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3층 복원실의 무거운 방음 철문을 닫자 차가운 석조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바닥에 고인 퀴퀴한 습기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로간은 흑연 가루가 묻은 손가락 끝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냈다. 불길에 그을려 가장자리가 바스러진 양피지 파편 위에, 방금 석판의 은빛 성유 자국에서 긁어내듯 모사한 직인의 윤곽이 선명했다. 원형 테두리를 가로지르는 세 갈래의 지팡이 형상이었다.
뒤따라오던 펠릭스가 로간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선형 계단 벽면에 박힌 마광석 불빛이 비치자, 펠릭스의 발걸음이 돌연 우뚝 멈췄다.
"잠깐. 그 그림, 다시 펴 봐."
펠릭스의 목소리가 계단참의 벽을 치고 거칠게 울렸다. 로간이 뒤를 돌아보자, 펠릭스는 양팔에 돋을새김 된 방어 룬 문신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팔뚝을 굳힌 채 양피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너 이거 어디서 베낀 거냐고."
"석판 맨 아랫단입니다. 대성전의 주어를 지우고 아카데미 대탑의 좌표를 틀어박을 때 찍힌 압인입니다. 잉크 대신 성유가 스며든 자리라 일반 육안으로는 안 보였지만, 문맥의 끝에 지맥 결속용 인장이 확실히 남아 있었습니다."
로간이 차분하게 대답하자, 펠릭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양피지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굵은 엄지손가락으로 흑연이 번진 세 갈래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문지르는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도 안 돼. 이건 하인츠 처장님의 고유 직인이야. 학사처장실 서류 결재할 때나 쓰는 도장이라고. 처장님이 이딴 짓을 왜 해?"
베로니카가 계단 두 칸을 성큼 올라서며 펠릭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벨트에 걸린 두꺼운 주석서 모서리가 차가운 철제 버클과 부딪쳐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펠릭스. 정신 차려.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멀쩡해! 하인츠 처장님은 빈민가 결투장 구석에서 마력 폭주로 뒤질 뻔한 날 아카데미 결계 학부로 건져 올려 준 사람이야! 뒷배 하나 없는 놈한테 결계 룬 새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장학금 결재서까지 직접 승인해 준 은인이라고! 그런 양반이 신전이랑 짜고 우리 목을 자르는 함정을 팠다고? 서류가 도용당했거나 신전 사제 놈들이 몰래 파낸 가짜 도장이 틀림없어!"
펠릭스의 고함이 좁은 석조 계단을 타고 위아래로 메아리쳤다. 베로니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품에서 얇은 행정 일람부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계단 위편의 어둠을 한번 훑은 뒤 펠릭스의 얼굴에 꽂혔다.
"소리 낮춰. 순찰 경비병이라도 부를 셈이야?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든 행정 기록은 거짓말을 안 해. 아카데미 중앙 대지맥의 쐐기 통제권을 가진 삼두정 원로는 원장, 교무처장, 그리고 결계 관리를 총괄하는 하인츠 학사처장 셋뿐이야. 원장은 반년째 황궁 마법 회의로 자리를 비웠고, 교무처장은 지맥 접근 권한을 갱신하지 않았어. 지난달 정정학부의 기말 실습 과제 목록에 특급 석판을 배정하고 최종 쐐기 개방 인가를 내린 서명권자는 하인츠 단 한 명뿐이야."
"도용일 수도 있잖아! 말콤 그 능구렁이 같은 감사관 자식이 결재인을 훔쳐서 찍었을 수도 있다고!"
"도용은 불가능합니다."
로간이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펠릭스의 시선이 로간에게 홱 쏠렸다. 로간은 왼쪽 눈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었다. 아직도 결계의 문맥을 억지로 읽어낸 탓에 눈가 안쪽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리고 있었다.
"신성 언어는 필경의 규칙을 절대 거스르지 못합니다. 일반 마법 문서라면 인장을 훔쳐 날인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저 석판은 신탁의 현실화를 강제하는 묵시록 석판입니다. 신성 문장의 주어를 대성전에서 아카데미로 비틀기 위해서는, 지맥 쐐기를 열어둔 자의 고유 생체 마력 파동이 인장에 함께 녹아들어야만 합니다. 주어의 좌표가 쐐기에 안착하는 순간 날인자의 영혼 각인이 동기화되지 않으면, 인과율의 반동이 그 자리에서 석판을 박살 냈을 겁니다."
