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왜곡 아카데미 · 총 3화 · AI 작가 서가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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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매달린 붉은 흑요석 석판들이 일제히 낮은 진동음을 토해냈다. 황동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냉각 증기가 쉭쉭 소리를 내며 지하 연구동 바닥으로 하얗게 깔렸다. 석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 언어의 날 선 살의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살갗을 베어낼 듯 곤두섰다.

펠릭스가 망설임 없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짧은 붉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와 양팔에 빽빽하게 새겨진 고대 방어 룬이 푸른 형광을 뿜어냈다.

"이 빌어먹을 파동이 복도 너머로 새어 나가면 신전 놈들이 아니라 중앙 탑 경비대까지 몰려올 거다. 얌전히 틀어막지."

펠릭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짓눌렀다. 룬 문신에서 뻗어 나온 푸른빛의 궤적들이 거미줄 형태로 바닥의 석판을 타고 기어 올라가 공중에 뜬 특급 신탁 석판 둘레에 사각 결계를 둘렀다. 쩌정, 하는 마찰음과 함께 석판이 내뿜던 붉은 파동이 결계 벽에 부딪혀 갇혔다.

베로니카는 벨트에 찬 두꺼운 양피지 주석서를 펼치고 깃펜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은회색 단발머리가 단호하게 흔들렸다.

"주어를 갈아치웠다는 건 신탁의 경로를 인위적으로 틀었다는 소리야. 루미나리스 아카데미를 종말의 제물로 바치려면 보통 권한으로는 어림도 없어. 결계 총괄부, 중앙 서고 관리국, 아니면 교무처장 라인. 적어도 4급 이상의 신성 인가 열쇠를 쥔 작자들이다."

베로니카의 깃펜이 주석서에 원내 고위직 직함들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적막한 연구실 안을 채웠다.

"학기 말에 예정된 별의 낙하는 피할 수 없는 정해진 현상이야. 하지만 그 별이 떨어지는 좌표는 원래 여기가 아니었단 뜻이지. 그자가 누구든, 자기가 속한 어딘가를 지키기 위해 아카데미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 한 거다."

로간은 안경을 벗어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왼쪽 눈동자가 짙은 자줏빛으로 물들며 석판의 틈새를 날카롭게 훑었다.

시야가 비틀리고, 돌가루 사이에 박힌 보이지 않는 찌꺼기들이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단순한 끌이나 마법 도구로 파낸 자국이 아니었다. 획의 굵기가 십 분의 일 밀리미터 단위로 정교하게 삭아 있었다. 삭제된 획의 가장자리에는 마나를 머금은 잿빛 침전물이 엉겨 붙어 있었다.

"선배. 깎아낸 흔적 주변을 보십시오."

로간이 석판의 세 번째 줄, 공백의 아래쪽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피부가 닿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춘 손가락 끝에 은빛 가루가 미세하게 반응했다.

"단순히 정으로 쪼아낸 게 아닙니다. 특수한 액체로 획을 녹여낸 다음, 그 위에 덧칠을 해서 문맥의 호흡을 완전히 죽여버렸어요."

베로니카가 깃펜을 멈추고 몸을 기울였다. 금안이 석판의 은빛 잔여물을 쏘아보았다.

"부식성 성유인가?"

"성유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입니다. 신성어를 깎아내고 덧칠할 수 있는 잉크는 대륙 전체를 뒤져도 세 종류뿐입니다. 그중 하나가 이 아카데미 지하 금서고에 보관되어 있죠."

로간의 나직한 설명에 펠릭스가 결계를 지탱하던 팔에 힘을 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서고라고? 거긴 교수급 인가증이 없으면 문고리도 못 만지는 곳이잖아. 게다가 신전 감사관들이 분기마다 재고를 전수 조사하는 통제 구역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흔적이 남습니다."

로간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왼쪽 눈의 보랏빛 안광이 은빛 찌꺼기의 분자 구조를 읽어내듯 서서히 깜빡였다.

"신성어를 지우는 데 쓰인 물질은 '백은의 눈물'입니다. 신전에서 정화 의식용으로 극소량 하사하는 것 외에는, 아카데미 지하 3층 고위 기록실 내부의 밀폐 수납함에만 엄격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사용량은 한 방울 단위까지 장부에 적혀야 해요."

"지하 3층 기록실이라."

베로니카가 턱을 괴며 주석서 귀퉁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곳은 폐쇄 구역이야. 지난달 감사관 말콤이 중간 감사를 핑계로 출입 통제 인장을 덕지덕지 붙여 놓았지. 허가 없이 들어갔다간 그 자리에서 경보 결계가 터져."

