이 낱낱이 떠올랐다.

로간이 말콤의 손목을 낚아채 아래로 꺾었다.

“비키세요, 감사관님. 죽여서 입을 막아버리면 밖으로 나갈 길도 사라집니다.”

“로간, 넌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저자는…….”

“압니다. 당신이 탐욕에 눈이 멀어 훔쳐 온 그 파편 밑바닥에 적힌 주석까지 전부 읽었으니까.”

로간의 서늘한 음성에 말콤이 흠칫하며 쥐고 있던 송곳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하고 차가운 쇠붙이가 돌바닥을 울렸다.

베로니카가 잽싸게 말콤의 등 뒤로 돌아가 지혈용 압박 붕대를 묶으며 그를 벽 쪽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말콤은 턱을 덜덜 떨며 더는 덤벼들지 못했다.

로간은 하인츠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파동이 하인츠의 심장 부근을 정면으로 겨누자, 노인의 흉부에 얽혀 있던 은빛 서약의 뼈대가 삐걱거리며 틀어졌다.

“크윽……!”

하인츠가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력이 거세된 상태에서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인과율의 압박이 전신을 꿰뚫은 탓이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인츠 처장님. 당신 흉곽에 새겨진 그 서약식, 단순한 교황청 뇌물 계약이 아니더군요.”

로간이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노인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교황청 총대주교의 날인 밑바닥에 교묘히 숨겨진 주석식. ‘소모품의 죽음으로써 눈을 뜨게 하라’. 그건 학부 초대 설립자의 친필 인장입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바티카를 이용해 일신을 보전할 생각 따위는 없었어. 교황청의 재앙을 빌미로 아카데미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진짜 이유가 뭡니까?”

하인츠의 핏발 선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자했던 학사처장의 가면은 완전히 벗겨져 나가고, 광신에 사로잡힌 노학자의 메마른 집착만이 남아 있었다.

“흐, 크크…… 역시 바르도의 피로군. 각성하자마자 서약의 은닉 주석부터 꿰뚫어 보다니.”

하인츠는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꺾었다.

“말해 봐라, 로간 바르도. 네가 왜 만년 낙제생으로 남아 있었는지 아나? 왜 마나 감응력이 바닥을 치고, 필경사 가문의 하찮은 돌연변이 취급을 받으며 조롱당했는지 아느냐고!”

펠릭스가 사슬을 팽팽하게 당기며 으르렁거렸다.

“개소리 집어치워! 로간을 일부러 학대하고 궁지에 몬 게 설립자라는 작자의 수작이었단 말이냐?”

“학대? 아니, 보존이지!”

하인츠가 거칠게 소리쳤다.

“원초적 신성어를 읽어내는 눈은, 안락한 상아탑에서 정규 마법식이나 외우는 온실 속 화초에게서는 결코 깨어나지 않아! 절망, 퇴학의 공포,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는 사선의 위기 속에서만 신경계가 한계까지 팽창하며 비틀린 문맥을 파고드는 거다!”

노인은 일그러진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로간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내가 왜 널 진작 죽이지 않았겠나? 대지맥 쐐기 앞에서도, 4층 처장실 금고 앞에서도 난 널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네가 사선에서 문맥을 뜯어고쳐야만 그 저주받은 눈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었네!”

침전로 안의 공기가 얼어붙듯 가라앉았다.

베로니카가 쥐고 있던 붕대를 떨어뜨릴 뻔하며 하인츠를 쏘아보았다.

“그럼…… 처장실의 밀약서도, 지하로 통하는 길을 터준 것도 전부 로간을 이 지경으로 몰아가기 위한 미끼였단 말인가요?”

“그래! 바티카 교황청의 탐욕스러운 늙은이들도, 저기 널브러진 감사관 놈도, 심지어 내 목숨조차도 전부 설립자께서 준비하신 무대 장치에 불과했단 말이다!”

하인츠가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헐떡였다.

“사십 년 전, 초대 설립자께서 원전의 서두를 뜯어내 학원 심장부에 틀어박힌 뒤로 줄곧 기다려온 단 하나의 부품. 세계의 붕괴를 예언한 문장을 현실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 인과를 물리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는 ‘바르도의 눈’. 그게 바로 너다, 로간!”

로간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극심한 두통이 뇌리를 찔렀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히려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내렸다.

“설립자의 각본대로라면, 전 지금 눈이 멀어 광기에 빠져야 정상이었겠군요.”

“뭐?”

“날 몰아붙여 눈을 깨우는 것까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당신들은 한 가지 치명적인 오역을 저질렀습니다.”