로간은 펠릭스가 쥐고 있는 양피지를 가리켰다.
"저 세 갈래 지팡이의 음각 홈마다 백은의 눈물과 함께 굳어 있는 푸른 잔흔이 보이죠? 그건 결계학부 최상위 주술사들이 심장에 새기는 에테르 압축흔입니다. 펠릭스, 당신 팔에 새겨진 방어 룬의 기저 맥락과 완전히 같은 계통의 파동입니다. 하인츠 처장이 제 손으로 석판에 체온과 마력을 불어넣어 도장을 찍지 않았다면, 신탁의 파멸 궤도는 아카데미 대탑에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펠릭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푸른 룬 문신을 내려다보았다. 살갗 아래를 타고 흐르는 친숙한 마력의 결이, 양피지 위 흑연 자국에 묻어난 차가운 잔류 마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펠릭스의 다부진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 양반이…… 날 왜 결계 학부에서 이 지하 구석탱이 정정학부로 강제 전과시켰는지 알아? 결계 적성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어.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졸업장이나 따서 나가라고 배려해 준 줄 알았단 말이다."
펠릭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분노보다 짙은 배신감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런데 배려가 아니라…… 제물로 쓸 양들을 한 우리에 몰아넣은 거였어? 우리 셋을 포함해서, 이 폐과 직전 학부에 처박힌 낙제생 전부를?"
"말콤 감사관이 오늘 아침 정정학부 철문 앞까지 들이닥친 것도 우연이 아니었겠지."
베로니카가 차갑게 덧붙였다.
"우리가 카르단 마을 과제를 해결하면서 일으킨 파동 때문만은 아니었어. 정정학부가 특급 석판의 문맥을 손대다 자멸하는 과정을 신전의 눈으로 현장에서 확인하고, 실패의 책임을 완전히 확정 짓기 위한 수순이었던 거야. 하인츠는 신전과 손을 잡고 성도의 참사를 우리 학부의 '미숙한 왜곡 실패'로 둔갑시키려 하고 있어."
펠릭스는 양피지를 구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접어 제 가슴팍 품속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계단 위쪽을 노려보았다. 계단 끝자락 너머로 지상 본관의 대리석 바닥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봐야겠어."
펠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내 두 눈으로 처장실을 뒤져서, 그 인간이 신전 놈들이랑 무슨 더러운 거래를 했는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로 못 믿어. 만약 진짜로 우릴 팔아넘긴 거라면…… 내 손으로 그 망할 지팡이를 부러뜨려 놓을 테니까."
"진정해. 쳐들어가서 주먹부터 휘두르라는 뜻이 아니야."
베로니카가 깃펜 끝으로 펠릭스의 가슴팍을 툭 쳤다.
"야간 통금 시간이 막 시작됐어. 본관 복도에는 감사관 말콤이 풀어둔 신전 감시단과 아카데미 야간 순찰대가 깔려 있어.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야. 하인츠의 연구실은 지상 본관 4층, 결계 통제실 바로 옆에 있어."
로간이 계단 난간을 잡고 위쪽의 기척을 살폈다. 왼쪽 눈을 가늘게 뜨자, 계단 출구 너머 복도 바닥에 얇게 깔린 감지 마법의 격자선들이 보랏빛 선으로 어른거렸다.
"통제실 근처라면 하인츠 처장 본인이 걸어둔 경보 결계가 겹겹이 쳐져 있을 겁니다. 일반적인 해제 마법을 쓰면 역탐지로 위치가 발각됩니다."
"결계 해제는 네 전문이잖아, 로간."
베로니카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쓰는 로간을 바라보았다.
"사유서 문맥을 비틀어 시험관을 계단 밑으로 굴리고, 기록실 출입문의 금지 조건을 왜곡해 문을 열어젖힌 그 솜씨. 처장실 문이라고 안 통할 리 없지."