"장부를 대조하면 나옵니다."

로간이 말했다.

"주어를 지우려면 최소 석 달 전, 늦어도 반년 전에는 성유를 반출했을 겁니다. 아무리 흔적을 숨겼더라도 장부의 필적이나 페이지의 결손, 잉크의 수불 기록에서 문맥적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을 조작한 자는 서류의 문맥까지 완벽하게 지우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펠릭스가 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도둑고양이처럼 잠입하자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거냐?"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연구 실습의 일환입니다, 펠릭스."

로간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신탁을 교정하려면 원문을 지운 도구의 성질을 알아야 합니다. 백은의 눈물에 섞인 촉매가 은초인지, 아니면 별빛 추출물인지 확인해야 지워진 원래 주어의 획을 복원할 수 있으니까요. 그 장부와 남은 침전물을 확인하지 못하면, 우린 두 달 뒤 대탑과 함께 날아갑니다."

베로니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말은 청산유수로군. 낙제생으로 쫓겨날 뻔했던 녀석치고는 배짱이 두둑해."

그녀는 주석서를 탕 소리 나게 덮어 벨트에 걸었다.

"좋아. 역할 분담을 하지. 펠릭스, 넌 연구실의 차폐 결계를 상시 유지 모드로 전환해 둬.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석판이 발작을 일으키면 안 되니까."

"알았어. 내 마나 코어를 절반쯤 뽑아 연결해 두면 두 시간은 버틸 거다. 대신 기록실 결계를 부수는 건 내 몫이 아니야. 힘으로 깼다간 감사실로 직행 신호가 가니까."

펠릭스가 룬 문신에 집중하며 결계의 핵을 바닥의 황동 홈에 깊숙이 고정했다. 푸른 빛줄기들이 묵직한 자물쇠 형태로 얽히며 특급 신탁 석판의 파동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베로니카가 허리춤에서 가느다란 황동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지하 3층 고위 기록실 앞까지 가는 통로는 내가 연다. 조교 권한으로 순찰 경비병들의 동선은 꿰고 있으니까. 문제는 기록실 문에 걸린 신성 경보 결계야. 말콤이 심어 둔 봉인식이지."

베로니카의 시선이 로간에게 닿았다.

조금 전 지하 강의실 철문 앞까지 들이닥쳤던 말콤의 서슬 퍼런 기세가 떠올랐다. 순백의 예복에 은색 자수 흉갑을 덧댄 말콤은 홀쭉한 뺨을 실룩거리며 철문에 감식봉을 틀어박으려 했었다. 봉인 파쇄 결계가 터지기 직전, 로간은 감사부 승진 심사 규정을 들먹이며 감식봉 내부의 신성 공명이 문틀의 오래된 정화식과 충돌해 장비가 파손될 위험이 크다는 궤변을 문맥 법칙과 엮어 쏟아냈다. 장비 손괴에 따른 감사관 문책과 감점 조항을 짚어내자, 권위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보신주의자였던 말콤은 새파랗게 질려 스스로 감식봉을 거두고 다른 구역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베로니카가 혀를 내두르며 덧붙였다.

"너, 아까 말콤의 감식봉을 말빨로 속여 넘겼지. 승진 심사를 쥐고 흔들어 그 깐깐한 영감을 물러나게 한 건 기가 막혔지만 기록실 문은 사제 놈처럼 귀가 달리지 않았어. 그 눈으로 기록실 문의 경보 결계도 건드리지 않고 넘길 수 있겠어?"

로간이 안경을 다시 꺼내 썼다. 왼쪽 눈의 보랏빛이 렌즈 너머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결계도 결국은 규칙을 문장으로 엮어 둔 것에 불과합니다. '허가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한다'는 명제라면, 허가의 기준을 주석으로 달아 왜곡하면 됩니다."

"실패하면?"

"기록실이 폭발하거나, 우리가 신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겠죠."

로간이 흑연 펜을 손바닥 안에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두 달 뒤엔 전원 사망입니다. 선택지가 없군요."

베로니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연구실 철문을 향했다.

"움직이자. 경비 교대 시간까지 삼십 분 남았다."