로간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하인츠의 옷깃을 잡았다. 그의 왼쪽 눈동자 안쪽에서 붉은 문자들이 회전하며 하인츠의 흉부에 박힌 서약의 문구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주어가 잘못됐어. 난 당신들이 소환하려는 재앙의 완성품이 되기 위해 눈을 뜬 게 아닙니다.”

로간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며 하인츠의 서약식 한가운데 박힌 설립자의 인장을 짓이겼다.

“커헉!”

하인츠가 척추를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흉부의 서약이 강제로 뜯겨 나가며 노인의 입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통로 안쪽 깊은 곳, 굳게 닫혀 있던 고대 차단벽 너머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벽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수백 개의 고대 룬들이 붉은 안광을 토해내며 통로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설립자의 생체 마력이 로간의 각성을 감지하고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켜서, 로간!”

베로니카가 피를 쏟아내며 비틀거리는 하인츠의 목덜미를 낚아채 뒤편 석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바닥에 고인 핏방울이 차단벽의 룬 문양을 타고 번져 나가며 복도 전체가 요동쳤다.

“저 늙은이 말대로라면 문 너머가 바로 지맥 핵과 직결되는 통로야. 하지만 문맥 자체가 비틀려 있어. 결계식의 위계가 최소 7계제 이상이다.”

베로니카의 은회색 단발머리가 지맥의 역풍에 흩날렸다. 품에서 뽑아 든 흑요석 주석 판을 차단문에 갖다 대었으나, 석판 표면의 간섭식은 닿자마자 하얗게 타들어가며 파편으로 바스러졌다.

“젠장, 밀어붙여 봐도 안 먹힙니다!”

펠릭스가 어깨로 육중한 흑요석 문을 들이받으며 방패에 푸른 마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룬 방패의 표면에서 튀어 오른 역류 파동이 오히려 펠릭스의 양팔을 튕겨냈다. 돌바닥을 대여섯 걸음 밀려난 펠릭스가 거칠게 가래침을 뱉었다.

“이건 물리적인 방벽이 아니야. 문장 전체가 통째로 인과율로 굳어 있어. 마법진을 부수려 할수록 문 안쪽에서 우리 마력을 먹어치우고 있단 말입니다.”

“당연하지…….”

석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하인츠가 입술을 달싹였다. 피거품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노인의 흐릿한 눈동자 속에는 기괴한 희열이 서려 있었다.

“그 문은…… 초대 설립자께서 학부를 떠나며 손수 새겨둔 마지막 영구 봉인이다. 그 어떤 고위 주석관도, 바티카의 성유 결계사조차 단 한 글자도 건드리지 못했어. 문에 걸린 인신의 조건을 채우기 전까지는 교황이 와도 열지 못한다.”

“닥쳐!”

어깨의 상처를 지혈 붕대로 틀어막은 말콤이 바닥에 떨어졌던 은제 송곳을 움켜쥐고 절뚝거리며 다가와 하인츠의 턱을 겨누었다.

“해제 암호를 대라, 하인츠! 네놈이 교황청과 내통할 때 쓴 이면 계약 코드든 뭐든 뱉어내! 뒤편 환기구에서 집행관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단 말이다!”

“암호 따위는 없다, 어리석은 감사관 놈.”

하인츠가 힘없이 비웃었다.

“문의 문장을 직접 봐라. 신탁을 왜곡하는 자들의 목을 베던 신전 놈이, 이제 와서 신성 문맥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꼴이라니…….”

로간이 앞으로 나섰다.

왼쪽 눈동자 안쪽에서 붉은빛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파편에서 흘러들어온 원전의 문맥이 시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지만, 그 고통의 대가로 차단벽 표면에 엉킨 신성어의 골조가 투명할 만큼 명확하게 드러났다.

삼중으로 겹쳐진 흑요석 판석 한가운데, 사십 년간 굳어 있던 붉은 문장이 선명한 글자로 떠올랐다.

바르도의 핏줄이 눈을 바치지 않는 한, 문은 영원히 닫혀 있으리라.

“인신공양 명제군.”

로간이 흑요석 깃펜을 고쳐 잡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조건절 자체가 대가를 물리적으로 갈취하도록 짜여 있어. 문을 열려면 바르도 가문의 안구를 도려내 제단 홈에 박아 넣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뭐라고?”

펠릭스가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부릅떴다.

“그럼 저 문을 열려면 네 눈을 진짜로 뽑아내야 한다는 소리야? 미친 짓이야, 로간! 다른 길을 찾아야 해!”