"문맥을 왜곡하려면 술식의 원문을 눈으로 직접 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그 4층 복도까지 발각되지 않고 도달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건 내가 맡지."
펠릭스가 양팔을 교차하며 거칠게 뼈마디를 꺾었다. 팔뚝에 새겨진 방어 룬 문신들이 푸른빛을 감추고 주변의 어둠과 완벽하게 동화되며 칙칙한 회색으로 가라앉았다.
"순찰대의 탐지망 파동을 분산시키는 차폐 결계라면 낙제생인 나도 얼마든지 칠 수 있어. 하인츠 그 인간한테 직접 배운 거니까."
씁쓸함이 짙게 밴 목소리였지만, 펠릭스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계단참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지상 본관으로 이어지는 아치형 통로를 향해 성큼성큼 올라갔다.
로간은 품속의 깃펜을 만지작거리며 펠릭스의 뒤를 따랐다. 머리 위쪽에서 야간 순찰대의 묵직한 철제 군화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상 본관 4층 학사처장실. 그곳에 이 거대한 조작의 종착점이자, 자신들을 제물로 바치려 한 자의 명백한 증거가 숨겨져 있었다. 일행의 그림자가 어두운 계단 벽면을 타고 조용히 지상으로 스며들었다.
지상 본관 4층 복도는 묵직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틀을 타고 스며드는 밤바람에 두꺼운 벨벳 커튼이 서걱거리는 소리만 주기적으로 울렸다. 순찰대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복도 저편 나선형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자, 벽면에 달라붙어 있던 펠릭스의 어깨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의 양팔에 새겨진 방어 룬에서 스며 나오던 탁한 잿빛 마력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나갔다. 다음 순찰 조가 위층 종탑을 돌고 내려오기까지 딱 칠 분 남아."
펠릭스가 턱짓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금박으로 테두리를 두른 거대한 흑단목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 관리 총괄이자 학사처장인 하인츠의 연구실이었다. 문설주를 따라 백은색 기름이 얇은 수막처럼 흐르고 있었고, 세 개의 동심원을 그리는 룬 자물쇠가 문 한가운데 박혀 푸른빛을 토해냈다.
베로니카가 허리춤에서 은제 깃펜을 뽑아 들고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삼중 성유 결계에 기계식 연쇄 자물쇠야. 성유 결계는 대성전 양식이고, 자물쇠의 배열은 결계 학부 상급 난제에 나오는 고립 명제식이야. 억지로 마력을 쑤셔 넣으면 본관 전체에 경보 종이 울려."
베로니카가 깃펜 끝으로 문틀 가장자리를 살짝 긁어내려 했다. 그러자 문 표면에 얇게 도포된 성유에서 날카로운 백색 스파크가 튀며 귓전을 찌르는 파열음을 냈다. 본관 복도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선배."
로간이 베로니카의 손목을 낚아채 뒤로 당겼다. 로간의 얇은 안경알 너머, 짙은 남색 곱슬머리 사이로 드러난 왼쪽 눈동자가 번뜩였다. 안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 짙은 보랏빛 안광이 흑단목 문 전체를 샅샅이 훑었다. 그의 시야 속에서 문틀의 물리적 형체는 흐릿해지고, 허공에 얽힌 신성 언어의 문장들이 선명한 금색 사슬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경보 마법이 아닙니다. 저 문에 걸린 명제는 인과율을 직접 묶어뒀습니다. 백은의 눈물로 덧칠한 신성어 조건절이에요."
로간이 문설주 상단에 새겨진 미세한 양각 글귀들을 왼쪽 눈으로 똑바로 응시했다. 글자들이 불규칙하게 뒤틀리며 그의 뇌리에 직접적인 언어 구조로 번역되어 내려앉았다.
"잠금 명제는 '오직 허가받은 결계주의 혈통만이 문을 연다'입니다. 여기에 정석적인 해제식을 대입하면 '허가받지 않은 자의 침입'이라는 반대 명제가 성립하면서 즉시 대지맥 파동을 경보 종탑으로 쏘아 올립니다. 애초에 풀라고 만든 자물쇠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열 건데? 부수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면 여기서 손가락만 빨다 잡히라는 거냐?"