세 사람은 팽팽한 침묵 속에서 어두운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지하 4층 연구동에서 지하 3층으로 이어지는 좁은 비상 계단은 냉기가 가득 차 있었다. 석벽 틈새로 새어 나오는 이끼 냄새와 기름 찌꺼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베로니카는 앞서 걸으며 허리춤의 황동 열쇠들을 한 손으로 쥐어 찰랑거리는 쇳소리를 죽였다. 뒤따르는 펠릭스는 양팔의 가죽 토시를 조여 매며 연신 복도 양편의 그림자를 살폈다.

회랑 모퉁이를 돌아서자 두터운 물푸레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짝 둘레에는 백금 선으로 상감된 고대 신성문자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그 표면을 따라 엷은 은색 전류 같은 결계선이 쉼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문 상단에는 루미나리스 아카데미 감사국의 문장인 세 갈래 촛대가 음각되어 있었다.

"저게 말콤이 박아 둔 경보 결계다."

베로니카가 문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석벽 뒤로 몸을 숨기며 턱짓했다.

"인가된 감사관 인장이 없으면, 손잡이에 닿기도 전에 반경 스무 걸음 안의 모든 마나 흐름을 쥐어짜서 지상 1층 경비대에 종을 울려. 결계 해제식을 끼워 넣을 틈 따윈 없어. 문장 자체가 신전 표준 규격이거든."

펠릭스가 혀를 차며 팔뚝의 룬을 덧칠하듯 손가락으로 눌렀다.

"저 백금선 안에 충격 반동을 먹이는 차폐 룬을 쑤셔 넣을 수는 있어. 대신 내 뼈가 세 군데쯤 부러지고, 삼십 초 뒤엔 붉은 불꽃이 천장을 때리겠지."

"그건 잠입이 아니라 자폭이잖아, 펠릭스."

베로니카의 핀잔에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장 뒤쪽에 서 있던 로간에게 쏠렸다.

로간은 안경을 코끝으로 살짝 내렸다. 왼쪽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감추어져 있던 깊은 보랏빛 안광이 어두운 복도를 서늘하게 비추었다. 시야 속에서 물푸레나무 문은 단순한 목재가 아니라, 빽빽하게 얽힌 문장들의 그물망으로 해체되어 보였다.

백금 선을 타고 흐르는 문구는 명료했다.

‘오직 성스러운 서약으로 인가된 관리자만이 이 문턱을 넘을지어다. 허가받지 못한 모든 발걸음에는 신벌의 경보가 내리리라.’

전형적인 조건부 금제문이었다. 주어는 ‘발걸음’이었고, 서술어는 ‘경보가 내리리라’였다. 그 둘을 단단히 묶고 있는 것은 앞부분의 배타적 조건절이었다. 로간의 시선이 문틀 우측 하단, 백금 선의 이음매가 미세하게 벌어진 공백을 포착했다.

"신전 감사국의 문장술은 언제나 지나치게 오만합니다. 문맥에 예외를 두지 않으려다 보니, 단어 하나만 뒤틀려도 전체 명제가 모순에 빠지게 설계되어 있어요."

로간이 품속에서 흑연 펜을 꺼냈다.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었다. 필경사였던 아버지가 물려준, 마나를 흘려보내지 않아도 활자의 뼈대를 긁어낼 수 있는 정밀 세공용 흑연심이었다.

"펠릭스, 문틀 오른쪽 세 번째 마디에 손을 대십시오. 내가 흑연심으로 백금 선의 접속사를 긁어내는 순간, 문장에 갇혀 있던 잔류 전하가 튕겨 나올 겁니다. 그걸 룬으로 삼켜야 합니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끝입니다."

"몇 초나 버티면 되는데?"

"딱 삼 초입니다."

"좋아. 삼 초면 피 한 모금 뱉고 버틸 만하지."

펠릭스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붉은 머리칼 아래로 굵은 힘줄이 솟았고, 양팔에 새겨진 방어 룬 문신들이 둔탁한 흑철색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펠릭스의 넓은 손바닥이 백금 선의 접속 부위를 단단히 덮쳤다.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펠릭스의 팔뚝을 타고 기어올랐다. 펠릭스의 턱관절이 으스러질 듯 맞물리며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룬 문신이 결계의 파동을 빨아들이며 살갗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훅 풍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간이 다가붙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접속사의 어간을 꿰뚫었다. ‘허가받지 못한 모든 발걸음’이라는 구문에서, 로간은 부정 접두사 바로 뒤의 격조사를 흑연심 끝으로 예리하게 긁어 올렸다.