“다른 길은 없어. 위쪽 연구동 통제실은 이미 멸각 영장으로 완전히 폐쇄됐고, 뒤쪽 환기구는 암살 부대가 장악했다.”

베로니카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금빛 눈동자는 로간의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응시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로간, 네 능력이 아무리 신성어를 비튼다 해도 이건 원전의 파편을 매개로 삼은 설립자의 본래 문맥이야. 조건절을 통째로 부정하면 문맥 붕괴의 역반동이 네 뇌를 직접 태워버릴 거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로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흑요석 깃펜의 날카로운 펜촉 끝을 그었다. 붉은 피가 촉을 타고 흘러내리며 깃펜 전체를 검붉게 물들였다.

“설립자가 원한 건 제 핏줄과 제 왼쪽 눈입니다. 그 전제 자체는 건드리지 않아요. 설립자가 쳐둔 덫의 틀 안에서, 오직 술어 하나만 바로잡을 뿐입니다.”

로간이 차단벽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벽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파동이 그의 옷자락을 찢을 듯 펄럭였다. 차단벽에 새겨진 세 갈래 뱀의 낙인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며 로간의 손목을 향해 핏빛 가시를 뻗어냈다.

“바르도의 핏줄은 여기 있다.”

로간의 깃펜이 공기를 가르며 흑요석 표면을 찍어 눌렀다.

챙!

단단한 석벽과 펜촉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로간의 왼쪽 눈동자가 번뜩였고, 시야 속에서 붉게 맥동하던 문단이 느리게 정지했다.

‘바치지 않는다(non dandum).’

신성어의 술어 부위에 새겨진 공양의 어근을 로간의 펜촉이 거칠게 긁어냈다. 문자의 획이 갈라지며 튄 붉은 불꽃이 로간의 소매를 태웠다. 팔의 핏줄이 터져 나가며 피가 솟구쳤지만, 로간의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어를 나로 고정하고, 조건의 대가를 치환한다.”

로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신성어 독음이 흘러나왔다.

“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어낸다(oculo legendum).”

피 묻은 흑요석 펜촉이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차단벽에 새겨진 문맥의 인과 사슬이 단번에 뒤틀렸다.

바르도의 핏줄이 눈으로 읽어내지 않는 한, 문은 영원히 닫혀 있으리라.

그리고 로간의 각성된 왼쪽 눈은, 이미 그 문장을 남김없이 읽어낸 상태였다.

우르르릉!

조건이 즉각 충족되었다.

삼중 흑요석 차단문 한가운데 박혀 있던 세 갈래 뱀의 낙인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육중한 암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틈새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광휘와 지맥의 열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열렸다!”

펠릭스가 방패를 앞세우며 소리쳤다.

그러나 안도감은 채 일 초도 이어지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열려 젖혀진 보관고 내부의 광경을 확인한 순간, 말콤이 손에 쥐고 있던 은제 송곳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 저게 대체 뭐냐……?”

말콤의 턱이 덜덜 떨렸다.

차단문 너머는 단순한 비밀 방이나 탈출로가 아니었다.

그곳은 아카데미 전체를 떠받치는 대지맥의 심장부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거대한 생체 제단이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뻗어 오른 수십 개의 굵은 핏빛 맥관들이 허공에서 거대한 고치처럼 얽혀 있었고, 그 맥관 하나하나가 아카데미 지하의 마력을 끝없이 빨아들이며 고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지맥의 맥동 한가운데, 검은 사제복을 입은 형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살점과 신경줄기가 지맥의 붉은 결정들과 뒤엉켜 있어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제단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사십 년 전 사라졌던 정정학부의 초대 설립자.

그는 단순히 숨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심장부 지맥과 자신의 영혼, 육신을 물리적으로 봉합하여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원전 예언서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스스스스.

허공에 매달린 설립자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초점 없는 안구 대신, 찢겨진 열두 장의 원전 문맥이 담긴 순백의 신성어가 그의 두 눈 속에서 번뜩였다. 그 시선이 차단문을 넘어 로간의 붉게 물든 왼쪽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오너라, 내 완성된 눈동자여.”

인간의 성대가 아닌, 지맥 전체가 진동하며 울리는 묵직한 파동이 공동을 뒤흔들었다.

“마침내 찢겨진 열두 장을 맞이할 시간이다.”

초대 설립자의 거대한 손이 허공을 향해 들려 올려지는 순간, 지맥에서 솟구친 핏빛 폭풍이 일행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