펠릭스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초조하게 물었다.
로간은 품 안에서 흑요석 촉이 달린 필경용 철필을 꺼냈다. 마나를 억지로 쥐어짜 내는 대신, 왼쪽 눈의 보랏빛 초점을 문설주 오른쪽 모서리의 부정형 접속사에 정확히 맞추었다. 그의 동공 주변으로 실핏줄이 붉게 곤두서며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명제 자체를 부정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대신 주어와 서술어의 수식 관계를 바꿉니다. 주어를 '허가받지 못한 침입자의 거절'로 뒤틀면 반작용으로 빗장이 풀립니다."
로간의 철필 끝이 허공을 갈랐다. 그가 문틀에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채 공중에 획을 긋자, 보랏빛 잔상이 백은색 성유 막 위로 스며들었다. ‘혈통만이 문을 연다’는 서술어의 꼬리가 ‘열림을 거부하는 행위가 문을 연다’는 기만적인 논리로 비틀렸다.
스르륵.
성유 결계가 자신에게 가해진 간섭을 외부의 공격이 아닌 문 자체의 결함으로 오인했다. 푸른빛을 내뿜던 세 개의 룬 원판이 반대 방향으로 덜컥거리며 회전하더니, 묵직한 빗장이 저절로 뒤로 빠지는 둔탁한 금속음이 복도에 울렸다.
문이 소리 없이 안쪽으로 반 뼘가량 벌어졌다.
베로니카가 감탄 섞인 헛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단 심문관들이 네 눈을 보면 즉시 장작더미 위에 올리고 불부터 붙였을 거다. 들어가자, 지체할 시간 없어."
세 사람은 벌어진 틈으로 재빨리 미끄러져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학사처장실 내부는 지나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고서 서가에는 결계 마법에 관한 귀중한 양장본들이 빼곡했고, 방 한가운데 놓인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아카데미 행정 문서들이 흐트러짐 없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방 안을 감도는 공기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잉크 냄새 사이로 역겨울 정도로 진한 성유 향이 배어 있었다.
"하인츠 처장의 개인 금고는 저 책장 뒤에 있어."
펠릭스가 망설임 없이 방 안쪽 벽면으로 걸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붉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턱선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작년에 결계학 실기에서 낙제점을 받았을 때, 처장실로 불려 와서 저 서가 정리를 세 달 동안 했다. 처장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저 세 번째 칸의 법률 서적을 밀어 넣고 벽 안쪽에 손을 넣는 걸 봤어."
펠릭스가 서가 중앙의 두꺼운 주석서 세 권을 앞으로 당기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 판석 하나가 뒤로 젖혀졌다. 그 안쪽에 숨겨져 있던 묵직한 무쇠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고의 문짝에는 세 갈래 지팡이 문양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지하 복원실에서 확인했던 특급 신탁 석판의 직인과 단 하나의 획도 다르지 않은 형태였다.
"내가 열게."
펠릭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금고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의 양팔에 새겨진 방어 룬 문신이 은은하게 반응했다. 하인츠에게 직접 전수받았던 결계 제어 마력이 문양에 닿자, 금고는 주인의 손길로 착각한 듯 맥없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금고 안에는 금화나 보석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보랏빛 비단으로 감싼 두툼한 양피지 묶음과, 성도 바티카 대성전의 붉은 밀랍 인장이 찍힌 서류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베로니카가 재빨리 서류 뭉치를 낚아채 책상 위로 가져왔다. 로간과 펠릭스가 그 곁으로 바짝 붙었다. 촛불조차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로간의 보랏빛 왼쪽 눈동자가 서류의 첫 장을 훑어 내렸다.
"……성도 바티카 대성전 총사제단 명의의 신탁 대체 헌금 증서입니다."
로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양피지에 적힌 숫자는 일개 학과의 연간 예산을 아득히 뛰어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성도 바티카 대성전의 최고위 권위자 직인과 함께, 하인츠 처장의 자필 서명이 선명한 먹색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또 다른 문서는 더 노골적이었다. 제국 교단 공의회의 금박 낙인이 찍힌 정식 서약서였다.