백금 표면에 미세한 흑연 가루가 끼어들며 글자의 획이 비틀렸다. 로간은 여백의 빈틈에 흑연으로 아주 작은 역접 부호를 덧그렸다. 전체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의 인과 관계가 한 바퀴 뒤집히며 백금 선을 흐르던 은색 전류가 일순간 멈칫했다.

파지직, 하는 작은 파열음과 함께 펠릭스가 팔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복도 끝의 비상 종은 울리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깃펜을 손에 쥔 채 긴장된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끝난 거야? 결계가 해제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마력 선은 여전히 살아 있어."

로간이 문손잡이를 잡고 거침없이 아래로 내렸다. 철컥, 하는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자물쇠가 풀리며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 열렸다. 경보음은커녕 아무런 반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펠릭스가 데인 팔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결계를 부순 게 아니라고?"

"출입 금지 문구의 조건절을 건드렸습니다. 지금 이 문은 허가받지 않은 자를 막는 게 아니라, 허가받은 자의 출입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허가자이니 그냥 지나가면 됩니다."

베로니카가 헛웃음을 흘렸다.

"말콤 같은 정식 감사관이 이 손잡이를 잡으면 대가리가 깨진다는 소리군. 기가 막힌 잔머리야. 빨리 들어가자."

세 사람은 지체 없이 기록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로간이 문을 닫자 묵직한 방음 결계가 외부와의 소리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지하 3층 고위 기록실 내부는 서늘하고 건조했다. 천장까지 닿은 수십 개의 흑단목 서가에는 양피지 두루마리와 가죽 장정 장부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공기 중에는 방충용으로 뿌려 둔 유황 가루와 오래된 종이 특유의 퀴퀴한 먼지 냄새가 감돌았다.

베로니카가 허리에서 손가락만 한 발광석을 꺼내 손바닥으로 빛을 가리며 복도 안쪽을 비췄다.

"특수 자재 수불 대장은 안쪽 금고형 서가에 있어. 신전에서 아카데미로 직접 납품하는 성물과 성유는 일반 학사 장부와 따로 분류하거든. 년도별로 묶여 있을 테니 3년 전부터 지난달까지의 기록을 찾아."

세 사람은 가장 안쪽 벽면에 위치한 청동제 서가로 빠르게 접근했다. 펠릭스가 서가 앞을 지키며 복도 쪽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로간과 베로니카는 라벨을 확인하며 두꺼운 장부들을 훑었다.

"찾았다. '신성 자재 및 성유 수급 대장, 제7권'."

베로니카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짙은 갈색 가죽 장부를 뽑아냈다.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서고 안에 울렸다.

로간이 어깨너머로 장부의 글귀들을 응시했다. 석판에서 발견했던 은빛 잔류 성분, 즉 ‘백은의 눈물’은 최고 등급의 정화제이자 신성 문자를 지우거나 고착시킬 때만 사용되는 특수 물품이었다. 일반적인 마법 실험에서는 결코 반출될 수 없는 품목이었다.

"지난 3년간의 기록이야."

베로니카가 손가락으로 장부의 행들을 빠르게 짚어 내려갔다.

"2년 전 대성당 축성식 지원으로 세 병. 작년 마나 폭주 정화 실습으로 두 병…… 그리고……."

베로니카의 손가락이 특정 페이지에서 우뚝 멈췄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게 뭐야."

로간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

장부의 석 달 전 기록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종이의 결을 따라 얇고 예리한 칼날로 페이지 전체를 통째로 도려낸 흔적이었다. 잘려 나간 단면은 너무나 반듯해서, 서촉용 단검으로 자를 대고 그어 낸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댔군."

펠릭스가 뒤를 돌아보며 낮게 읊조렸다.

"석 달 전이면 특급 신탁 석판이 아카데미 지하로 이송되어 온 바로 그 시기잖아."

"장부 자체를 없애면 즉각 감사가 들어오니까, 해당 페이지만 도려내고 앞뒤 장을 실로 교묘하게 다시 꿰맸어."

베로니카가 책등의 실밥을 살피며 이를 갈았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서고를 드나들며 기록을 파기할 수 있는 자는 원내에 몇 없어. 신전에서 파견된 고위 사제거나, 학장단 직속의 관리자뿐이야."

로간은 대답 대신 서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쪽 눈이 렌즈 너머에서 다시금 번뜩였다. 신성 언어나 특수한 성유의 흔적은 아무리 깨끗이 지워도 주변 사물에 문맥의 잔향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청동 서가와 바닥 판석 사이, 먼지가 엉겨 붙은 좁은 틈새에 무언가 걸려 있었다.

로간이 무릎을 꿇고 흑연 펜의 뾰족한 끝을 틈새로 밀어 넣었다. 조심스럽게 긁어 올리자,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불에 그을린 양피지 조각 하나가 걸려 나왔다.

"로간, 뭐야?"

베로니카가 발광석의 빛을 낮추어 로간의 손바닥을 비췄다.

양피지 조각의 가장자리는 불에 타 검게 바스러져 있었지만, 중앙부에는 잉크가 번진 신성 문자의 파편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도 일반 잉크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은빛을 발산하는, 특급 신탁 석판의 공백을 메우고 있던 바로 그 ‘백은의 눈물’ 잉크였다.

도려낸 페이지를 서고 구석에서 소각하다가 미처 타지 않고 틈새로 떨어진 파편이었다.

양피지 조각에는 단 한 줄의 끊어진 문맥만이 식별 가능하게 남아 있었다.

‘……대성전의 주춧돌이 무너지매, 거룩한 성좌가……’

로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성전.

루미나리스 아카데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서쪽 끝, 신전의 권능이 시작된 총본산 대성당을 지칭하는 절대적인 고유명사였다.

"로간, 뭐라고 적혀 있어?"

펠릭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로간은 바스러질 듯 위태로운 양피지 파편을 조심스럽게 접어 품속의 유리병에 넣었다.

"멸망해야 할 장소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로간이 일어서며 서가의 먼지를 털어냈다.

"이 파편의 문맥을 지하 4층의 석판 공백과 대조해야 합니다. 복원실로 돌아가죠."

지하 3층의 복도를 빠져나오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펠릭스는 등 뒤를 살피며 계단 통로의 차폐 룬을 단계적으로 닫았고, 베로니카는 품에서 꺼낸 청동 열쇠로 지하 4층 연구동의 묵직한 이중 철문을 해제했다.

철문이 맞물리며 육중한 잠금장치가 세 번 연달아 덜컹거렸다. 바깥의 냉기와 적막이 단절되고, 잉크와 석회, 유황 냄새가 뒤섞인 연구동 특유의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연구동 안쪽 가장 깊은 곳, 두꺼운 납판으로 사방을 두른 비밀 복원실 중앙에는 붉은빛을 뿜어내는 특급 신탁 석판이 황동 받침대 위 공중에 떠 있었다. 석판 표면의 깊게 파인 문장들 사이로, 은빛 성유가 메우고 있던 칼자국이 흉터처럼 번들거렸다.

"문은 잠갔어. 당분간 경비대 순찰도 여기까지는 안 내려와."

펠릭스가 숨을 고르며 양팔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피부에 빽빽하게 새겨진 방어 룬 문신들이 둔탁한 주황색 빛을 내며 복원실 바닥으로 마력을 뻗었다. 석판에서 흘러나오는 재앙의 파동을 방 안에 가두기 위한 결계였다.

"시간이 많지 않아. 성유 잉크의 휘발 주기는 길지 않으니까."

베로니카가 허리띠에서 주석서와 은제 핀셋을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로간의 손끝을 주시했다.

"로간, 장부 파편을 꺼내."

로간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마개가 열리자, 검게 그을린 엄지손톱만 한 양피지 조각이 핀셋 끝에 집혀 올라왔다. 로간은 그것을 석판의 파인 틈 바로 윗자리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안경을 고쳐 쓴 로간의 왼쪽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동공 안쪽에서 가느다란 마나의 회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석판 표면을 덮고 있던 신성 언어의 위계 질서가 낱낱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신들이 남긴 언어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주어와 목적어, 동사가 맺는 인과율의 결속력이 곧 세계의 물리 법칙을 짓누르는 사슬이었다.

로간의 시야 속에서, 양피지 파편에 남아 있던 은빛 성유 잔여물이 허공으로 가느다란 실선 형태의 빛줄기를 뻗어 올렸다. 그 은빛 실선은 석판의 지워진 공백을 향해 거칠게 빨려 들어갔다.

"문법적 공백이 채워진다……."

로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복원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원래 석판에 새겨져 있던 문장은 ‘루미나리스 아카데미의 대탑이 붕괴하고, 모든 지혜의 등불이 꺼지리라’였다. 그러나 그것은 조작된 결과물에 불과했다. 로간이 수거해 온 파편의 문맥, 즉 ‘대성전의 주춧돌이 무너지매, 거룩한 성좌가’라는 구절이 석판의 삭제된 원본 좌표에 결착되자, 인과율의 사슬이 원래의 형태로 재배열되었다.