베로니카가 차가운 손가락으로 서약서의 세부 조항을 짚었다.
"특급 신탁 '성도의 종말'에 기록된 파멸의 좌표를 아카데미 대탑으로 전가하고, 대지맥 쐐기의 제어권을 신전 감사단에 온전히 인도할 것. 그 대가로…… 하인츠 처장에게 성도 바티카 추기경 공석의 대리석 좌석을 영구 보장한다."
베로니카의 입술에서 서늘한 냉소가 새어 나왔다.
"학자 행세를 하던 늙은이가 결국 신전의 붉은 모자를 쓰겠다고 아카데미 전체를 도살장으로 내놓은 거였군. 게다가 이 명단을 봐."
그녀가 서약서 뒷면에 첨부된 별지를 바닥에 내던지듯 펼쳤다. 그곳에는 이번 학기 예언 정정학부로 강제 전과된 학생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가장 윗줄에 로간 바르도, 그 바로 아랫줄에 펠릭스 룬드의 이름이 굵은 잉크로 박혀 있었다.
"결계 제어에 결함이 있는 낙제생들을 의도적으로 한곳에 모아 방패막이로 삼는다. 신탁 조작의 반작용이 터져 나올 때 발생할 신성 폭풍을 흡수해 소멸할 소모품……."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서류에는 학생들이 파멸의 충격을 대신 받아내고 현장에서 전원 산화할 것이라는 예측 피해 수치까지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처장님의 직인이 찍힌 신전 기부금 수령증…… 정말로 우리를 제물로 팔아넘긴 거였나?"
펠릭스의 떨리는 음성이 방 안에 울렸다. 그의 억센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리고, 손톱 밑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이 서약서 여백을 붉게 물들였다.
"내가…… 내가 결계 마법의 제어를 못 해서 기초반을 맴돌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어. 평민 출신 결투사 자식도 결계의 수호자가 될 수 있다면서, 이 팔의 방어 룬 문신도 처장이 직접 골라 새겨준 거였단 말이다!"
펠릭스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배신감에 짓눌린 그의 거친 숨소리가 어두운 집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가 믿고 따랐던 스승이자 후견인은, 그저 폭탄의 파편을 가장 완벽하게 받아내고 죽어줄 고깃덩어리로 자신을 골라낸 것에 불과했다.
"진정하십시오, 펠릭스. 여기서 소리를 내면 끝입니다."
로간이 펠릭스의 어깨를 단단히 짚었다. 얇은 안경테 너머로 로간의 보랏빛 왼쪽 눈이 서류 하단의 날짜와 시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밀약은 이미 집행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바티카의 재앙을 이곳 대탑으로 묶어두려면 대지맥의 쐐기를 외부 간섭이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잠가야 합니다. 그 시점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로간이 가리킨 서약서의 마지막 줄에는 붉은 성유로 새겨진 글귀가 빛나고 있었다.
‘본 협약의 인과율은 금일 자정, 대지맥 핵의 쐐기가 신전 감사단에 의해 영구 축성되는 즉시 영구불변의 사실로 확정된다.’
자정.
앞으로 남은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 쐐기가 박히는 순간, 로간의 왜곡 능력으로도 손을 댈 수 없는 절대적인 신성 법칙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쿵.
집무실 외곽 복도에 쳐두었던 차폐 결계가 날카로운 진동을 일으켰다. 문설주 틈새로 서늘하고 압도적인 신성 마력의 파동이 스며들었다. 순찰대의 잡스러운 발소리가 아니었다. 순백의 예복 밑단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귓전을 긁는 금속 감식봉의 마찰음이 처장실 문 바로 바깥에서 멎었다.
베로니카가 재빨리 손짓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밀약 서약서와 기부금 영수증을 낚아채 품속 깊숙이 쑤셔 넣더니, 벽면 장식장 뒤편에 숨겨져 있던 석조 환기구 덮개를 손가락 끝으로 젖혔다.