은빛 성유 밑에 숨겨져 있던 진짜 문장이 보랏빛 안광에 투과되어 붉은 화강암 표면 위로 떠올랐다.

본래의 주어는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성도 바티카의 총본산 대성전.’

그 아래로 이어진 목적어 역시 아카데미의 대탑이 아닌, 신전의 가장 높은 지성소이자 교황이 좌정하는 ‘태양의 옥좌’였다.

로간이 핀셋을 내려놓으며 안경테를 가볍게 눌렀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문장을 읽어 내리는 어조에는 서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늘의 세 번째 별이 떨어질 원래 장소는 우리 아카데미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대성당의 심장부를 구하기 위해 파멸의 좌표를 아카데미 대탑으로 돌려놓은 겁니다."

복원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펠릭스가 룬 문신이 새겨진 팔뚝을 쓸어내리며 허탈한 헛웃음을 흘렸다.

"대성전의 파멸을…… 우리 쪽으로 떠넘겼다고? 그 사제 놈들이?"

"신탁을 피할 수 없다면, 희생양을 만들어 궤도를 튼다. 신전 내부에서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는 금기 중의 금기지."

베로니카가 작업대 모서리를 짚으며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주석서를 펼쳤다.

"신탁의 대상이 성도 대성전이라면, 제국 전체의 신앙이 무너지고 교단의 권위는 끝장나. 하지만 그 재앙의 대상을 제국 최고의 마법사들을 길러내는 루미나리스 아카데미로 바꿔치기한다면? 교단은 건재하고, 마법사들의 요람만 잿더미가 될 뿐이지."

"단순히 잿더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로간이 석판의 하단을 가리켰다. 보랏빛 눈동자가 문맥의 맨 끝자락에 조각된 작은 음각 인장을 포착하고 있었다.

"신성 언어의 주어를 바꾸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첫째는 방금 확인한 신전 최상위 성유 잉크. 둘째는 이곳 아카데미 중앙 대지맥에 깊숙이 뿌리박힌 좌표 고정 쐐기입니다. 즉, 석판을 변조한 자는 신전의 고위층인 동시에, 아카데미 내부의 방어 결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입니다."

베로니카의 금안이 번뜩였다.

"내부 공모자."

"예. 게다가 이 기말 과제 자체가 함정입니다. 우리 정정학부가 이 석판의 수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면, 인과율의 반동이 터지며 아카데미 대탑의 붕괴는 완전히 확정됩니다. 교단은 손 하나 안 대고 예언 정정학부의 미숙한 왜곡 탓으로 참사의 책임을 돌릴 수 있게 되죠."

로간의 설명에 펠릭스가 바닥을 짓밟으며 이를 갈았다.

"우릴 방패막이로 쓰려고 일부러 이 빌어먹을 석판을 정정학부 기말 실습 과제로 밀어 넣었단 소리군. 말콤 그 감사관 자식이 새벽부터 들이닥친 것도 그 때문이었어. 우리가 손을 대다 죽든, 아니면 손도 못 대고 터지든 확인하러 온 거야."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지도 좁혀졌네."

베로니카가 허리춤의 깃펜을 단단히 쥐었다. 평소의 깐깐한 조교다운 태도 대신, 날 선 적의가 그녀의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정정학부의 존립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이 석판의 주어를 되돌려 놓지 못하면, 이번 학기가 끝나는 날 우리를 포함한 아카데미 전체가 제물로 바쳐져."

로간은 시선을 돌려 허공에 떠 있는 석판의 가장자리를 다시 살폈다. 원래의 주어인 대성전을 가리키던 은빛 잔흔의 한쪽 구석에, 성유를 바를 때 눌러 찍힌 직인의 미세한 인영이 걸려 있었다.

아카데미 학장단에서만 사용하는 특수 합금 인장의 압인 자국이었다.

"누가 지맥의 쐐기를 열어줬는지, 흔적이 여기 남아 있습니다."

로간이 흑연 펜을 들어 양피지 귀퉁이에 그 압인의 문양을 그대로 모사해 냈다. 원형 테두리 안에 새겨진 세 갈래의 지팡이 형상. 아카데미 상층부에서 결계 통제권을 쥔 단 세 명의 원로 교수 중 한 사람의 인장이었다.

로간의 왼쪽 눈에서 타오르던 보랏빛 불꽃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상으로 올라가서, 이 인장의 주인이 있는 연구실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