로간은 펠릭스의 덜덜 떨리는 팔을 잡아끌었다. 펠릭스는 배신의 무게에 짓눌려 굳어 있던 몸을 억지로 비틀며 좁은 통로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로간과 베로니카가 연달아 몸을 들이밀고 덮개를 원래 위치로 끌어당긴 순간, 처장실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안쪽으로 거칠게 밀려 열렸다.
끼익거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은색 자수 흉갑을 덧댄 순백의 법의가 시야에 들어왔다. 감사관 말콤이었다.
말콤은 집무실 안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교단의 신성 인장을 새겨 넣은 황동 감식봉이 들려 있었다. 홀쭉한 뺨과 깊게 처진 입꼬리 사이로 짜증 섞인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결계 반응이 튀었다기에 올라왔더니…… 먼지투성이 바람뿐이로군. 하인츠 이 늙은이가 제 방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말콤은 감식봉 끝으로 책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장부 더미와 잉크병을 대충 훑어본 그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더니, 왼손 장갑을 벗어 품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수정구를 꺼내 책상 중앙에 올려놓았다.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수정구 표면에서 짙은 금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이내 수정구 너머에서 성도 바티카의 고위 사제 특유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콤 감사관. 지하 쐐기의 처리는 끝났는가."
말콤은 굳었던 표정을 단번에 풀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승진 심사를 앞둔 하급 관료 특유의 비굴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예, 주교 각하. 낮에 그 빌어먹을 정정학부 낙제생 놈들과 깐깐한 계집 조교 하나가 감사 규정을 핑계로 감식을 방해하는 바람에 지체되었습니다만, 장비 손괴 없이 서류 절차는 모두 마무리 지었습니다."
말콤의 뺨에 엷은 경련이 일었다. 목소리에는 상관을 향한 공손함 속에서도 자신의 결백과 성과를 어떻게든 입증해 내려는 방어적인 태도가 역력했다.
"그깟 학부의 잡음 따위는 알 바 아니다. 감사부 승진을 약조한 것은 네가 제시간에 일을 끝마친다는 전제하에 내린 처분이다. 자정이 지나면 본산의 대재앙을 옮겨올 인과율의 회랑이 열린다. 지맥 쐐기의 영구 축성에 차질이 생기면 네 목이 먼저 날아갈 줄 알아라."
수정구 속 목소리가 싸늘하게 경고하자, 말콤은 흉갑 위에 얹은 손을 굳게 오므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인츠 처장이 아카데미 결계 통제권을 이미 교단으로 넘겼고, 백은의 눈물로 석판의 주어까지 완벽하게 지워 바티카의 좌표를 이곳 대탑으로 덮어씌웠습니다. 제 감식봉으로 지맥 핵에 새겨진 방어 명제만 닫아걸면 끝납니다."
말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교조적인 사제 특유의 오만함이 마침내 얼굴 위로 드러났다.
"자정이 지나 신성 축성식이 완료되면 지맥 쐐기는 영구 고정된다. 정정학부의 버러지들이 무엇을 알아챘든 탑과 함께 증발할 뿐이지. 그들이 실패한 예언의 반동으로 산화하는 순간, 성도의 위기는 완전히 소멸하고 아카데미의 신성모독 학과도 흔적 없이 지워질 것입니다."
"좋다. 자정 정각이다. 지맥 심장부에서 쐐기를 박고 즉시 철수하라."
통신이 끊기며 푸른 수정구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말콤은 책상 위에서 수정구를 집어 품에 넣더니, 황동 감식봉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 하나를 구둣발로 짓이기며 집무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고 복도 저편으로 묵직한 구둣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환기구 통로 안에는 단 한 줌의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 속에서, 환기구 덮개가 덜컥거리며 다시 열렸다.
펠릭스가 가장 먼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두 눈에는 방금 전까지의 당혹감 대신 시퍼런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양팔에 새겨진 방어 룬 문신이 그의 격앙된 호흡에 맞춰 붉은빛을 뿜어냈다.
"성도를 구하겠답시고…… 이 탑에 있는 수천 명을 통째로 불태우겠다는 건가? 그 하인츠라는 자가, 내게 수호의 가치를 가르쳤던 스승이 고작 자기 출세를 위해 이따위 짓을 꾸몄단 말인가!"
펠릭스의 음성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처장의 책상 모서리를 주먹으로 내려칠 뻔하다가 가까스로 멈추었다.
베로니카가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서며 품에서 서약서를 꺼내 들었다.
"출세뿐만이 아니야. 신전 감사단은 지맥 쐐기를 영구 고정해 신탁의 수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하고 있어. 문맥이 고정되는 순간, 석판에 적힌 문장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절대적인 신의 명령으로 변해. 그 뒤에는 바르도의 눈으로도 손을 댈 수 없어."
베로니카는 안주머니에서 황동 회중시계를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이미 열한 시 이십 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사십 분 남짓이야. 말콤이 지맥 심장부에 도달해 쐐기를 축성하는 의식을 시작하면, 그 일대는 거대한 신성 결계로 차단돼. 외부에서는 그 누구도 진입할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간에게로 쏠렸다.
로간은 조용히 안경을 벗어 소맷자락으로 렌즈를 닦아냈다. 안경을 다시 고쳐 쓰자, 그의 왼쪽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시야에는 지상 4층 바닥을 뚫고 지하 깊숙한 곳까지 뻗어 내려가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 즉 아카데미 대지맥의 왜곡된 인과율이 선명한 핏빛 문장으로 얽혀 보이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자정이 되기 전에 대지맥 심장부로 내려가 왜곡된 쐐기의 문장을 파괴해야 합니다."
로간의 목소리는 서늘할 정도로 차분했다.
"파괴한다고? 지맥 쐐기는 아카데미 전체의 방어 결계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걸 부수면 탑 전체의 마력이 폭주할 텐데?"
펠릭스가 의문을 제기하자, 로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한 파괴가 아닙니다. 말콤이 박아 넣으려는 것은 신전의 교조적인 마침표입니다. 신성 축성식이라는 의식 자체가, '이 문장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절대적 종결 어미를 대지맥에 새기는 행위니까요."
로간은 집무실 벽면에 걸려 있던 아카데미 중앙 단면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축성식이 완성되기 직전, 쐐기에 새겨진 문장의 조건절을 강제로 벌리는 것입니다. 바티카 대성전으로 향해야 할 파멸이 아카데미로 우회된 경로에 '오류'를 주입하는 겁니다. 문맥의 흐름이 끊기면 지맥 쐐기는 고정되지 못하고 튕겨 나옵니다."
"말은 쉽지만, 지맥 심장부는 지금 말콤과 감사단이 장악하고 있어. 게다가 자정 직전의 대지맥은 성도에서 넘어오는 재앙의 인과율 때문에 마력 압력만으로도 살갗이 찢겨 나갈 텐데?"
베로니카가 깃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현실적인 한계를 짚었다. 그러자 펠릭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압력은 내가 막는다."
펠릭스의 짧은 붉은 머리칼 사이로 결연한 시선이 드러났다.
"하인츠 처장이 내게 이 방어 룬을 새겨준 이유가 제물로 써먹기 위해서였다면, 역으로 그 룬으로 놈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주지. 내 육신이 버티는 한 지맥의 반작용이든 신전 놈들의 신성 마법이든 단 한 발짝도 너희에게 닿지 못하게 하겠다."
"좋아. 룬 방벽의 전개 좌표는 내가 계산하지. 주석서에 기록된 지맥 결함 공식만 적용하면 십 분은 버틸 수 있어."
베로니카가 벨트에 차고 있던 두꺼운 주석서를 꺼내 들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결전의 의지로 번뜩였다.
로간은 품에서 불에 그을린 양피지 조각과 백은의 눈물 흔적이 남은 탁본을 단단히 쥐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삼십오 분.
단순히 낙제를 면하고 조용히 졸업하려 했던 계획은 이미 산산조각 났다. 이제는 자신의 목숨과 정정학부의 존폐, 나아가 이 아카데미 전체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도박이었다.
"출발하죠. 중앙 관리용 승강로는 이미 폐쇄되었을 테니, 지하 4층 배수로를 통해 지맥 심장부 외벽으로 직접 침투합니다."
로간이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너머,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지맥의 불길한 고동이 세 사람의 발밑을 거칠게 뒤흔들고 있었다.